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을 ‘구경’하기 : 강 건너의 세계

타인의 삶을 ‘구경’하기 : 강 건너의 세계

Curiosity, the desire to know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68), 2023.1.4,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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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빈곤, 구경, 관찰, 타인, 취재

1.머리말

2.빈민 대학 취재기

3.흑인, 노숙자 체험한 기자

4.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2023년 계묘년 새해 첫 레터입니다. 한 달간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연구자님 연말은 잘 보내셨나요? 저는 이래저래 좋은 책들을 많이 읽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다만 ‘출력’이 없다보니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요. 이 시기에 읽었던 책들도 언젠가는 인스피아에 쓸 수 있을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생각으로, 책을 읽으면서도 이래저래 해찰에 골몰했던 나날이었습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을 쓴 조세희 작가가 지난달 2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1970년대 서울의 철거촌 ‘낙원구 행복동’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도시 빈민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내면서도 대중적인 호응을 얻어 문학 작품 최초로 300쇄를 넘기기도 했는데요. 이는 가히 ‘난쏘공 현상’이라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언론은 조 작가의 부고를 전하며 씁쓸한 어조로 “여전히 난쏘공 세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재개발 과정에서 이익을 소수가 독점하고, 다수가 삶터에서 쫓겨나는 일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70년대와 오늘날의 큰 차이가 있다면, ‘2023년 버전의 난쏘공 현상은 없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1)

<fig.1> 2011년 7월 마포아트센터에서 강연 중인 조세희 작가(왼쪽)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영화(1981) 스틸컷. 경향신문, KMDb

2023년의 가난엔 얼굴이 없습니다. 오늘날 마치 가난은 ‘옛날 이야기’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예전 문학 교과서에 여전히 가난한 아이의 심정을 보여주는 1960~70년대 작품의 예시로 ‘달걀 지단 든 김밥’을 소풍에 싸가지 못한 아이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오늘날엔 적당히 달걀김밥 정도는 싸갈 수 있으니 모두가 가난에서 벗어나 잘 살게 된 것일까요?

“여전히 난쏘공 세상”이라는데 가난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 가난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우리가 단지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레터에서는 ‘가난’ 그 자체보다도 ‘타인의 어려움을 쳐다본다는 것’에 대해 해찰해볼까 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나와 연관이 없어 보이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투박한 태도에 대해섭니다.

겐콘 이치호이의 <도쿄의 가장 밑바닥>과 귄터 발라프의 <언더커버 리포트>를 지팡이 삼았습니다.

1)오늘날에도 가난을 다룬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작품이 쓰여져서 큰 이슈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가난의 서사를 공유하는 풍경이 사라졌다는 의미에서입니다.

【2.빈민 대학 취재기】

“내가 빈곤 대학 과정을 밟던 어느 여름날의 일이다...”

-겐콘 이치호이, <도쿄의 가장 밑바닥>

만약 오늘날 ‘빈민의 삶을 알아보겠다’며 ‘빈민가 관찰’에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조금은 의심스런 눈초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무슨 의도로 저러는거지?’ 혹은 ‘빈민의 삶을 ‘관찰’하겠다니 무례하군’ 등의 반응이 뒤따를지도요.

일본 기자인 겐콘 이치호이(본명 마쓰바라 이와고로·1866~1935)가 쓴 <도쿄의 가장 밑바닥> 부제는 ‘빈민가 잠입 취재기’입니다. 19세기 도쿄의 빈민가에서 500여일간 함께 부랑자들과 먹고 자고 일하며 이들의 삶을 가까이서 관찰한 르포죠. 단지 겉모습만 취재한 게 아니라 정보도 굉장히 촘촘한데요. 그는 심지어 벼룩과 이, 벌레가 들끓는 빈민가의 기친야도(木賃宿·식사 제공 없는 여인숙)에서 지내기도 합니다.

이런 생생한 취재를 통해 예를 들면 1890년대 도쿄 인력거꾼들이 언제 어디서 손님들을 구하는지, 경매장에서 짚 부스러기와 대팻밥까지 사고 팔리는 실정, 일용직 잡부들이 힘들게 번 돈을 어떻게 술집에서 금세 써버리는지, 온갖 사람들이 모여든 빈민가 인력사무소의 풍경 등을 속속들이 알 수 있습니다.

