자매에게,

밤도 아니고 아침도 아닌, 이 나라도 저 나라도 아닌, 어딘가에 걸친 시공간에서 네게 편지를 쓴다. 나는 튀르키예로 가고 있어. (여행을 처음 계획할 때는 터키였는데, 이 새 이름은 아직 입에 붙지 않네.)

기내는 이제 불이 꺼져 어둡고, 같이 여행 가는 엄마 혜서와 동생 윤희와 친구 희은은 잠들었어. 두꺼운 구름층 아래 강렬한 붉은 빛이 뜨는 해인지 지는 해인지 궁금했는데, 그새 창밖으로 어둠이 덮인 걸 보면 일몰이었던 듯해. 하지만 밤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우리가 경유할 아부다비는 지금 오후 5시밖에 안 됐다니까.

너도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있다면, 이처럼 땅에 메이지 않고 둥둥 떠 있는 느낌을 기억하겠지? 혹시 나처럼 여행의 모든 것을 그리워하지는 않았어? 기내식과 낯선 언어, 입국심사대를 지날 때의 긴장감, 아무리 계획해도 튀어나오는 변수들까지도 말이야.

아마 그럴 것 같아서, 네게 보내는 이번 달 편지는 2주 동안 튀르키예 여행을 하며 조금씩 써서 부치려고 해. 이 여행은 <탈혼기>를 무사히 출간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내게 주는 선물인데, 코로나가 전 세계를 휩쓴 이후로는 나도 이게 첫 해외여행이거든.

그런데 왜 튀르키예를 골랐냐고? 글쎄, 리라화 가치가 폭락했다는 소식도, ‘천상의 맛’이라는 카이막도 영향을 미치긴 했지. 하지만 내가 가장 기대하는 건 다른 여행객들과는 좀 달라. 나는 내 눈으로 직접 여신을 보고 싶어. 그게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냐면⋯ 아니, 조금만 참고 들어 봐.

“신이 남자라면, 남자가 신이다.”

페미니스트 신학자 메리 데일리가 한 말을,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그 말을 처음 듣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기분이었어. 기독교 문화를 흡수하며 자라난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법을 배웠었거든. 내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준다는 신을 남자 이외의 모습으로 상상하지 못했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내려온 신의 아들도 남자고, 신의 말을 전하는 목사들도 모두 남자였지.

나는 성년이 되고 나서는 무교로 돌아섰지만, 태도만은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 혹시 그 때문에 현실의 남자들을 신처럼 우러러보면서 여자인 내 몸은 더럽고 무가치하다고 느껴온 것은 아닌지. 신의 대체재로 찾은 남자에게 인정받으려고 그토록 노력해온 것은 아닌지.

우리가 전지전능한 창조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현실의 아버지에게서도 신이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야. 

알지,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문장을 뒤집어보는 습관이 있잖아. 그러니까, 이 문장도 진리일까? “신이 여자라면, 여자는 신이다.” 과연 신이 여자인 세상에서는 남자가 아닌 여자가 신처럼 위대할 수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을 품은 건 나뿐이 아니라서 2물결 페미니즘이 한창이었던 1970년대에는 소위 ‘여신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어. 남성 중심 일신교의 대안으로 고대의 여신 문화를 탐구하고 새로운 신앙을 만들어 가는 운동이었지.

그렇다고는 해도 여신이라니. 내가 아는 여신이라곤 그리스·로마 신화 속 여신이 다였어. 바람피우는 남편 대신 여자를 응징하고, 미를 뽐내고, 남자 영웅을 전심전력으로 돕는 여신들 말이야. ‘여신 미모’라는 말에서 보듯, 여신은 남자 눈에 매력적으로 보이는 여자들에게나 어울리는 칭호가 되어 버렸잖아?

“첨성대는 우물이지만 아래가 병처럼 퍼진 형태를 하고 있다. 또 입구가 엉뚱하게도 몸 가운데 뚫려 있다. 왜일까?

