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가짜 노동’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왜 ‘가짜 노동’을 하고 있는가?

Bullshit jobs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117), 2024.3.6,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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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레터의 마지막엔, 책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출간 알림 및 관련 이벤트 안내가 있습니다👥

키워드: 가짜 노동, 불쉿잡, 진짜 노동, 조건, 의미

1.머리말
2.불쉿 잡 : ‘내 일은 의미 있을까?’
3.무엇이 우리를 무능하게 만드는가?
4.그저 ‘소박하고 괜찮은 노동’을 할 권리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연구자님은 ‘가짜 노동’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최근 한 언론사에서 「당신을 좀먹는 가짜 노동」(링크) 기획을 진행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가짜 노동’이라는 말은 2022년 덴마크의 인류학자 데니스 뇌르마르크 등이 쓴 <가짜 노동>이라는 책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이슈가 되기 시작했는데요. (유사하게는 ‘개똥같은 직업’이라는 의미의 <불쉿 잡>(2018)도 있습니다)

가짜 노동이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일- 의전, 서류 작업, 불필요한 회의 등-을 뜻합니다.

쓸모는 없지만 해야되니까 하는 일, 바쁜 척하기 위한 일, 하품을 먹으며 상사의 눈치보는 일, 퇴근 카드 태그할 때까지 태연한 척하고 의자에 앉아있는 일, 윗사람에게 충성심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유지되고 있는 일입니다.

2017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도 이런 ‘가짜 노동’이 무려 업무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하고요.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근면을 강조하는 상명하복식 문화의 영향으로, 일하는 시간은 OECD에서 가장 길면서도 생산성은 꼴찌 수준입니다. 대체로 ‘가짜 노동’ 탓이죠.

<fig.1> 2022년 출간된 데니스 뇌르마르크·아네르스 포그 옌센 의 <가짜 노동> (왼쪽) 밤 늦은 시간까지 불이 켜져있는 사무실들 / 자음과모음, Unsplash

그런데 저는 ‘가짜 노동’에 대한 글들을 읽으면서 예전부터 몹시 궁금했습니다.

크게는 두 가지 궁금증인데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왜 그런 가짜 노동은 ‘존재’할까?
둘째, 가짜 노동이 있다면 ‘진짜 노동’은 뭘까?

1) 첫째 질문을 조금 더 풀어보자면, 기관, 기업이 바보가 아닐텐데 왜 저런 ‘비효율적인 사각지대’를 남겨두느냐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많은 기업들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내쫓고 있는데요. 별 쓸모도 없는 일을 계속 시키며 돈을 많이 주는 일자리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런 가짜 노동 현상은 전세계적으로 관찰됩니다! → 그렇다면 이게 ‘일부의 예외’가 아니라 무언가 우리가 결정적으로 간과하고 있는 시스템 상의 맹점이 아닐까? 라는 궁금증이 들었던 것이고요.

2) 둘째 질문은, ‘가짜 노동’이라는 이야기가 공감을 받는다는 건 자연히 ‘진짜 노동’이라는 개념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보면, 사람들이 무조건 일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며 -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다수의 학자들이 주장해왔습니다.1) 오늘날에도 실직 상태가 단지 경제적 곤란 뿐 아니라 자존감에도 큰 영향을 미치며, 하고 싶은 일을 잘 해내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도 많고요. 저도 ‘가짜 노동’은 싫지만, 일을 잘 하고 싶습니다.

과연 ‘가짜 노동’과 ‘진짜 노동’의 조건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많은 ‘가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어떤 종류의 노동을 하고 싶어할까요? 우리가 만족스러운 노동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레터에서는 <불쉿 잡>(데이비드 그레이버), <노동이란 무엇인가>(라르스 스벤젠) 등을 지팡이 삼아 알쏭달쏭한 ‘진짜/가짜 노동’에 대해 해찰해보겠습니다.

1)“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확고한 목적만 있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목적은 행복한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이고, 확고한 목적은 주로 노동을 통해 실현된다”-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알맞은 일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 일을 할 기회를 얻기 위한 열쇠는 행복이다”-존 듀이

【2.불쉿 잡 : ‘내 일은 의미 있을까?’】

‘나는 일터에서 어떤 능력을 발휘하고 있을까?’

‘내가 하는 일은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을까?’

연구자님도 한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으실텐데요. 아직 취업을 준비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나는 삶에서 어떤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 이 일을 하고 싶다!’라고 생각해보셨을테고요.

우리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일을 하진 않습니다.

우리는 일을 통해 소속감을 얻고, 효능감을 얻고, 자기 실현을 하기도 합니다. 조금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내가 만든 밥을 먹고 기뻐하는 손님의 얼굴을 보고 행복해지거나 내가 만든 영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일도 모두 여기에 포함되죠.

하지만 미국의 인류학자, 사상가 데이비드 그레이버에 따르면, 오늘날 일터에서 이런 삶의 의미와 기쁨을 얻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래와 같은 딜레마(‘현대 노동의 패러독스’)가 이를 말해주죠.

첫째, 거의 모든 사람들의 존엄에 대한 감각과 자존감은 생계를 위한 노동에서 회복된다.
둘째,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을 싫어한다.

왜 이런 모순이 생기는 걸까요?