“돈벌이를 찾아서 전 세계인이 몰려드는 샌프란시스코 항구처럼 이 노무자 합숙소는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3년을 필사적으로 일해서 모은 돈을 어떤 운하에 투자했다가 파나마처럼 중도 하차해서 무일푼이 되었다며 후회하는 사람[...]삿포로 대화재로 전 재산을 잃고 호구지책을 찾아 떠돌다가 다시 이 대도시로 흘러들어왔던 사람[...]대부분 불학무식하고 간계를 부릴 줄 모르는 순박한 사람들로 고향에 연통을 보낼 때는 2센 내지는 2센 5린을 내고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돌이켜보면 어젯밤은 노역하던 노예였고 오늘 아침은 이렇게 왕후장상이다[...]노무자들은 이 쾌락이 유일한 낙인지라 피 같은 돈을 어쩔 수 없이 술값으로 탕진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막걸리는 1홉에 2센이며 잘 마시는 사람은 한 번에 5동이에서 7동이를 해치운다.”

-겐콘 이치호이, <도쿄의 가장 밑바닥>(이하 동일)

다만 이 책이 단순히 ‘일본 19세기 빈곤’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면, 굳이 21세기 한국에 사는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적을 것입니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시종일관 굉장히 ‘구경꾼(?)’ 같다는 점이었습니다.

만약 오늘날 이런 비슷한 컨셉의 책이 나온다면 훨씬 엄숙한 분위기일 것 같은데, 이 책의 저자는 전반적으로 굉장히 건조하면서도 소탈한 필치로 자신이 관찰해낸 눈 앞의 삶들을 생생하게 적어내려갑니다.
심지어 이 책에는 ‘빈민 대학’이라는 표현이 여러번 등장하기도 하는데요. 저자의 태도는 순진명쾌합니다. 자신은 ‘빈민(을 배우러 온) 대학의 학생’이라는 거죠. 그는 이 책의 첫 머리에서 취재를 위해 빈민가로 걸어들어가며 말합니다.

날은 저물고, 암담한 세계로 출발할 시각이 다가왔다. 작별을 고하고 빈천지 대학에 입문한 학생은, 정체를 종잡을 수 없는 초췌한 몰골의 부랑자가 되어 우에노산을 슬슬 걸어 내려간다.

<fig.2> 겐콘 이치호이 등의 필명으로 활동한 작가 마쓰바라 이와고로. <도쿄의 가장 밑바닥>은 '일본 근대 르포의 효시'라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왼쪽) 일본판 표지. 차부들이 쉬는 모습, 빈민들 대상의 포장마차 모습 등의 도판이 실려있습니다. Amazon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저자는 이 책 전반에서 ‘호기심’을 여과없이 드러냅니다. 빈곤 대학이라는 것이 저자의 말마따나 정말 있다면, 그는 아주 우등생인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잔반야(가정, 음식점에서 남은 음식찌꺼기를 그날그날 무게로 달아 파는 빈민용 식당)’ 풍경을 관찰한 대목이 있습니다.

말로만 듣던 잔반야에 드디어 왔다. 대체 잔반이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해서 대형 조리실의 한낱 찌꺼기다. 여러분은 빈민을 형용하는 촌철살인의 한마디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추위와 굶주림, 누더기, 폐가, 행색? 내 생각에는 잔반이나 잔채라는 이 두 단어가 가장 절묘하게 들어맞는 듯싶다. 그리고 지금 잔반야가 내 눈앞에 있다. 빈민을 상징하는 잔반과 잔채의 실체를 확인할 기회를 마다할 수가 없어 부리나케 갔다[...]내가 빈민들의 모든 생활 터전을 실제로 보고 기한굴의 소식을 듣기에 비할 데 없는(자료 수집에 알맞은) 곳이 바로 여기였다.

