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O 속 미술'을 찾아 소개합니다!
🖍️ OO 속 미술 🖍️
안녕하세요, 시즌 3으로 돌아온 『땡땡레터』입니다. 11호의 주제는 ‘OO 속 미술’로, 다양한 장르에서 미술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오늘 수연은 영화 〈빈(Bean)〉 속에서 찾은 미술작품, 휘슬러의 〈회색과 검은색의 구성〉(1871)을 소개합니다.
미스터 빈, 학자가 되다
글. 수연
슬랩스틱 코미디를 떠올리면 ‘찰리 채플린’보다는 ‘미스터 빈’이 떠오른다. 코미디 드라마 〈미스터 빈〉(1990-1995)은, 단순한 일에도 어려움을 느끼는 영국의 중년 남성 미스터 빈(Mr. Bean)의 좌충우돌 일상을 슬랩스틱 형식으로 보여준다. 〈미스터 빈〉은 대사가 거의 없다. 빈은 대체로 자신이 일으킨 사고를 만회하기 위해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이를 해결하려 드는데, 이때의 과장된 행동과 표정 그 자체로 웃음을 주는 편이다.
영화 〈빈(Bean)〉(1997)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이번 호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 속 미술’의 주인공 역시 빈이다. 1997년 영국에서 개봉한 영화 〈빈(Bean)〉은 드라마 〈미스터 빈〉의 외전으로, 여기서 빈은 영국 왕립 미술관(Royal National Gallery) 최악의 직원으로 등장한다. 미술관 이사회는 회의 중 빈을 해고하기로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빈은 미술관 역사상 가장 쓸모없는 직원이다.”
평화롭던 어느 날, 영국 왕립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미국 최고의 걸작 ‘휘슬러의 어머니’를 한 미국 장군이 사들이고, ‘휘슬러의 어머니’ 초상화는 본국 송환을 앞두게 된다. 미국에서 ‘휘슬러의 어머니’를 소장하게 된 그리어슨 미술관(Grierson Art Gallery)은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계획하고, 기존에 그림을 소장하고 있던 영국 왕립 미술관 측에 축사해줄 저명한 박사를 요청한다.
영국 왕립 미술관 입장에서, ‘휘슬러의 어머니’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이에 마침 빈을 해고할 명분이 필요했던 미술관은 빈을 저명한 박사인 셈 보내기로 하고, 빈은 그리어슨 미술관 측의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영화 〈빈(Bean)〉 속 ‘휘슬러의 어머니’가 훼손된 장면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한편, 빈을 최고의 학자로 단단히 오해한 그리어슨 미술관은, 빈을 포함한 소수의 관계자만 모아놓고 ‘휘슬러의 어머니’를 최초로 공개한다. 모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빈은 ‘휘슬러의 어머니’를 가까이서 구경하다가 휘슬러의 어머니 얼굴에 재채기하고 만다. 침을 닦기 위해 꺼낸 손수건에는 마침 만년필에서 새어 나온 파란 잉크가 묻어 있었고, 그림은 크게 훼손되어 휘슬러 어머니의 얼굴이 녹아버린다. 빈은 수습하고자 직접 휘슬러 어머니의 얼굴을 그리는데, 그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우스꽝스럽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 〈회색과 검은색의 구성(Arrangement in Grey and Black No. 1)〉, 1871, 캔버스에 유채, 144×162cm, 오르세미술관, 파리.
(이미지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Whistler%27s_Mother#/media/File:Whistlers_Mother_high_res.jpg)
사실, ‘휘슬러의 어머니’는 작가인 제임스 맥닐 휘슬러가 지은 제목이 아니다. 실제 제목은 〈회색과 검은색의 구성(Arrangement in Grey and Black No. 1)〉으로, 순전히 작품의 형식과 색채에 초점을 둔 제목이다.
19세기 말, 프랑스에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형식주의적 움직임이 일었다. 당시 작가는 어떤 사상이나 관념을 드러내기 위해 색을 사용하기보다, 오로지 색 자체를 표현하기 위해 색을 사용했다. 휘슬러 역시 ‘예술을 위한 예술’ 미학을 옹호했고, 자신의 그림에서 주제 묘사를 철저히 배제하였으며, 그림이 어떤 방식으로 색채와 형식으로 변형되는가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렇다면 영화 〈빈〉은 작품의 제목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오류를 범한 것인가? 그렇다고 볼 수만은 없다. 실제로 〈회색과 검은색의 구성〉은 ‘휘슬러의 어머니 초상화’로 불린다. 휘슬러가 이 작품을 영국 왕립 아카데미에서 처음 공개했을 때, 자신의 어머니를 ‘구성(arrangement)’이라고 지칭한 것에서 논란을 빚는다. 이에 휘슬러는 “나에게는 어머니를 그린 것이니 당연히 의미 있는 그림이지만, 이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모델이 누구인지는 전혀 상관이 없다”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모델이 아니라, 이 그림의 구성인 것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영화 〈빈〉에서 영국 왕립 미술관으로부터 ‘휘슬러의 어머니’ 초상화를 사들인 사람이 미국 장군이라는 점이다. ‘왜 이 작품을 꼭 사야만 했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뉴턴 장군은 “나는 미술 문외한이지만, 오로지 애국을 위하여 샀다. 다른 나라에 미국 출신 화가의 걸작이 있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었다.”라고 답한다. 정작 ‘휘슬러의 어머니’를 그린 화가 휘슬러는 미술이 실용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 목적에 이용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미술의 위대성을 국가의 영광이나 덕목과 연관 짓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작품이 화가의 손에서 떠난 이상, 감상은 관람객의 몫이다. 이 작품은 19세기 미국 미술의 한 줄기 희망처럼 떠올랐다. 작품에 묘사된 ‘어머니’의 청교도적이고 엄숙한 분위기는 미국인의 취향과 잘 어울려, 1934년 첫 번째 ‘어머니의 날’ 기념 우표에까지 등장한다.