<fig.2> 데이비드 그레이버 런던정경대 교수(1961~2020). 그는 2011년 월가 점령 시위 당시 "우리가 99%다"라는 문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왼쪽) 불쉿 잡 책 표지 / LSE(링크), 민음사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쓴 <불쉿 잡>의 핵심 메시지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일이 너무 쓸모 없고 의미도 없어서 시무룩해진 나머지 병까지 들 지경이고, 이런 노동은 없어지긴 커녕 되레 늘고있다! 이는 1%가 부를 독점하면서 발생한 시스템적인 비효율이다. (반면 직접 가치를 생산하는 필수노동자들은 더 많은 일에 시달리고 있다)”

머리말에서 ‘가짜 노동’이 ‘쓸모가 없는 일(=비효율성)’에만 집중했다면, ‘불쉿 잡’은 ‘쓸모 없음’과 함께 ‘의미 없음’까지 포함하는데요. 효율적으로 일하더라도 사회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 일이라면 불쉿 잡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출장 간 임원을 위해 호텔 객실에 러닝머신을 설치하거나, 읽히지 않기 위한 보고서를 세 가지 버전으로 쓰는 것 외에도 - 빈곤층의 치료비 지원 예산을 ‘효율적으로’ 삭감하거나 키오스크를 도입하고 직원을 해고해 ‘효율적으로’ 손님을 화나게 하는 일, 눈길을 끌기 위해 낚시성 기사를 쓰는 일 등이 이에 속할 수 있습니다.

얼핏, 자신의 일을 ‘불쉿 잡’이라고 정의한 그레이버의 말에 많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화를 냈을 것 같기도 한데요.

놀랍게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저자가 2013년 ‘불쉿 잡’에 대한 칼럼(링크)을 처음 쓰고 나서 전세계 수천명의 사람들로부터 “나도 불쉿 잡 종사자다!”라고 외치는 편지들을 받았고, 그런 반응들을 취합하는 등 추가 취재를 통해 <불쉿 잡> 책이 나오자마자 십수개국에 번역 출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급진적인 논지에 대한 논란도 있었고요. 그야말로 논란도 많고, 호응도 많은 뜨거운 책인 것이죠.

저자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은 칼럼이 나간 이후 그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가장 자주 들은 불평은 이것이었다. ‘나는 인생에서 쓸모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 아니면 적어도 누군가를 해하지는 않는 일 말이다. 그런데 이 경제의 작동방식에 따르면, 평생 타인을 돌보면서 살려고 하면 보수가 너무 낮아 빚을 크게 지고 자기 가족도 돌보지 못한다’

-데이비드 그레이버, <불쉿 잡>(이하 동일)

저는 이 책에서 불쉿 잡의 핵심 키워드로 ‘의미 없음’과 ‘비자율성’을 꼽아보았는데요.

1) 우선 ‘의미 없음’과 관련해섭니다.

‘나름 괜찮은 일자리지만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어서 힘들다니, 정말 배부른 소리가 아닌가? 일자리조차 없는 사람이 잔뜩인데?’

이 책의 핵심 내용(‘불쉿 잡에 종사하는 우울한 사람들’)을 읽는다면 반사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솔직히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비슷한 생각으로, 눈썹을 찡그리며 책장을 넘겼습니다.

다만, 다시 이 책을 오랜만에 천천히 읽어가다보니 의미 없는 노동이 얼마나 한 사람에게 가혹한 일일 수 있을지에 대해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과거 도스토예프스키는 의미 없는 노동의 치명성에 대해 아래와 같이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위축시키고 싶다면, 악랄한 벌을 주고 가장 지독한 살인자도 벌벌 떨고 겁에 질릴 지경으로 짓밟고 싶다면, 부조리할 정도로 완전히 쓸모없는 일을 시키면 된다 […] 죄수에게 한 양동이에서 다른 양동이로 물을 붓게 하고,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모래를 퍼내고, 흙을 파서 옮긴 다음 즉각 다시 원래 자리로 옮기라고 한다면, 며칠 지나지 않아 목을 매달거나 중범죄를 1000개는 저지를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런 굴욕과 수치와 고문을 견디기보다는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테니까”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The House of the dead>(1862)

<불쉿 잡> 속 ‘형식상 서류’를 만드는 일만 하루 종일 하는 한 공무원은 “시민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며 우울해했고, IT 기업에서 일하는 프로덕트 매니저는 자신의 잠재력을 키울 수 없고 상사의 눈치만 봐야 하는 업무에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fig.3> '일하는 척하면서 딴짓하기'를 위한 꿀팁들. 웹서핑을 할 때 가끔 리드미컬하게 타자기를 두두 쳐주는 것도 중요합니다.(왼쪽) 예전 도서관에서 빌려 본 <불쉿 잡> 책 귀퉁이에 적혀있던 낙서. 연한 연필로 ‘내 일은 세상에서 사라져도 될까? OK’라고 자문자답하듯 적어둔 글자가 왠지 쓸쓸해보였습니다. / 비주얼다이브, 김스피 촬영

‘불쉿 잡’ 종사자들은 ‘실제로’ 업무에서 효용과 의미를 찾지 못해 면역력 저하, PTSD,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고요.

* 릴리언(IT업체 프로덕트 매니저) : 이런 직업에 종사하면 어떤 기분이 되는가? 의기소침해지고 우울해진다. 나는 직업에서 삶의 의미 거의 전부를 얻는데, 지금 내 직업에는 아무런 의미도 목표도 없다 [...] 내가 여기 없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고 [...] 내 자신감도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극복할 도전이 주어지지 않는데 내가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아마 좋은 일을 할 능력이 모두 시들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마 나는 쓸모있는 것을 하나도 할 줄 모르는 것 같다 […] 더 유용한 사람이 되거나 일에 헌신하고자 하는 노력은 모두 거부당하며, 조직을 흔들고 보스의 권위에 도전하려 한다고 적지 않게 조롱당한다…

* 바실리(외무부 연구원) : 우리 작업의 효용이나 의미에 의문을 제기하면 보스들은 마치 내가 외계인인 것처럼 쳐다본다. 그럴 만도 하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하는 작업이 총체적 난센스로 보이지 않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만약 난센스로 보이게 되면 그들의 지위는 폐기되고 실직자가 생긴다.