남이 남긴, 쉬어빠진 음식찌꺼기로 연명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든 장면이 유쾌할리 없습니다. 하지만 잔반야 취재를 앞두고 저자는 마치 선물 포장지 뜯기를 기대하는 아이같은 기대감을 보여줍니다.

한편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곰곰 생각에 빠졌습니다. 남의 어려운 상황, 삶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꼭 불경한 것일까요?

애초에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면 누구의 고통이든 ‘강 건너의 불’일 수밖에 없습니다. 섣불리 ‘강 건너’의 일을 내 일인 것처럼 짐짓 가식적으로 꾸며대거나, 내 일이 아니니까 관심을 차단하기보다는 어쩌면 - 나와 너 사이엔 강이 있고, 나는 너의 세계를 모른다. 그러므로 ‘구경’하고 배우겠다라며 - 순진하고 열정적으로 달려드는 쪽이 겸손하고 솔직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fig.3> 가난한 사람들이 '잔반야'에 몰려들어 무게를 달아 밥을 사는 모습(왼쪽) 마쓰자와 유사쿠가 그린 <도쿄의 가장 밑바닥>에 수록된 '잔반야' 풍경. 영화 <にごりえ>, 이와나미쇼텐

저자는 빈민가를 취재하기 위해 온 ‘빈민 대학 학생’입니다. 저자의 자세는 마치 새로운 세계를 눈앞에 둔 인류학자처럼 어리둥절하면서도 호기심이 넘칩니다.

하지만 결코 그는 겉핥기 식으로 관찰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때론 아이처럼 순진한 눈으로, 때론 공무원이나 회계원같은 시각으로 돈푼 한전까지 기록하며 빈민들의 삶을 기록합니다. 그들의 삶을 그저 숭고하게만 그려내지 않고, 즐거운 것은 즐거운대로 절망스러운 것은 절망스러운대로 고스란히 건져냅니다.

당시 빈민가에서 성업 중이었던 ‘침구 대여업’에 대한 책 속 묘사를 일부 옮겨보겠습니다.

일 년 내내 어마어마한 이불 대여료를 치르느라 고생하다보면, 내년에는 기필코 새 침구를 장만해서 편히 자겠노라고 각오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적으로는 그 각오를 실천할 재력이 없어서, 가엾지만 올해도 누구랄 것 없이 여전히 대여점의 신세를 진다[...]이러한 이유로 시바신아미정은 340~350호가 거주하는 빈민굴에 침구 대여업을 하는 집이 7채나 된다.

침구 대여업이 빈민가에서 성업인 이유는 빈민들의 삶이 그때그때 ‘변통’하듯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침구를 살만한 돈이 없습니다. 만약 겨울용 도톰한 이불 한채가 50원이라고 하면, 이불을 한철 빌리는 값이 30원입니다. 두해만 빌린다고 해도 이불 한채를 사는 편이 훨씬 저렴하지만, 이들에겐 목돈이 없기 때문에 빈민가 근처엔 항상 비싼 돈으로 이불을 빌려주는 일이 성행하는 것입니다.

그는 빈민 대상의 고리대금업에 대해 말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비싼 쌀을 먹게 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이런 대목을 읽으면서는 오늘날에도 저신용자들이 고금리 상품을 울며겨자먹기로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떠올렸습니다.

그의 ‘관찰’은 관찰으로만 끝나진 않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중간중간 나름의 평론을 덧붙입니다. ‘강 건너’의 일을 구경하는 것에 대한 자기 자신과 독자를 향한 당부입니다.

날품팔이는 짐주인 때문에, 도매상이나 채소장수 때문에, 심지어 소비자인 우리 때문에 소득의 1할을 빼앗긴다[…]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억울해할만도 하건만 무자비한 세상탓에 허구한 날 소득의 4~5할을 뜯기면서도 먹고살기 위해 날마다 부지런히 일한다. 호주머니 속에 든 오늘 쓸 돈이 10엔이든 100엔이든 그중 5엔이나 50엔은 그들의 재산임을 명심하라. 어쩌다 길가에 엎드려서 남루한 옷차림으로 추위에 떨거나, 잔반도 못 먹어서 굶주린 모습을 보면 반성해야 한다.

