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가 왜 메시지지?

💬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막 출간된 인문잡지 《한편》 2호 '인플루언서'와 함께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겠죠. '지구촌'이라는 말을 처음 제시한 디지털 사상가, 마셜 맥루언의 『미디어의 이해』입니다. '미디어는 그릇이다. 그리고 그 그릇에 내용을 담는다'라는 일반적인 생각을 먼저 떠올린 다음에, '미디어가 바로 메시지다'라는 맥루언의 선언을 곱씹어 봅시다. 책이 처음 출간되었던 1964년보다 2020년인 현재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이야기예요.

기계 시대 동안 우리 서구인들은 인간의 신체를 공간적으로 확장해 왔다. 전기 기술 시대에 접어들고 1세기가 지난 오늘날, 우리는 공간과 시간을 제거하며 중추신경 조직 자체를 전 지구적 규모로 확장해 왔다. 매우 급속하게 인간 확장의 최종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 국면이란 바로 인간 의식을 기술적으로 모사하는 단계인데, 이렇게 되면 인식이라는 창조적 과정도 인간 사회 전체에 집합적, 집단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지금까지 광고주들이 특정 상품의 광고를 위해 오랫동안 추구해 온 의식의 확장이 정말 좋은 것인가 하는 물음에는 다양한 대답들이 있을 수 있다. 인간의 갖가지 확장들에 관한 물음들에 대해, 그 확장의 양상들을 모두 고찰해 보지도 않고 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피부건, 손이건, 발이건 간에 모든 확장은 정신적, 사회적 복합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과거에 이런 문제들이 거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 책의 편집자들 중 한 명이 보여준 당혹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매우 곤혹스러워하면서 나에게 “당신의 자료 중 75%는 새로운 것이다. 하나의 책이 성공하려면 10% 이상의 새로운 것이 있어서는 곤란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모험은 상황이 매우 급박한 현재의 시점에서 해볼 만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확장물들이 미치는 제반 결과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시간을 다투는 절박한 문제이다. 

오늘날에는 어떤 행위와 그에 대한 반응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말하자면 우리는 사실상 신화적으로, 통합적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전기 시대 이전의 사고, 즉 낡고 세분화된 공간과 시간에 바탕을 둔 사고를 계속하고 있다.   

문자 문화(literacy)의 기술에서 서구인은 상대방의 반응과는 무관하게 행위하는 힘을 획득했다.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세분화시키는 일의 장점은 외과 의사의 경우를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만일 그가 수술을 하면서 인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가장 위험한 사회적인 외과 수술들조차도 완전히 무감정한 상태에서 행할 수 있는 기술을 획득했다. 그러나 이처럼 무감정한 상태가 되는 것은 대상에 전혀 몰입하지 않는 태도였다. 

반면에 중추신경 조직이 기술적으로 확장되어 우리를 인류 전체 속에 개입시키고 또 인류 전체를 우리 속에 통합시키는 전기 시대에, 우리 서구인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가져올 결과에 심도 있게 관여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자 문화에 물든 기계 시대의 서구인이 취했던 고립적이고 독립된 역할은 전기 시대에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 

부조리극은 행위에 관심이 없는 듯하면서도 행위하는 인간, 즉 오늘날의 서구인이 처한 딜레마를 극화하고 있다. 바로 그 딜레마에서,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어릿광대의 원형과 그 메시지를 찾을 수 있다. 3000년 동안 전문가에 의한 외파와, 인간 신체의 기술적 확장에 의한 전문성과 소외가 증대되어 왔지만 현대 세계는 극적 반전을 일으켜 압축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지구는 전기의 힘으로 응축되어 하나의 촌락이 된 것이다. 모든 사회적·정치적 기능을 급작스럽게 내파하는 전기의 속도로 인해 인간의 책임 의식은 고도로 높아졌다. 바로 이 내파라는 요인 때문에 흑인과 틴에이저, 그리고 몇몇 소수 집단의 위상이 바뀌었다. 그 집단들은 제한된 집단이라는 정치적 의미에 ‘갇힐’ 수 없다. 전기 미디어 덕택에 우리가 그들의 삶에 ‘개입’하듯 그들도 우리의 삶에 개입한다. 

현대가 ‘불안의 시대’인 것은, ‘입장’이나 ‘관점’과 상관없이 관여와 참여를 강제하는 전기에 의한 내파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해도 입장이나 관점은, 부분적인 그리고 특수한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전기 시대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정보 차원에서도 동일한 반전이 일어나 포괄적 이미지가 단순한 관점을 대체했다. 19세기가 ‘편집자의 의자’의 시대였다면 20세기는 ‘정신과 의사의 침상’의 시대이다. 인간의 확장물로 보자면 의자는 전문가풍으로 등받이의 엉덩이가 닿는 부분을 없앤 것, 즉 뒷부분의 ‘탈격 독립어구’의 일종인 반면 정신과 의사의 침상은 신체 전체를 확장한 것이다. 정신과 의사가 침상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사사로운 견해를 표현하려는 유혹을 없애 주고 사건을 합리화하려는 욕구를 제거해 주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들을 통제의 수단으로 분리해서 보는 데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는 서구와 같은 문화 내에서는, 작용 면에서나 실제적인 면에서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주장이 종종 충격으로 여겨진다. 이 주장은, 어떤 미디어(즉 우리 자신의 확장)의 개인적, 사회적 결과들이 우리 자신의 확장물이나 어떤 새로운 기술에 의해 인간사에 등장하게 된 새로운 척도에서 생겨난 것들이라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 예를 들면 자동화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적 유대들은 사실 여러 가지 직무들을 없애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부정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보면 자동화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새로운 역할들을 만들어준다. 즉, 전 시대의 기계 기술이 파괴했던 인간적 유대를 복원하고, 일에 대한 심도 있는 관여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기계 자체가 아니라 기계를 가지고 한 일이 기계의 의미나 메시지라고 말하곤 한다. 기계가 우리의 상호 관계와 우리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를 바꿔나간 방식들이라는 점에서 볼 때, 그것이 콘플레이크인가 캐딜락인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인간의 일과 유대를 개조하는 일은 기계 기술의 본질인 세분화의 테크닉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자동화 기술의 본질은 정반대다. 기계가 인간의 관계들을 유형화하는 데 있어 단편적이고 중앙집중적이고 피상적이었던 반면에, 자동화 기술은 근본적으로 통합적이고 탈중앙집중적이다. 