이 의문들은 첨성대를 여신상으로 보면 다 풀린다. 첨성대는 여체의 몸통 부분을 닮았다. 여성의 몸을 단아하게 형상화한 것이다. 가운데 네모난 창구는 성혈로서 신성한 여근에 해당한다.”

-<여신을 찾아서>, p.462

그러던 내가 진정으로 여신을 만난 건 김신명숙 선생님의 <여신을 찾아서>를 읽으면서야. 책은 빗살무늬토기와 고인돌, 선덕왕과 천관녀처럼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나 별 감흥은 없는 유물과 인물에서 고대 여신 문화의 흔적을 되살려내거든.

그중에서도 첨성대가 여신상이라는 주장은 정말 충격적이었어. 너도 첨성대를 직접 본 적 있어? 나는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경주로 갔는데, 그때 봤던 첨성대는 그리 깊은 인상을 주지 않았어. 그저 나와는 상관없는 옛날 사람들이 만든 돌무더기일 뿐이었지.

페미니즘을 알고 나서는 더더욱 이 땅의 역사와 끈이 끊어진 기분이었어. 내 성별은 내내 착취당하기만 했고,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듯했어. 하지만 한때 이 땅에서 여자는 신이었고, 왕이었고, 그렇게 거대한 돌을 세워 기념할 가치가 있었던 거야. 그 가능성만으로도 우리가 밟고 선 땅이 좀 다르게 보이지 않아? 적어도 나는 그랬어.

아부다비 공항에서, 이스탄불 공항에서, 터키의 도시들에서 나는 히잡을 뒤집어쓴 여자들을 한참 관찰했어. 눈만 내놓는 니캅은 드물었지만, 머릿수건을 아예 쓰지 않은 여자는 거의 나 같은 관광객이었어. 여기가 이슬람 문화권이라는 씁쓸한 실감이 확 들었지. 모스크를 들어갈 때는 나도 준비해 온 스카프로 머리카락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됐어.

“남자는 하느님의 모습과 영광을 지니고 있으니 머리를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 성경, 고린도전서 11:7

물론 여자한테 머리카락을 숨기라고 한 건 이슬람이 최초는 아니지. 신약 전서 대부분을 쓴 사도바울도 같은 지시를 내렸거든(그나마 다행히도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그 지시를 무시하고 있어). 코란도 성경도 있기 전, 두 종교가 발원한 이곳 중동 지역에는 이미 그런 식의 여성 차별이 퍼져 있었대.

튀르키예는 공식적으로 선포된 국교는 없지만 인구의 90% 이상이 이슬람교를 믿는다고 해. 우리는 렌터카를 빌려 거대한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쪽 절반을 돌기로 했는데, 창밖으로 낯선 풍경을 감상하고 있으면 다시 또 다시 모스크의 둥근 지붕이 스쳐 지나갔어.

초기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석굴을 파고 숨어들었던 카파도키아와 바울이 편지를 보냈던 고대 도시 에베소와 성모 마리아가 말년을 지냈다는 집까지, 튀르키예는 기독교와도 연이 깊어. 그래서 독실한 기독교인들도 여기로 성지 순례를 온다지.

언뜻 여신을 찾기에 적합한 곳 같지는 않지? 그래도 이스탄불 공항을 조금 벗어난 후부터 끝도 없이 펼쳐지는 밀밭을 좀 봐. 이게 여신의 첫 흔적이야.

전 세계에서 밀을 최초로 기른 곳이 여기 아나톨리아 반도거든. 인류는 구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도자기를 굽고, 성벽을 쌓고, 그 모든 것을 무너트렸다가 다시 세우기도 했어. 그사이 여자를 차별하는 틀은 차근차근 정교해졌지.

그러나 켜켜이 쌓인 흔적을 헤치고 들어가면,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히 느껴지는 가부장제에는 분명 그 ‘이전’이 존재했어. 그리고 그때 여자들 곁에는 여신이 있었지.

“언니, 언니! 이거 봐.”