2) ‘의미 없음’의 문제는 ‘비자율성’과도 이어집니다.

릴리언, 바실리의 케이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은, 조직이 성과를 우선하기보다는 단지 조직 유지, 상사에 대한 충성심을 우선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실제로 많은 실무 노동자들은, 결코 ‘시키는 것만 할 수 있는’ 바보가 아닙니다.

직접 고객을 만나고, 현장에서 얻을 수 있는 혜안들이 있고 제각기 다양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상사의 자존심과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조직에 ‘괜한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이를 억누르도록 강요당하는 것이죠. “최대한 오랜 시간동안, 열심히 순종하며 일하는 척” 하면서요.2)

저는 이런 대목을 읽으며 마음이 많이 답답해졌고, 또 이런 특성이 우리나라 기업, 기관만의 문제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요소는 단지 ‘사무실 근무’의 특성만은 아닙니다. ‘단지 일하는지 감시하기 위한’ 프로그램, 이메일 보고, 화상회의 등의 ‘가짜 노동’은 코로나 기간 동안 재택 근무를 할 때도 사라지긴 커녕 더 많아졌다는 기사도 있습니다.(링크)

2)‘노동자의 삶’에 초점을 맞춰 자본주의를 연구해온 경제학자 마이클 페럴먼은 <무엇이 우리를 무능하게 만드는가>(링크)에서 18~19세기 이래 기업은 개인의 잠재력을 북돋기보다는 억누르는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대해왔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역량이 커질 경우 사측에 대해 협상력을 갖게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들의 '잠재력'이 꼭 회사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점 등에섭니다. 조금 길긴 하지만, 이 책의 핵심 내용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고 오늘의 질문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일부 옮겨봅니다.

“경영진이 작업환경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실제로 갖고 있을 때조차도, 세이고의 탄광 사례에서 그랬던 것처럼, (노동자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위험을 무시하는 게 이득일 수 있다[…]경영진은 위계질서의 아래쪽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과 근면을 요구한다. 이들 노동자 중 상당수가 생산적인 노력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노동자들을 헌신하게 하고 그들의 역량을 키움으로써 자기 자신을 더 번성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두가지 위험성을 제기한다. 노동자들의 역량을 인정하는 것은 높아진 지위에 따르는 경영진의 몫을 위협할 수 있다. 더 위험한 것은, 달라진 경영진의 위치가 노동자들을 대담하게 만들어 프로크루스테스식의 획일주의에 도전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 마이클 페럴먼, <무엇이 우리를 무능하게 만드는가>

【3.무엇이 우리를 무능하게 만드는가?】

그렇다면, 머리말에서 던진 질문이 다시 떠오릅니다.

‘왜 이런 이상한 현상(일)이 유지 되는가?’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불쉿 잡>에서, ‘불쉿 잡’이 현재 경제 시스템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짚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책에서 사실상 노동을 두 종류로 나눕니다. 거칠게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불쉿 잡’ = 실제 사회적 가치는 거의 만들어내지 않지만, 돈을 받는 화이트칼라 노동
2) ‘필수 노동’ = 실제로 사회를 더 낫게 만드는 서비스, 물건을 제공하는 노동. 돌봄노동 등 (예.간호사, 교사, 소방관, 요리사 등)

여기서 문제가 되는 핵심 지점은, 1의 노동은 의미있는 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면서도 양산되어 일하는 사람들을 주눅들게 만들고 2의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사회에 의미있는 가치를 생산하면서도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저임금과 많은 일에 시달린다는 것입니다

<fig.4> 섬뜩한 7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el Empleo>(2008·영상), 등장인물들은 테이블, 자동차, 의자, 신호등, 열쇠걸이 등 사물로 붙박여있고, 이들을 활용하여 아침에 사무실로 출근한 주인공이 마지막에 ‘바닥깔개’가 되어 사무실 문 앞에 눕는 것으로 영상은 끝납니다. (왼쪽) 2009년 영국 신경제제단의 직업유형 별 임금 대비 사회적 보상 효과 분석에 따르면 은행가, 광고회사 사장, 세무사는 각각 보수 1파운드 대비 7~11.5 파운드의 사회적 가치를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병원 청소부와 재활용품 처리 노동자, 유아원 근무자 등 대표적인 저임금 필수 노동자는 보수 1파운드 대비 7~12파운드의 사회적 가치를 발생시키는 것으로 분석됐습니다.(자료) IMDB, 경향신문

다소 알쏭달쏭할 수도 있지만, “돈(권력)은 모이는 곳에 모이기 마련”이라고 그 이유를 요약해볼 수 있을텐데요.

우선,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런 ‘모순, 불균형’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로, 20세기 이후 극심해진 부의 불균형과 금융 등 무형 상품(서비스) 시장의 급속한 성장을 듭니다.

요는, 부와 권력의 분배가 지나치게 불균형해지면 ‘효율성’ 자체에 왜곡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규모가 크기 때문에 살아남고(규모의 경제), 막대한 세금(보조금 등)이 투입되고, 단지 규모와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쓸데없는 - ‘일을 위한 일’들이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정부도 마찬가집니다. (링크)

저자는 기업, 정책이 모두 ‘효율을 추구한다’는 것조차도 환상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보통 큰 집단일수록 개인의 잠재력이 발휘되기보단 억눌려질 가능성이 더 크고요.

그들(자유 시장 주의자)의 기획은 크게 실패할수록 더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이런 사태에 대해 논리적으로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그 기획을 추진하는 실제 동력이 경제적 동기가 아니라는 것밖에 없다 [...] 누군가가 철저하게 경제적으로 합리적이라 할 수 없는(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높은 봉급을 주는 것처럼) 어떤 일을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명분하에 수행한다면, 고대 로마인들처럼 ‘누가 이득을 보는가?qui bono?’ 그리고 어떻게 이득을 보는가를 물어보는 것이 좋다.