전깃불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 점을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전깃불은 순수한 정보이다. 말하자면 전깃불은, 어떤 선전 문구나 이름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지 않는 한, 메시지가 없는 미디어이다. 모든 미디어의 특징인 이런 사실은 모든 미디어의 ‘내용’이 언제나 또 다른 미디어임을 의미한다. 말은 씌어진 것의 내용이고, 씌어진 것은 인쇄의 내용이며, 다시 인쇄는 전보의 내용이다. 

“말하는 것의 내용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될 경우, 우리는 반드시 “그것은 실제적인 사고 과정이며 그 과정 자체는 비언어적인 것이다.”라고 답하게 된다. 추상화는 창조적 사고 과정들을 직접 재현한 것이다. 이런 과정들은 컴퓨터 디자인에서도 똑같이 나타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것은, 디자인이나 유형들이 기존의 과정들을 증폭시키거나 가속화했을 경우 초래할 정신적, 사회적 결과들이다. 왜냐하면 어떤 미디어의 ‘메시지’는 결국 미디어가 인간사에 가져다줄 규모나 속도 혹은 유형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철도가 이동, 수송, 바퀴, 길 등을 인간 사회에 가져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철도는 그것이 등장하기 전까지 있던 각종 기능들의 규모를 가속화시키고 확대해,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도시들과 노동과 여가 생활을 창출해 냈다. 이런 일은 철도의 가설 지역이 적도 지대냐 한대 지대냐와는 무관하게 일어났으며, 철도라는 미디어가 운반하는 화물이나 내용이 무엇인가와도 관계없는 일이었다. 다른 한편 어디에 사용되든 비행기는 수송을 가속화함으로써, 철도에 바탕을 둔 도시, 정치, 공동체 등을 해소시키려 하고 있다. 

전깃불의 문제로 되돌아가 보자. 그 빛이 뇌 수술을 위해 사용되느냐 아니면 야간의 야구 경기를 위해 사용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전깃불이 없으면 뇌 수술이나 야간 경기를 할 수 없다고 할 때, 뇌 수술이나 야간 경기가 전깃불의 ‘내용’이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요점을 강조해 줄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와 결사의 규모와 형태를 형성하고 제어하는 것이 바로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미디어의 내용이나 용도가 너무 다양해서 인간의 결사의 형태를 갖추는 데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우리는 다름 아닌 미디어의 ‘내용’ 때문에 그 미디어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방해를 받는다. 각종 산업들이 자신이 관여하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일들에 관해 알게 된 것은 겨우 오늘날에 와서였다. 예를 들어 IBM 사는 자신들이 사무 장비나 기기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정보를 처리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명확한 비전 속에서 운영해 나갈 수 있었다. 반면에 제너럴 일렉트릭 사는 전구와 전기 시설을 판매해 상당한 이윤을 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AT&T와 마찬가지로 정보를 이동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전깃불은 ‘내용’을 갖고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의 미디어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미디어를 제대로 연구하지 못하게 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왜냐하면 전깃불은 네온사인 등에서처럼 어떤 브랜드 이름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의 미디어로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받고 있는 것은 전깃불이 아니라 ‘내용’(사실상 또 하나의 미디어)이다. 전깃불의 메시지는 산업에서의 전력의 메시지와 마찬가지로 매우 철저하고 광범위하며 탈집중적(혹은 분산적)이다. 왜냐하면 전깃불과 전력은 용도 면에서는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인간의 결사에서 시간적, 공간적 요인들을 제거한다는 공통점을 갖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들은 심도 깊은 관여를 창출해 내는 라디오, 전보, 전화, 텔레비전 등과 같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가지고 우리는 인간의 확장물들, 즉 미디어 연구에 대한 거의 완벽한 안내서를 만들 수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다음 행들을 보고 어쩌면 그가 텔레비전을 언급한 것인지 모른다고 익살을 떠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이자 문화 비평가인 마셜 맥루언은 1911년 캐다나 앨버타 주 에드먼턴에서 태어났다. 1934년에 마니토바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1943년에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6년에는 토론토 대학의 세인트미카엘 칼리지 영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세인트미카엘 칼리지의 문화기술센터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1963년에서 1979년 사이에는 대중 문화를 강의하고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발전시켰다. 1964년 여름 『미디어의 이해』를 출간해 전 세계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고, 이 시대의 예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1965년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 의해 뉴턴, 다윈,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파블로프 이후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뽑혔다. 1980년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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