윤희가 숨죽인 목소리로 나를 다급하게 불렀어. 며칠을 달려 도착한 튀르키예의 수도 앙카라였어.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리가 찾던 ‘그것’이 있었어.

바로 구천 년도 전에 세워진 인류 최초의 도시 차탈회위크에서 발굴된 여신상이었어. 분명 사진으로 여러 번 봤는데도 실물로 보자 벅차오르더라구. 주머니에 들어가는 크기를 예상했는데 웬만한 항아리보다도 컸고, 진흙으로 섬세하게 빚은 형태는 하나도 무뎌지지 않았어.

직접 보지 않은 네게 어떻게 감동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까. 물론 더 아름다운 유물은 많아도 너도 곧장 그 태도에 사로잡히고 말 거야. 우리의 까마득한 조상은 벗고 있지만 우리가 아는 방식대로 벗고 있지는 않아. 가슴도 성기도 숨길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신감의 근원인 것처럼, 양팔에 맹수를 거느리고 앉은 위엄은 너도 아마 생전 처음 볼 거야.

기도라는 걸 하지 않은지 오래인 내가 한 가지 기도를 올린다면, 그런 믿음을 걸어볼 수 있다면, 그 여신상 같은 여자가 되고 싶다고 빌었어. 오래 서서 보고 있자니, 어떤 초자연적인 힘을 빌리지 않아도 그만한 힘이 내 안에서 솟아나는 것 같았어.

그래도 나는 신자가 되기는 글렀나 봐. 어떤 순간에도 어려운 질문을 멈추기 힘들어.

닭이 먼절까, 달걀이 먼절까? 여신이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준 걸까, 아님 평등한 사회여서 여신을 섬겼던 걸까?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기독교나 이슬람교 대신 차탈회위크의 여신을 믿는다면 세상은 과연 더 평등해질까?

우리는 차탈회위크 유적지를 향해 차를 몰았어. 우리가 하룻밤을 묵은 콘야도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닌데, 유적지에 가까워질수록 풍경은 단순해졌지.

“당신은 내비게이션이 당신을 잘못된 곳으로 데려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구글 지도에 누군가 남겨둔 리뷰가 딱이었어. 입장료도, 줄 지어선 관광버스도 없고, 그 흔한 냉장고 자석 하나 팔지 않는 유적은 조금 방치된 느낌마저 들었어.

하지만 만 년에 가까운 세월을 거슬러 신석기 시대로 돌아가면 이곳은 최첨단을 달리는 도시였어. 동굴이 아니라 벽돌을 쌓아 만든 집에서 모여 살았고, 고도의 예술품으로 집을 장식했고, 다른 지역과 무역을 하기도 했어.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에서 본 것 같은 여신상이 다수 출토된 이 도시에서 인간들은 지금과 달리 평등했대. 그걸 대체 어떻게 아느냐고?

첫 번째 근거는 서로 사이좋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의 크기가 거의 동일하다는 거야. 딱히 누구 하나가 더 화려하고 부유한 공간을 누리지 않으니 자기가 근본적으로 타인과 다르게 고귀한 존재라고 믿지도 않았겠지.

두 번째 근거는 묻힌 뼈들인데, 여자건 남자건 노인이건 아이건 영양상태가 균일하대. 만 년 후 누군가 우리의 뼈를 읽는다면 여자들의 극심한 다이어트가 뼈에 남긴 흔적에서 불평등을 알아내지 않을까 싶어.

세 번째 근거는 당연히 죽을 때도 함께 묻혔던 여신상들이겠지. 그런 여자를 빚으면서 현실의 여자를 미워하기는 불가능할 테니까.

근처에 흐르는 강은 물고기를 내어주고, 때가 되면 기른 곡물을 수확하고, 너른 벌판에 가득한 초식동물을 잡아먹기도 하고, 남는 시간엔 강가의 진흙으로 필요한 것들을 만들고, 자연에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하지 않고도 풍요를 누리고… 지금은 그저 폐허라도 한때 여긴 여느 종교에서 약속하는 낙원에 가까운 모습이었을 거야.