어쩌면, 모두가 ‘합리적’이라는 것도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일단 자원 배분만 놓고 보아도, 역사적으로 정말 필요한 곳에 필요한 자원이 합리적으로 배분된 적이 없습니다. 배가 몹시 고픈 사람과 배가 터질듯이 먹고 비싼 다이어트 주사를 맞는 사람, 수백만원 고액 과외를 받는 아이와 교과 과정을 따라가기도 어려운 아이가 동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노동력도 마찬가지로 합리적인 배분이 되지 않을텐데 왜 이런 생각을 못해봤을까?라고 새삼 엉뚱한 생각을 떠올리게 되기도 했고요.

이어 저는 과거 부유한 귀족의 집에는 촛불만 끄는 하인, 포크만 관리하는 하인 등이 따로 있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중에 몇 명 정도는 사회에 더 도움되는 일을 했어도 좋았을텐데 말이죠.

또한 이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저자가 “결코 ‘필수 노동자’들이 기계로 대체되지 않을 것이다!”를 외친 부분입니다.3)

오늘날 AI, 자동화의 영향으로 실질 노동자들이 대체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지만, 저자는 이런 상상들이 대체로 애매하고 막연할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노동자들을 일자리 밖으로 내몰거나 기계와 경쟁시켜 그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된다 […] 내가 볼 때 그런 설명이 빠뜨리고 있는 점을 강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로봇이 인간을 대체한다는 예견은 어느 지점까지 자고 나면 항상 멈춘다는 것이다 [...] 런던 지하철 매표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표를 받는 것이 아니라 길 잃은 아이를 찾고 주정뱅이를 달랜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로봇이 나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을 뿐만 아니라, 설사 그런 로봇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우리 대부분은 그런 일을 로봇이 할 법한 방식으로 수행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 가슴을 쓸어내리기엔, 여전히 남은 문제가 존재합니다.

기계가 ‘마법같이’ 궂은 일을 대신할 수 있다는 환상 때문에, 오히려 더 강력한 관리감독 하에서 더 힘든 필수 노동을 감당하게 된 소외된 이들의 노동조건 문제입니다.

과거 레터에서 살펴보았던 ‘콘텐츠 모더레이터’들의 일도 이런 유형의 일이라고 볼 수 있겠죠. (링크)

✏️

“개인적 성취를 위한 꿈, 그를 통해 공공선에 이바지하려는 욕망은 임금노동과 단단히 결부되어 있지만, 이같은 꿈은 납치되어 좀 다른 귀결로 향할 수 있다. 개인적 풍요도 사회적 부도 생산하지 못하고, 사적으로 전용되는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데 그치곤 하는 것이다.”

- 케이스 윅스,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3) 책이 출간된 시기가 2018년이다보니, 저자는 여기서 AI가 ‘불쉿 잡’을 대체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고 있지 않지만, 오히려 상당수의 불쉿잡의 경우 애초에 하는 일 자체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불쉿 잡을 극도로 효율화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 이유로 지속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부장님께 인사하는 의전 로봇, 회의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우와!’만 외치는 로봇들이 앉아있다면 상사들이 기뻐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부분이야말로 불쉿 잡의 대체할 수 없는 가치(?)라고 할까요.

【4.그저 ‘소박하고 괜찮은 노동’을 할 권리】

지금까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에서 의미를 찾고 싶지만, 일하긴 싫어!(가치, 의미 있는 일에 몰두해 뿌듯함을 느끼고 싶지만, ‘가짜 노동’은 싫다)”라는 말엔 꽤 복잡한 속사정이 숨어있고요.

이런 상황에선 일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해도 수상해지기 쉬울 뿐입니다. (나는 일을 사랑합니다 = 열정노동하고 싶은 거야? / 나는 일이 싫습니다 = 요즘 애들은 쯧쯧).

그리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진짜 노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떠올려보는 것이 아닐까? 하고요.

노르웨이 철학자 라르스 스벤젠이 쓴 <노동이란 무엇인가>는 노동에 대해 우리가 간과해 온 관점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메시지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노동에는 다양한 차원이 있으나 - 노동은 결국 ‘인생의 중심 축’이며, (불행한 노동이 불행을 낳을 수 있듯) 만족스러운 노동은 개인의 삶에 더없이 큰 만족을 줄 수 있다”

실제로 다양한 철학자들은 노동에의 긍정적인 몰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행복을 강조해오기도 했는데요. 저자는 말합니다.

노동은 인격을 형성하고 사람 됨됨이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살아가면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인 활동이라면 어떤 의미로든 자신에게 중요해야 하지 않을까? 노동은 단순히 금전적 필요 이상을 충족시켜서 근본적으로 의미 있는 삶을 제공한다 […] 대부분의 사람은 평생 일하지 않고 살 수 있을만한 돈이 있더라도 계속 일하겠다고 대답했다.
-라르스 스벤젠, <노동이란 무엇인가>(이하 동일)

‘일은 정말 지긋지긋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또한 실제로 현실의 일들이 대체로 그랬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것을 추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간과해왔을 뿐이죠.

<fig.5> 네덜란드 철학자 라르스 스벤젠 (왼쪽) 라르스 스벤젠이 노동에 대해 고찰한 철학에세이 <노동이란 무엇인가Work> 책 표지 / Alchetron, 파이카

<노동이란 무엇인가> 책 중에서도 제가 주목한 부분은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좋은 노동’을 구분해 본 대목이었는데요.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는 ‘좋은 노동’이라고 할 때 어떤 조건을 꼽을 수 있을까? 곰곰 생각해보았고요. 그 결과 이 정도 필수 조건을 꼽아보았습니다.