겐콘 이치호이라는 호기심 넘치는 기자 덕분에 당시 독자들은, 그리고 약 130년 뒤 한국 땅의 독자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오늘날 가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단지 우리가 보지 않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강 건너를 보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요.

【3.흑인, 노숙자 체험한 기자】

겐콘 이치호이 식 ‘빈곤 체험’의 핵심은 “비록 나는 당신들과는 다른 세계에 살아. 하지만 나는 당신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진정 알고 싶어”라는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알고 싶기 때문에 갔습니다. 그리고 500여일간 머무르고 관찰해 글을 썼습니다.

이런 태도는 어딘가 산뜻하다 못해 조금은 투박해보이기까지 한데요. 이와는 다소 다른 결이지만, 마찬가지로 조금 투박하나마 진심어린 호기심으로 약자들의 삶을 ‘관찰’한 작품을 하나 더 소개해볼까 합니다.

귄터 발라프의 <언더커버 리포트>는 2007~8년, 60대 후반의 나이에 흑인, 노숙자, 빵공장 노동자, 콜센터 직원 등으로 ‘위장’해 취재한 생생한 르포를 엮은 책입니다.

독일의 유명 기자인 귄터 발라프는 ‘잠행 르포의 전설’이라고 불리는데요. 그는 20대 초반부터 대중일간지 기자, 터키 이주 노동자 등 위장 취재를 통해 사회 곳곳의 민낯, 비리를 파헤쳐왔습니다. 워낙 영향력이 대단하다보니 그의 이름을 따서 ‘Wallraffa(위장해 내부로부터 비리를 폭로하다)’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을 정도라고 하네요.

<fig.4> 독일 탐사, 잠행 기자 귄터 발라프의 모습. 그는 과거 터키 노동자로 위장 취재한 내용을 담은 <Lowest of the low>가 세계 40여개국에 번역 출간되는 등 큰 사회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왼쪽) <언더커버 리포트> 중 '소말리아 난민' 분장을 한 모습. wikipedia, <언더커버 리포트>

사실 처음 저자에 대한 별다른 배경지식 없이 이 책을 서가에서 집어들었을 때는 책 속에 실린 사진(백인 기자가 얼굴에 검은칠을 해서 흑인 분장을 한 사진)을 보며 조금 당황했습니다. ‘아니 2000년대에 블랙페이스라니?’ 과거 유태인 등 위장 잠입 취재, 사회실험 등이 유행했지만 백인이 ‘인종차별 체험’을 하기 위해 얼굴을 검게 칠한다는 건 분명 다소 시대에 맞지 않아보였습니다.2) 이어지는 ‘노숙자 체험’ 챕터에서도 큼직한 뿔테 안경을 끼고 산발을 한 채로 카메라 앞에 선 그의 모습 역시 어딘가 어색해보였죠. 이 때문에 불퉁하게 중얼거렸던 것 같습니다.

‘이런 대충 분장을 해봤자 어차피 이 사람은 세계적으로 성공한 백인 중년 기자인걸’

게다가 노숙자가 힘든 것은 단지 며칠간 돌바닥에서 잠을 자서 ‘좀 춥고 불편’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현재 의지할 곳이 없고 미래에도, 어쩌면 죽을 때까지 그런 상태가 이어지리라는 절망감 등이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이죠. 분장만 지우면 아파트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노숙자’의 심정을 100%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교도소 1박2일 체험기’를 보며 머리를 긁적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겠죠.

하지만 <언더커버 리포트>를 정작 읽어내려가면서는, 어쩌면 이런 우려와는 정반대의 생각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 체험’이 다소 투박하고 불경스러운 부분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분명히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라고요.

이 책에는 극적인 차별의 현장보다는, 일상의 소소한 대목에서의 차별들이 주를 이룹니다. 누구나 평소에 할 법한 일들이요. 셰퍼드를 기르는 견주 클럽에 가입하거나, 새 시계를 구입하러 가게에 간다거나, 동네 펍에서 친구를 만들려는 시도 등입니다.