내가 당장 모든 종교를 버리고 우리 모두 여신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 차탈회위크 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에페소스에 있을 거야.

매일 네 시간 넘게 자동차를 운전해 여행 후반부에 겨우 도착한 셀주크는 몹시 더웠고, 에어컨을 미약하게나마 틀어놓은 가게를 시내에서 딱 하나 찾을 수 있었어. 우리는 거기서 햄버거와 콜라를 먹으며 여행 계획을 세웠지.

이곳이 가장 화려했던 시기, 그러니까 그 이름을 멀리까지 떨쳤던 고대 도시 에페소스는 이미 흔적만이 남아 있었어.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보러 간 아르테미스 신전은 화려하고 거대한 기둥이 단 한 개만 우뚝 서 있었다면 믿어져?

그래도 내가 보고자 했던 아르테미스 여신상만은 꽤 온전한 형태였어. 에페소스 박물관의 각종 전시관을 거쳐서 마지막으로 다다른 전시관에는 두 개의 여신상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어.

아마 네게 익숙한 모습은 아닐 거야. 이 동네에서는 아름다운 대리석 옷자락을 휘날리며 활을 쏘는 '처녀신'을 믿지 않았으니까. 이 여신들은 대신 가슴팍에 포도알 같기도 달걀 같기도 한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어. 차탈회위크의 여신상에서 이어졌을 토착의 믿음이래.

둘 중 하나에는 ‘위대한 아르테미스’, 다른 쪽에는 ‘아름다운 아르테미스’라는 이름표가 붙어있었어. ‘위대한’ 쪽이 크기가 더 컸고 기원후 1세기에 만들어져 100년 정도 앞서 있었지. ‘아름다운’ 쪽은 우리가 아는 그리스 신들과 좀 더 닮아 보였어. 나는 그 이름을 곱씹으며 한참을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했어.

튀르키예에서 여러 박물관을 돌아다닌 내게는 이제 차탈회위크에서부터 이어지는 흐름이 보였어. 위대했던 여신들은 점차 작아지고, 무해해지고, 남자 눈에 비치는 모습을 의식하고, 그러다 남자 영웅이 무찌르는 괴물에 불과하게 되고, 끝내는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어.

그건 너무도 가슴 아프게 다가오면서도 동시에 불가피해 보이기도 했어.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각자의 다 헤아릴 수 없는 믿음으로 해온 선택이 모여 우리는 여기에 도달했지. 이천 년 넘게 지속됐던 차탈회위크가 어느 순간 버려졌듯, 우리의 믿음은 우리를 알 수 없는 곳으로 계속 몰고 가는지도 몰라.

그렇다면 역시 우리는 낙원을 복구하는 대신 새로운 믿음을 고안해야 할 거야. 우리를 여태 없던 곳으로 데려다줄, 여태 없던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겠지. 우리가 잊어버린 과거의 여신들은 많은 힌트를 주겠지만, 그 누구도 자기가 사는 현재를 쓸 뿐이지 역사를 쓰지는 못하잖아.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나는 드디어 점차 네가 사는 시공간에 가까워지고 있어. 다시 우리의 땅에 발을 붙일 시간이야.

2022년 8월 1일

어딜 가든 네가 있는 곳으로 돌아올 혜담이.

추신 1.

여행하는 동안은 요리는 하지 않았으니 레시피 대신 튀르키예에서 먹은 아침 식사를 공유할게. 복잡한 조리 없이 신선한 재료만으로 맛이 나는 게 신기하더라고.

참고로 카이막은 독립적인 음식이라기보단 아침 식사에 곁들이는 반찬에 가깝대. 유제품에서 호불호 갈리는 부분을 모두 제거한 듯한 카이막은 꿀과 너무도 잘 어울렸어. (그림은 평소처럼 동생 윤희가 그려주었지만 카이막만은 카이막을 사랑한 희은이 그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