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쓰는 마음

돌이켜보건대 저는 편지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가족들 모두 잠든 밤, 아마도 중요한 내용이었겠지만 저에게는 흥미롭지 않았던 학교의 수업 시간, 10분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한껏 북적거렸던 쉬는 시간, 책상에 닿을 듯 몸을 숙여 편지지에 얼굴을 묻고 편지를 썼습니다. To.유진,  To.원정, To.윤경… 친구들의 반에 달려가 편지를 건네 주면 그 다음 시간, 혹은 그 다음 날에 그들 역시 저에게 편지를 건네 주었어요. 그건 이미 무엇이 무엇의 답장인지 알 수 없는, 차라리 매일의 연속된 대화와 같았던 것 같아요. 때때로 번화가의 팬시샵을 둘러보다가 서로의 마음에 드는 두꺼운 노트를 발견할 때면 교환 일기를 쓰기도 했습니다. 


매일 서로를 오가던 그 무수한 편지들엔 어떤 말이 쓰여 있었을까요? 이 편지를 쓰기 위해 빈 화면을 오래 바라보고 있어야했던 지금의 저로서는 어떻게 그 많은 말이 펜을 들때마다 늘 샘솟듯 흘러나왔는지 기억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 무수한 편지를 통해 전달되었던 것은 그 곳에 적혀 있던 말들 자체가 아니라, 종이를 사각거리며 지나가는 펜의 반복된 움직임, 너에게 무언가를 전하기 위해 이 시간을 기꺼이 보내고 있다는 사실, 그리하여 바로 그만큼 우리는 서로를 점유하고 있다는 친밀함의 증명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지난 7월 17일 페미워커클럽에서 함께 한 활동은 여기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우리가 한 활동은 누군가로부터 전해진 말 중 유난히 나에게 머문 말을 떠올려보고, 그 말에 대한 답장을 써보는 것이었어요. 마치 편지를 주고 받듯이, 혹은 교환일기를 쓰듯이 말이에요. 각자에게 떠오른 말은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는 말일 수도 있고,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는 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순간 갑자기 떠오른 말일 수도, 당시에는 그냥 지나갔지만 왠지 모르게 어딘가 걸려 있는 말일 수도 있고,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 있는 말일 수도 있지요. 그리고 그 말을 들었을 때, 혹은 그 말을 지금 다시 떠올렸을 때의 감정을 다양한 도구를 통해 색이나 형태로 그리고 칠하고 꾸민 후, 가운데를 실로 엮어 한 권의 작은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소란스러운 일주일이 지난, 짧은 주말의 마지막 저녁. 큰 테이블에 둘러 앉아 각종 재료를 수북히  늘어놓고 각자의 작업에 골몰합니다. 조용한 음악을 배경으로 바구니에서 이런저런 재료를 뒤적거리는 소리, 색연필, 연필, 펜, 오일파스텔 등 다양한 도구가 빠르게, 또는 천천히, 각자의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따금 펜을 놓고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기도 하고, 부드러운 오일파스텔을 무작정 손이 가는대로 움직여보기도 하고, 예쁜 패턴의 마스킹테이프와 스티커를 여기저기 붙여 보기도 하고, 그러다 갑자기 떠오르는 것들을 문득 이야기해보기도 합니다. 잘하거나 못하거나 판단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말이 아닌, 말이 되지 않은, 말이 되지 못한 어떤 것들을 손으로 옮겨 봅니다. 