① 직업적 안정성 = 타당한 수준의 임금, 고용 안정성
② 자율성 = 업무 방식을 자신에 맞추어 탄력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여지
③ 숙련과 몰입 = 자신이 작업을 관장하고 있다는 감각, 숙련을 통한 기술의 발전, 몰입감과 뿌듯함을 느낄 수 있음
④ 작업의 의미 = 사회적인 효용, 가치

이런 조건들을 만족하는 직업은, 대단한 자격조건이 필요하다거나 아주 ‘거창한 것’들만은 아닙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과거 8년 간 청소 보조 노동을 했던 경험을 풀어놓습니다.

청소는 통상 ‘기술 수준이 낮은’ 일 취급 당하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화학약품의 작용을 숙지해야 하는 도전적인 업무였기에 몰입하여 기술을 익히는 재미가 있었고(③) 작업자의 숙련도에 따라 자율성을 부여해주었기 때문에 자존감을 갖고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었다(②)고 합니다. 임금도 높은 편이었고(①),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④)도 어느정도 있었습니다.

청소에도 분명히 기술이 필요하다! 나는 청소 보조로 8년 동안 일했는데 […] 일은 힘들었지만 임금이 높은 편이어서 나를 포함한 청소팀은 꽤 재미있게 일했다[…]내가 했던 노동을 ‘기술 수준이 낮은’ 직업으로 분류할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 그곳에서의 근무는 응용 화학의 특별 훈련 과정 같았다 […] 시간이 지나 다양한 임무의 수행방법을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차츰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받기 시작했다 […]

2년동안 청소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지역 신문의 프리랜서 스포츠 기자 자리를 제의받았다 […] (하지만) 내가 미식축구에 대해 쓴 기사에는 스포츠를 향한 열정이 전혀 담겨있지 않았다. 나는 스포츠 기자로는 서툴지만 청소는 능숙하게 할 수 있었으므로 신문사를 그만두고 청소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청소를 하면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작업을 제대로 마치고 나면 만족을 느꼈기 때문이다 […] 기술 습득은 습관 개발과 관계가 많다. 습관 개발은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기 때문에 곧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기술을 습득하면 꽤나 복잡한 작업을 매우 쉽게 수행할 수 있고, 그 자체가 만족의 원천이다. 이는 테니스를 비롯한 운동을 즐기는 것과 비슷하다 […] 노동에서 의미를 발견하려면 활동 자체를 즐겨야 한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리처드 세넷의 <장인>이 떠오르기도 했는데요.(링크)

실제 과거 장인들은 실제로 자기 일에 몰입할 수 있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보장받았고, 숙련에 따라 인정을 받았고 몰입의 즐거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길드의 힘 아래서 적정 ‘협상력’도 갖출 수 있었고요. 이에 경제적으로도, 삶적으로도 자신의 일에서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일에서 만족감을 얻는다’는 이야기는 조금 엉뚱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대부분의 노동은 총체적인 만족감을 주는 창조적, 사회 기여적인 활동이라기보다는 무의미하고 억지로 감내해야 되는 고역에 가깝고 대가도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노동이 좋냐 나쁘냐’보다도 ‘무슨 노동’이냐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모든 사람이 떼돈을 벌기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당한 몰입과 자율성, 즐거움, 뿌듯함,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위의 조건들을 충족하는 이런 종류의 ‘적당한 일자리’ ‘진짜 노동’은 점차 자취를 감춰가고 있습니다.

【5.맺음말】

실은 오늘 레터를 쓰면서, 아니 그 이전부터 머리를 맴돌았던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결말에 이르러, 오늘의 이야기들을 저와 함께 해찰해본 연구자님들과 함께 궁리해보기에 알맞은 질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가짜 노동’을 없애고 ‘효율적’4)이 되면 되는 것일까요?

그간 좌우를 막론하고(*참고로 <가짜 노동>(2022)은 좌, 우파를 대표해 토론 프로그램에 나왔던 두 명의 학자-인류학자 데니스 뇌르마르크(우파), 철학자 아네르스 표그 옌센(좌파) 의 공동집필 책입니다) ‘가짜 노동’ 이야기의 결말은 마치 미끄럼틀 위에 올라간 사람이 잠시 뒤 미끄러져 내려오듯, 대체로 비슷했습니다.

가짜 노동을 없애서 더 ‘효율적’으로 일하자고요.

문제는 100년 그 이전부터 일을 빨리 해치워버리고 많이 놀자!라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이렇게 기술이 매우 발전했어도 모두가 3시간만 꼭 필요한 엑기스만으로 꿍꿍 뭉친 ‘압축 노동’을 해치우고 편하게 쉬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왜?

오늘 레터에서 살펴본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힘있는 목소리는, 그 본질적인 문제를 파고들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가짜 노동은 시스템의 ‘예외’가 아닌 ‘시스템 자체’의 문제입니다.

즉, 가짜 노동 문제는 단지 열이 나니까 환자를 얼음물에 담그자는 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책의 서문에서 불쉿 잡에 대한 진지한 물음은, 우리 시대를 깨부수는 쐐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 책이 우리 문명의 심장을 겨냥한 화살이 되기를 바란다”

한편, 마지막으로 라르스 스벤젠의 <노동이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왠지 기억에 남은 짧은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죽고 난 뒤 그의 일생을 돌아보는 대부분의 부고 기사(obituary)는, 실은 우리가 생전 어떤 노동을 했는지에 대한 내용이라고 한 부분이었습니다.