주인이 다시 나섰다. 그는 쾰른 특유의 친구같은 말투로 내가 행동을 잘못했으며 그냥 바에 잠자코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설득하면서 이제는 그만 가 달라고 말했다. 내가 이 상황에 같이 끼지 않은 다른 손님 한명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맥주 한 잔을 사겠다며 같이 마시자고 하자 그 또한 나를 경계했다[…]오로지 나 자신만이 낯설 뿐이었다. “당신들도 다 서로 장난치고 연애하고 그러잖아요”[…]잠자코 있는 손님이었다면 나를 용납했을 것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연애를 하려고 그만큼의 용기를 내는 흑인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펍이 위치한 쾰른은 귄터에게는 친숙한 곳이었는데요.

당시 그가 펍에서 말을 걸었던 여성은, 그곳에서 처음 본 남성과 대화를 하고 있었죠. 펍에서 처음 본 사람들과 잔을 나누고 친구를 사귀고, 연애를 하는 것은 모두 백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분장한 귄터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어 그는 한 축구 경기장 앞에서 흑인 분장을 한 채 관중들에게 말을 겁니다. 그날 축구 경기는 '우익극단주의에 대한 반대'를 위한 친선경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경기장 앞, 경기가 끝난 뒤의 버스나 거리에서도 줄곧 수위 높은 모욕(히틀러식 경례, “껍질을 벗겨버리겠다”...)과 함께 물리적 위협에 시달립니다.

“나는 흑인이 아니고, 나는 나의 피부색에서 다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런데도 내 자존심은 상처받았다.”

귄터는 용감한 여경찰과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요. 건조한 문체로 짧게 쓰인 문장이지만, 울림을 주는 이 대목을 읽고 곰곰 생각에 잠겼습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건 ‘나는 흑인이 아니라서 다행이다’가 아니라 ‘내 자존심은 상처받았다’라는 문장입니다. 그는 얼마든 이런 차별을 ‘보지 않고’ ‘강 건너에 불이 나지 않은 것처럼’ 살 수 있는 백인 남성 기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장을 하고서라도 ‘강 건너의 불’을 바라보기 위한 시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덤덤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가 ‘피부색에서 빠져나오’게 되더라도, 그 기억까지 온전히 사라지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친숙하고 일상적 풍경이 일순 적대적이 되는 것에 대한 체험입니다.

이어지는 챕터에서 그는 친구의 명의를 빌려 ‘노숙자 체험’을 합니다. 그는 약 2주간 직접 공무원을 만나고, 무료배식소에 가고, 홈리스 쉼터 등을 전전하며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요. 그 중에서도 단연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귄터 발라프가 하노버의 한 간이 홈리스 쉼터에서 잠에 들기 전 ‘라디오 볼륨을 좀 낮춰달라’고 부탁했다가 살해 협박을 받은 사연입니다.

인상적인 것은 ‘살해 협박’보다도, 그 다음의 귄터의 대처였습니다. 관련 문단을 조금 인용해보겠습니다.

나는 마지막 남은 용기를 쥐어짜서 그의 방으로 갔다. 그는 일어나서 머리를 정성스럽게 빗고 있었다. “당신 어젯밤에는 꽤 심각하던데요.” 내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나를 없애버리려고 했어요!” “당연하지”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답했다. ”왜죠? 내가 당신한테 뭐 잘못한 일도 없잖아요?” 그러자 그는 조금 풀어졌다. ”화가 났거든. 왜냐하면 이곳에서 나한테 불평한 사람은 아직 한명도 없었어. 단 한명도.” 그러고는 차분하게 자기 이름은 프레드이며 마흔한 살이라고 소개했다[…]그러면서 나는 그에게서 다양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만약 저자가 살해 협박을 받은 날 함께 화를 내며 싸웠다면, 다시는 그를 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면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귄터는 아무리 분장을 해도 결코 프레드와 같은 노숙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와 다른 세계’에 대한 인정을 기반으로 정중한 ‘호기심’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상대에게 말을 겁니다. 이런 타인을 향한 호기심이야말로 정치인이 주인공이 되는 ‘민생 쇼’와의 차이점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2) <언더커버 리포트> 책에 실린 내용 중 흑인 체험 르포는 다큐멘터리 <Black on White>로 발표되기도 했는데요. 실제 출시 당시 그의 블랙페이스 작업에 대한 비판들이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참고링크1 링크2)

【4.맺음말】

오늘 레터에선 <난쏘공>을 구실로 ‘타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에 대해 간단히 해찰을 해보았습니다.