이를테면 저에게는 한 마디의 말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가볍게 듣고 지나갔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음에 남아 계속 떠올리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 말을 꺼내 생각하기 시작하자 어쩐지 노란색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싶어졌습니다. 오일 파스텔을 작은 원으로부터 점점 커지는 나선 모양으로 움직여 부드럽고 큰, 노란 동그라미를 그렸어요. 그리고 조금 더 짙은 오렌지색으로 테두리를 그리고, 그 주위를 주황색으로, 또 그 주위를 빨간색으로 감쌌어요. 그 포근한 색깔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건 마치 염증 같다고. 겉으로는 보이지 않아 알아채기 어렵지만 이따금 어딘가 배를 콕콕 쑤시는 통증을 일으키곤 했던, “여기 염증이 있네요.” 하고 의사가 보여준 그것 말이에요. 그리고 생각했어요. 그 말은 나에게 염증 같은 것이었다고. 겉으로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마음 어딘가에 고여 나도 모르게 뭉근한 아픔을 유발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또한 생각했어요. 오일 파스텔을 종이에 부드럽게 미끄러트리며 원을 그려나갈 때, 그건 어릴 때 배가 아플 때마다 손바닥으로 아픈 배를 둥글게 문질러주던 누군가의 손길과 닮았다고.   


신기한 점은, 각자가 만든 책에서, 어쩌면 말로 이야기한다면 비슷한 단어로 표현될지도 모를 이야기들이 너무나 다른 색, 다른 형태, 다채롭고도 고유한 각자의 페이지로 완성되어 있었다는 점이에요. 나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말들을 분명한 선으로 적고 그와 닮은 선을 정교한 모양으로 이어갈 때, 색연필로 마치 아침의 바다처럼 어스름한 선을 그을 때, 듣고 싶은 말을 종이 가득 큰 글씨로 또박또박 적을 때,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생각하며 그가 좋아할 풍경을 그릴 때, 말의 어긋남에 대해 숙고할 때, 우리가 경험했던 것은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으로 말을 이어갈 때와는 무척 다른 감각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페이지에 남은 것들만큼이나, 내가 느끼는 감정을 언어라는 틀을 넘어 공들여 어루만지고 옮기는데 집중한 시간 그 자체가 소중하게 여겨졌어요. 마치 밤을 새워 손편지를 쓰며 친밀함에 젖어들던 어느 날 처럼요. 


저는 때때로 우리가 하는 많은 일들이 편지를 보내는 일과 비슷하다고 느끼곤 해요. 우리는 각자의 삶에 골몰하면서도 동시에 누군가의 삶과 연결되기를 멈추지 않으니까요.  편지가 필요한 까닭은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기 때문이죠. 서로 떨어진 거리를 넘어 편지를 보내는 일은 일정한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기도 합니다. 편지를 적으면서, 또한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저는 생각할 거예요.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적절하게 쓰였을지, 혹시 어떤 말이 내 의도와는 다르게 너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을지, 주소는 제대로 잘 적었을지, 편지는 잘 도착했을지, 혹시 사고가 있지는 않았을지, 아무 문제도 없다면 왜 답장은 오지 않는지……. 


“모든 서신은 편지가 수취인에게 도착하기를 바라는 불타는 짝사랑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편지를 쓰는 일은, 최소한 편지를 보낼 때만큼은 짝사랑과 비슷한 일인가봐요. 그것이 돌아오리라는 어떤 확신도 없이, 그럼에도 기어코 나의 마음을 보내는 일이기 때문이겠죠. 용기라고 불러도 좋을, 이런 마음이 그날 페미워커클럽 멤버들이 만든 책에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역시 제가 쓴 편지가 돌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음 장을 들어 다시 쓰겠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세계, 서로 다른 언어의 교환이 우리를 오독에 빠뜨리더라도, 수신이 되지 않더라도, 그 편지가 어딘가를 영영 헤매더라도. 


‘불타는 짝사랑’으로 각자의 편지를 무수히 쓰고 또 보내고 있을 여러분에게 연대의 마음을 보냅니다. 그리고 바라건대 우리에게 그 사랑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할 여유 또한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올해 여름, 한 숨 쉴 틈이 마련된 어떤 조용한 오후, 혹은 한낮의 뜨거운 기운이 한풀 꺾인 어느 저녁, 해야할 말과 써야할 글들을 잠시 거기 두고, 종이에 스치는 연필의 사각거리는 소리를 단지 즐거워하며 마음가는 대로 손을 움직여보는 시간 역시 가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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