“노동은 인생 계획 전체를 움직이는 중심 축이다. 따라서 자기 삶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살아가면서 무엇을 달성할지에 대해 생각하려면 노동에 대한 의문을 피할 수 없다. 사람들의 부고를 읽을 때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바로 그들이 생전에 했던 일이다.” -라르스 스벤젠, <노동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시간이 한정돼있을 때 그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일’이 무엇인가는, 실은 우리 자신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는 ‘일 지상주의’라든지 ‘노동 분야’에 국한 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쏟는 ‘삶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을 빼고 대략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그 우리의 삶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요.

오늘날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당한 ‘삶의 시간’을 지나는 동안 시무룩해지고 무력감을 느낀다면, 그 이유를 철저하게 고민해야 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 오늘 레터에서 살펴본대로, 단지 나쁜 ‘가짜 노동’을 싹 없애버리자 라는 해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게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고요.

✏️

“총체적 인간의 이상은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다…현대사회에서 서른 살 이상 된 사람들의 상상력은 사장된다. 사샬은 운좋은 예외에 속하는 인물인데, 그가 정신적인 면에서 실제 나이보다 젊게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오직 행동만이, 더 인간적인 사회를 창조하는 것만이 그에 대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은 현재의 사회가 대부분 인간의 삶을 허비하게 만들고, 위선의 심화라는 점진적인 황폐화를 통해 삶을, 비록 파괴까지는 아니더라도 공허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존 버거, <행운아>

시골의사 존 사샬이 주민을 검진하는 모습. 그는 외딴 시골마을에서 소박한 삶을 꾸리며 주민들에게 합당한 몫의 존경을 얻고, 일에서 보람을 느끼고 최신 의학저널을 구독하며 배움의 즐거움도 누립니다. 그의 삶을 다룬 책의 제목은 <행운아A Fortunate Man>(존 버거,링크)입니다. 오늘날 자신의 직업에서 노동의 즐거움, 장인 정신과 타인에게 봉사한다는 보람, 자부심, 배움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또 누릴 수 있는 종류의 ‘총체적 인간’은 거의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 ⓒJean Mohr

4)효율과 비효율을 나누어 ‘효율적인 일만 하면 된다’는 주장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효율과 비효율 사이를 그렇게 무자르듯 나눌 수 있는 것인지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집 교사가 어린이의 머리를 자주 쓰다듬어주는 일과 사진을 나노 단위로 잔뜩 찍어 사진첩에 시시각각 올려주는 일 중 어느쪽이 효율적인 걸까요? 다른 직군 동료와 수다를 떠는 건 비효율일까요? 애초에 효율과 비효율을 나눌 수 있다는 질문 자체가 프레임에 갇힌 관점일 수 있습니다. 차후 좀 더 해찰해볼만한 문제입니다.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 김병화 옮김, 『불쉿 잡』, 민음사, 2021.

-미국에서는 2018년 출간된 책이고, 2013년 에세이를 기반으로 쓰여진 책이지만 현재도 울림을 가지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은 과거 '장인'과 관련된 레터에서도 아주 짧게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요. 이번 기회에 다시 읽어보니 꽤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이 보여, 레터에 메인으로 써보기로 했습니다. 실은 이 책은 그간 언젠간 다뤄봐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도 번번이 포기를 했었는데요. 네번 정도 시간차를 두고 정독을 하고서야 비로소 생각이 달라붙게 되었습니다. ‘비효율적’이네요.

라르스 스벤젠, 안기순 옮김, 『노동이란 무엇인가』, 파이카, 2013.

-노르웨이 철학자 라르스 스벤젠이 집필한 '삶의 기술'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노동에 대한 이야기라 약간 딱딱할 것 같지만, 철학자가 쓴 대중적인 에세이이기 때문에 쉽게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가 노동을 보는 관점은 대체로 '노동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자기실현으로서의 노동의 가치를 인식하고 좋은 노동으로 자신의 삶을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쪽이지만, 그는 '완벽하게 나에게 맞는 노동'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실제로 그는 철학을 '직업'으로 삼는 것은 별로 좋은 경험만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일 바깥의 일(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 등)'과의 균형도 중요하다고 말하며 끝맺습니다.

참고로 저는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꽤 흥미로운 해찰 포인트들을 자잘하게 많이 얻었는데 - 그 중 하나는, 이 책의 저자가 지닌 꽤 독특한 이력에서 왔습니다. 그는 과거 8년동안 청소 보조 업무를 하고, 그 중간에 잠깐 스포츠지 기자 제안을 받아 일하다가 기자일을 하면서는 ‘자신의 적성에 너무 맞지 않고 몰입, 즐거움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다시 청소 업무로 돌아갑니다- 즉 요는, 같은 직업이라도 사람이 지닌 타고난 적성에 따라 ‘가짜 노동’이 될 수 있다는 점이죠. : 이것도 풀어 쓰지만 꽤 긴 이야기긴 할텐데, (아무래도 최근 ‘능력’과 관련된 회차를 썼다보니 하게 된 해찰인데) 오늘날, 단지 오늘날 어떤 극소수의 직업들이 압도적으로 큰 보상(지대)을 받고 있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자신의 타고난 재능(능력)을 왜곡하여 자신의 삶 대부분이 ‘가짜 노동’으로 채워져버린 재능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에 대해, 문득 생각해봤습니다. 예를 들면 성형외과 의사 중에서도 실은 평생 블랙홀, 양자역학에 대해 온 마음을 담아 연구하고, 광고업계 종사자 중에서도 실은 시인이나 철학자가 되고 싶었던 그리고 그런 보석같은 선천적인 능력을 가졌던 사람들이 참 많을텐데요...단지 보상의 쏠림과 그로 인한 재능의 미스매치를 지적하고 싶었을 뿐, 특정 직업의 비하가 아닙니다. 물론 그 반대 방향의 불행도 있겠죠.