SNS 등 인터넷에서 자기와 의견,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현상을 두고 ‘필터 버블’이라는 말이 유행한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오늘 레터를 쓰면서는 어쩌면 이건 꼭 인터넷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니 현실에서 더더욱 ‘현실 버전의 필터 버블’이 굳건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의와 거리두기를 핑계로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끼리는 마주칠 일도 없고, 마주칠 필요도 없는 세계 속에서요.

만남과 관찰이 아닌, 스쳐지나감만 남은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홀로 가난하고 괴로운 사람들은 홀로 괴로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강 건너 불 구경’이라는 말은 흔히 부정적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조금은 투박하더라도, 오해의 여지를 안고서라도, 과감하게 ‘강 건너’의 세계를 넘겨다보려는 욕구. 어쩌면 그것으로부터 변화가 시작되지 않을까요? 물론 개중에는 ‘불 구경’으로 시시하게 끝나버리는 시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보다보면 누군가는 그것이 나의 문제와 이어져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누군가는 강 건너로 가볼 용기를 낼 수도 있습니다.

올 한해는 내가 그간 바라보지 못했던 세계에 ‘호기심’을 갖고 다가가보려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어설프나마 아주 작은 실천이라도 하는 것이 올해의 목표입니다.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겐콘 이치호이, 김소운 옮김, 『도쿄의 가장 밑바닥』, 글항아리, 2021.

-도서관에서 머리를 식힐 겸 우연히 집어들어서 읽게 되었는데, 생각했던 것 너머의 느낌표를 주었던 책입니다. 그냥 별 생각없이 보아도 충분히 흥미로운 르포이지만, 저는 특히 이 책을 읽으면서 19세기의 말하기 방식과 현재의 말하기 방식의 차이에 초점을 두어보았습니다. 확실히 조금 무신경해보일 수도 있는 '호기심'이지만, 과연 타인의 삶에 '예의바른 죄책감'만을 가지고 외면하는 것보다 '호기심'이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하다못해 책도 읽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 당연한데, 나와 다른 세계의 삶 역시 배우기 전엔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귄터 발라프, 황현숙 옮김, 『언더커버 리포트』, 프로네시스, 2010.

-암행 전문 기자로 유명한 독일 기자 권터 발라프의 책입니다. 오늘 레터에선 주로 흑인, 노숙자 챕터를 다루었는데요. 그 뒤의 빵 공장 노동자, 콜센터(영업과 보이스피싱 사이...) 노동자 체험 역시 흥미진진하기 때문에 관심이 있으시면 읽어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특히 콜센터의 경우 취약한, 가난한 사람들의 '외로움'을 이용해 허무맹랑한 물건을 강매한다는 점이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80세가 되었는데, 아직도 왕성하게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조문영 엮음,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21세기북스, 2019.

-<빈곤과정> 등을 쓴 빈곤 사회학자 조문영 교수의 지도 하에 '빈곤 인류학'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실제 빈곤의 현장을 찾아가 당사자, 활동가 등과 인터뷰를 한 것을 모은 책입니다. 전문가가 아닌 학생들이 진행한 조사이다보니 다소 서툴러 보일 수도 있지만 '외부자'의 입장에서 빈곤을 '알아보겠다'는 태도가 인상적입니다.