존 버드, 강세희 옮김, 『나에게 일이란 무엇인가?』, 이후, 2016.

-이 책은 열가지 열쇳말에 따라 일의 역사를 개괄할 수 있는 좋은 참고서입니다.(일은 'ㅇㅇ이다' -저주, 자유, 상품, 직업적 시민권, 비효용, 자기실현, 사회적 관계, 보살핌, 정체성, 봉사) 역사적으로 다양한 맥락에서 ‘일’이 어떻게 정의되어왔는지 참고하고, 일에 얽힌 다양한 논의들을 일괄적으로 살펴보는 데 좋습니다.

마이클 페럴먼, 김영배 옮김, 『무엇이 우리를 무능하게 만드는가』, 어바웃어북, 2014.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적 경제학자인 마이클 페럴먼이 쓴 대중적인 저서입니다. 실은 레터를 준비하면서 이 책을 꽤나 힘들게(=제가 관련 배경 지식이 부족해서) 통독하긴 했는데...결과적으로 제가 이 책을 '다룰' 능력이 부족하다는 판단 하에, 책에 대한 평가 및 본문 활용은 보류하고 간단하게 각주에만 참고용으로 적었습니다. 책의 원제는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수갑The Invisible handcuffs of Capitalism>이며, 이 책의 독특한 점은 '노동자의 삶'을 중심에 놓고 자본주의의 역사를 짚었다는 점입니다. 노동을 기존 주류 경제학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비록 이 책을 오늘 레터 본문에서 직접 다루진 못했지만, 이 책을 읽은 경험을 바탕으로 월말에 에세이를 써볼지도 모르겠네요.

【글 속 한 문장🖍】

👤주제에 대해 더 읽을 만한 글들을 골랐습니다. 각 사진을 누르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무직 일은 쓸모가 없다?

독서시간: 약 7분 / 글자수: 약 3700자

🖍글 속 한 문장

왜 우리는 아직도 지겹도록 일하고 있는가. 먼저 개인적 차원을 보자. 잉여 인력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근무시간에는 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사람들은 최대한 천천히 일하고, 삼중으로 확인하고, 주의를 분산시킨다. ‘가짜 노동’을 하는 것이다. 조직도 이를 허용한다. 관리직들은 더 많은 직원을 관리해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더 많은 정규직을 요구했고, 결과적으로 노동시간은 임금을 기준으로 유지됐다. ‘가짜 노동’이 횡행한 데는 좌·우파의 책임을 나누기 어렵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데니스 뇌르마르크 등이 쓴 <가짜 노동>(2022)의 서평입니다. <불쉿 잡>과 전체적으로 유사한 논지의 흐름을 보이고 있는 것 같지만, <불쉿 잡>이 직업의 '의미(가치)'에 주로 초점을 맞췄다면, <가짜 노동>은 '쓸모(효율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차이입니다.

두 책 모두 저자들은 공통적으로 쓸모없는, 가치가 덜한 일을 효율화한 뒤 주당 노동시간을 대폭 줄여 '워라밸'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한 기본소득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평생 무료, 엉뚱한 발명을 하는 ‘일’

독서시간: 약 3분 / 글자수: 약 1500자

🖍글 속 한 문장

부산대학교에는 전국 1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서비스가 있습니다. 바로 '한국어 맞춤법 검사기'인데요[...]꽤 긴 분량의 글도 한번에 빠르게 검사할 수 있어 정말 유용하고 편리한데요. 그런데 이 모든 게 다 무료입니다. [권혁철/부산대 맞춤법 검사기 개발자 : 90년대부터 개발했고요. 지금 자동번역하는 거 있잖아요. '영어-한국어' 한국에서 처음 상용화시킨 게 제가 박사 과정 때 였거든요. 그러다가 우연히 제가 굉장히 재밌는 알고리즘을 하나 개발했어요[...]현재도 그 기술을 쓰고 있는데 현재는 한 1000만 단어 이상이 들어가 있는데도 그대로 쓸 수 있는 거 보면 꽤 잘 만든 거 같아요[...]규칙 만드는 게 굉장히 어려워서요. 사실 저희 연구팀에서도 저밖에는 못 넣습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보고서를 쓰거나 과제를 하면서 이 대단한 프로그램의 은혜(?)를 입어본 적이 한번쯤은 있으실텐데요. 부산대에서 1990년대에 개발해 현재까지 무려 무료로 알뜰하게 이용할 수 있는 맞춤법 검사기(링크)입니다. 간결한 기능을 제공하기 위해 규칙을 입력하는 것도 한땀한땀 수작업이고, 특히 교수님이 직접 거의 규칙을 만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여태 수십년째 완전 무료에, 개인이 입력하는 텍스트 정보는 전혀 수집하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맞춤법, 특히 띄어쓰기나 사이시옷 규칙 등을 잘 헷갈리는 저는 이 프로그램의 은혜를 많이 입었는데요. 3월 정년퇴임을 앞두고있다는 권 교수는 이제 퇴직하면 맞춤법검사기에 더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고 좋다며 이 프로그램을 만들어 대중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것은 나의 신념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술의 경지가 된 ‘월급루팡’ : 엑셀게임

독서시간: 약 6분 / 글자수: 약 2900자

🖍글 속 한 문장

“낸디 앤 우디는 사무용 프로그램이라는 엑셀의 시스템을 묘하게 비틀어 ‘엑셀 방탈출’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팀이다[...]‘엑셀’을 만나 탄생한 것이 바로 엑셀 방탈출이다. 초기 작품은 방탈출을 좋아하는 주변 친구들에게 소소하게 공유했는데, 이것이 어쩌다 보니 점차 규모가 커져 많은 이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게 됐다고[...]그렇게 만들어진 엑셀 방탈출은 이들이 직접 의도한대로 직장인들에게 회사 생활의 한줄기 빛이 되어주고 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알트탭 신공’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예, 엑셀프로그램을 활용해 ‘엑셀 방탈출 게임’ 시리즈를 만들어 가짜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한줄기 빛이 되어준 인디 게임 제작팀 인터뷰입니다. 아예 좀 더 업무를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월루용 UI’가 따로 있습니다.