【글 속 한 문장🖍】

👤주제에 대해 더 읽을 만한 글들을 골랐습니다. 각 사진을 누르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타자에 대한 ‘호기심’이 줄어들 때

독서시간: 약 7분 / 글자수: 약 1600자

🖍글 속 한 문장

쩌우핑을 중국의 ‘소우주’로 취급한 미국 학자들의 연구 경향은 고루해 보인다. 현지 주민의 동의 없이 지역을 실험실로 만든 과정도 찝찝하다. 하지만 쩌우핑을 매개로 만났던 교수, 학생, 관료, 농민들의 회고담을 보면서 나는 이들이 서로에 대해 품었던 호의와 호기심이 부러웠다. 문화대혁명의 상흔이 여전히 깊던 시기라 입을 열기 조심스러웠지만, 농민들은 적국의 연구자들과 곧잘 어울렸고, 시간이 지나면서 동네의 자잘한 소문까지 공유했다....요새 나는 아무래도 이 호기심이 줄어든 것 같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조문영 교수의 한겨레 칼럼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류는 거의 끊어지고 적대감만 높아지는 상황에서 어떻게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욕구' '호기심'의 부족을 한탄하는 대목에서 느낌표가 떠올랐습니다. 중국에 대한 연구에서 '호기심' 운운하는 것은 다소 엉뚱해보일 수 있지만, 결국 타인의 삶-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호기심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깊이 생각하고, 더 많이 발언하기

독서시간: 약 8분 / 글자수: 약 2000자

🖍글 속 한 문장

이명원 교수는 2020년 겨울 조 작가와 만났다고 한다. “선생님이 그때 계속 걱정하시던 게 (김용균의 죽음 등) 노동자들과 이들이 처한 비극적 상황이었다. ‘가면 갈수록 사람들이 노동 문제에 관심을 잃어가는 거 같다. 작가나 평론가들이 깊이 생각하고 많이 발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조세희 작가의 부고 기사입니다. 조 작가는 생전 카메라와 수첩을 가지고 '현장'에 나타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요. 난쏘공 역시 그가 잡지기자 시절 직접 철거현장을 취재한 뒤 써낸 소설이었습니다. 이명원 교수를 통해 고인이 생전 전했다는 한 마디를 보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사진은 2009년 용산참사 현장을 찾은 고 조세희 작가의 모습입니다.

서사가 실종된 시대

독서시간: 약 4분 / 글자수: 약 1200자

🖍글 속 한 문장

장애인들의 투쟁으로 모든 시민들이 득을 보는 것처럼, 한 사회가 공유하는 운동의 경험과 성과는 그 사회의 지적, 물질적 자산이다. 사회의 집단기억은 지금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의 바탕에 운동의 역사가 있음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공유하며 현재와 연결함으로써 구성된다. 하지만 정작 우리 사회는 집단기억을 얼마나 성실히 만들어 왔을까?

👤김스피의 블라블라

위의 조세희 작가 부고 글에 이어 생각해볼만한 지점이 있었던 최성용 연구자의 칼럼입니다. 단순히 사회적 약자의 사건을 보도하는 것을 넘어, 이를 모두의 문제로 궁리해 공유할 수 있는 집단서사를 만드는 것의 중요성을 떠올려봅니다. 그것을 위해선, 우선 '봐야' 하겠죠.

일단 ‘보는 것’의 중요성

독서시간: 약 3분 / 글자수: 약 700자

🖍글 속 한 문장

”메무나(*시에라리온 내전에서 팔을 잃은 소녀)를 본다는 것은 메무나가 속한 세계가 어떻게 지금 모습이 되었는지를 함께 보는 과정이다. 이러한 시선의 연대가 메무나의 부서진 세계를 회복시키기에는 부족하겠지만, 불충분함을 핑계로 연대를 멈추기에 우리의 세계에는 아직 많은 연대가 필요하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장혜영 의원이 수지 린필드의 책 <무정한 빛>을 소개한 칼럼('내 인생의 책')입니다. 저도 이 책을 굉장히 인상깊게 읽었고, 이번 회차를 쓰면서 많이 떠올렸는데요. 타인의 재난을 '보는' 것에 쉽게 '재난포르노'라는 딱지가 붙는 세상에서, 비록 '불충분함'이 있을 수 있더라도, 세상을 '본다'는 것의 의미를 강조한 책입니다. 기회가 되면 이 책도 인스피아에서도 다룰 수 있으면 좋겠네요.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좀더 참고할 수 있는 서평입니다.(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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