비록 저는 업무에 엑셀을 많이 활용하진 않지만, 텍스트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에 언젠가 여유가 되면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가짜 노동을 하는 것은 대체로 슬프고 주눅드는 일이지만, 이런식으로 엉뚱하고 유쾌하게 틈새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도전이 흥미롭습니다.

6년간 스피노자 연구한 기둥 뒤 공무원

영문(Guardian)

🖍글 속 한 문장

“2010년, 은퇴한 가르시아가 장기 근속상을 받을 예정이었는데, 그를 고용한 부시장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했다. "그는 여전히 급여를 받고 있네요. 이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사람 아직 거기 있어요? 그 사람 은퇴했나요? 그 사람 죽었나요?”[...]가르시아는 계몽주의 토대를 놓은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에 대한 전문가가 되는 것으로 사무실의 혼란을 최대한 이용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예전에 한 공기업 관계자에게 재밌는 표현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매번 출근을 하긴 하지만 무슨 직무를 맡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실제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기둥 뒤 직원’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었는데요.

너무 큰 기둥 뒤에(?) 숨어있던 나머지 최소 6년을 거의 출근하지 않고서 그동안 스피노자 연구에 매진해 전문가가 된 스페인 공무원이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습니다. 본인은 ‘아예 출근하지 않은 건 아니’라고 항변했는데요. <불쉿 잡>에서는 단지 틈틈이 사소한 딴짓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처럼 창의적으로 딴짓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이집트 역사 연구, 작곡, 희곡 집필 등)

실은 오늘 레터에선 ‘진짜/가짜 노동’에 집중했지만, 처음엔 쉼에 대한 부분도 함께 짚어 ‘워라밸’ 키워드를 다루어볼까 고민했었는데요. 재밌는 것은 ‘진짜 쉼’을 이야기하는 저자들의 경우에도 결국은 '진짜 노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문제의 결론(지향점)과 거의 똑같은 지점을 짚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는 각자가 삶의 시간을 어떻게 채우느냐의 문제겠죠. ‘가짜 노동’과 ‘가짜 쉼’을 두고 워라밸을 얘기하는 건 제게 있어 플라스틱 햄버거와 햄버거 포장지 중 뭘 먹을래? 같은 질문이라 별 의미 없습니다. 그야말로 ‘불쉿 질문’이라고 할만합니다.

👥알림: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출간 및 이벤트 안내

1. 저의 첫 단독 저서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 사람들이 읽는 것을 싫어한다는 착각>이 4일 유유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알라딘) (📖교보문고) (📖yes24)

2021년 제가 왜 언론사 구석에서, 책을 지팡이 삼은 '해찰 뉴스레터(?)'를 만들게 되었는지, 왜 하필 책을 중심에 두기로 했는지 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간 인스피아를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써온 경험들을 바탕삼아 그 질문들에 대해 궁리해 본 내용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책의 제목처럼,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를 풀어놓았고요.

나아가 지금까지 책을 즐겨 읽으셨던 분들에게도, 책을 직접 거의 읽지 못한 채 오랜 부채감을 가져오셨던 분들에게도 나름 의미가 있을만한 이 시대의 ‘책-텍스트’를 둘러싼 진솔한 이야기들을 담아보려 노력했습니다. 이런 저의 질문, 해찰과 관련된 연구자님들의 생각도 궁금하기 때문에, 읽어보시고 감상을 남겨주시면 기쁘겠습니다.

* 알라딘 서점에서 오는 10일까지 기대평 이벤트(적립금 증정)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벤트페이지)

* 3월 중에도 추가로 북토크나 서점 이벤트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기타 이벤트는 향후 인스피아 인스타그램(👥링크)에 공지하겠습니다 :)

1. 과거 인스피아 회차들 가운데 일부 레터를 주제별로 엮어 책으로 출간하는 프로젝트도 현재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이 책도 추후 출간되면 레터를 통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지난 호 피드백에 대한 답변은, 분량 관계로 다음 레터에 함께 일괄로 싣겠습니다.

1. 오늘 레터는 어떠셨나요? 아래 ‘💌편지보내기’ 버튼을 눌러서 오늘 레터에 대한 감상이나 질문 등을 보내주세요. 간단한 한줄 감상도 좋고, 연구자님이 떠올리신 독특한 해찰거리도 좋습니다 :) 레터를 통해서 보내주시는 작은 격려와 의견들이 레터를 쓰는 데 큰 힘이 됩니다. 흥미로운 해찰은 레터를 통해 함께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인스피아에서 차후 다뤄볼만한 주제나 좋은 콘텐츠 등의 추천도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1.혹시 지난 회차 가운데서 '아, 이 회차에서 이 책(혹은 영화 등)을 다뤘었으면 좋았을텐데, 아깝다!'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지난 회차의 주제에 대한 책이라도 추천해주시면 검토 후 레터에서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신간도 구간도 상관 없습니다. 회차명과 책 이름, 그리고 짤막한 추천 이유를 적어서 아래 '💌편지 보내기' 버튼을 통해 보내주세요. 지난 회차의 레터 내용은 아카이브 페이지(💬링크)를 참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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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레터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 회차(3/20일, 3월 셋째주 수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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