영화 〈빈(Bean)〉 속 수습된 ‘휘슬러의 어머니’
결국 영화 〈빈〉에서 훼손된 ‘휘슬러의 어머니’는 어떻게 됐을까? 우선, 빈은 자신의 그림으로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빈은 원본 캔버스를 깔끔하게 도려내고, 그 자리에 ‘휘슬러의 어머니’ 전시 상품으로 나온 실물 크기 포스터를 부착한다. 그 후 달걀과 각종 화학약품을 섞어 포스터 위에 코팅하듯 바르니 유화의 질감이 살아났고, 약간 과장된 면이 있으나 모두가 속아 넘어갔다.
명화 위에 우스꽝스러운 그림을 그리고, 포스터가 원작을 대신하는 각 장면에서 다다이즘이 떠올랐다. 1919년 마르셀 뒤샹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복제화에 연필로 수염을 그려 넣고, 그림 밑에는 ‘L.H.O.O.Q.’라는 알파벳을 적었다. 이 글자는 불어 발음으로 ‘엘.아.슈.오.오.뀌.’로 발음하는데, 이와 유사한 불어 문장의 뜻은 ‘그녀는 엉덩이가 뜨겁다’로, 성적 흥분 상태를 일컫는다.
뒤샹은 명작이라든가, 천재성 혹은 창조력에 대한 사람들의 숭배를 과감하게 파괴하는 이 같은 행위를 통해 반예술(anti-art)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영화 〈빈〉에서 걸작 ‘휘슬러의 어머니’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한 빈의 행위는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예술을 대하는 미국식 문화에 대한 노골적인 야유다. 실제로 뒤샹이 〈L.H.O.O.Q.〉에서 서구 미술의 한 도상을 손상 혹은 개량하면서 행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영화 〈빈〉은 미술관의 다양한 업무를 맡은 직원과 그들의 이해관계가 얽히는 모습을 다소 과장하여 보여주기도 한다. 큐레이터 데이비드는 처음에 ‘빈’이라는 이름의 교수는 미술계에서 처음 들어본다며 의심하는데, 영국 왕립 미술관의 학자들이 빈을 추천했다고 하니 빈을 무조건 신뢰한다. 홍보 담당자 버니스는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해 휘슬러와는 전혀 관계없는 가수 ‘존 본 조비’를 초청하려고 하며, 상품 담당자 월터는 휘슬러의 누나를 가장한 누드 포스터, 휘슬러 어머니의 초콜릿 칩 쿠키 등 이익을 위해 상업적이고 외설적인 상품을 제작하여 발표하기에 이른다.
“제가 하는 일은 가만히 앉아서 그림을 보는 것입니다.”
‘저명한 학자’ 빈이 축사에서 처음으로 한 말이다. 영화 〈빈〉은 천방지축 빈이 그리어슨 미술관의 큐레이터 데이비드를 만나며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빈〉은 줄거리 전체를 미술관을 배경으로 하여, 미술관 운영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안다면 재밌게 볼 수 있다.
〈빈〉은 1997년에 제작된 영화지만, 오늘날의 미술관 및 전시 행태에 비판점을 던지기도 한다. 작품 내용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굿즈, 유명 연예인을 VIP 손님으로 초청하는 것은 대규모 블록버스터 전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고, 미술계 내부의 인맥 혹은 입김으로 인하여 제대로 된 검토 없이 미술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영화 〈빈〉은 현실에서 미약하게 느꼈던 답답함을 극대화하여 보여주고, 그만큼 통쾌하게 해결하며, 그 과정에서 큰 웃음과 교훈을 준다. 어릴 적 〈미스터 빈〉을 보며 한 번이라도 ‘내 곰 인형’에게 말을 걸어본 사람에게, 영화 〈빈〉을 추천한다.
🌻 수연
영화 〈빈〉은 미술관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만 알고, 단순한 호기심으로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보다 보니 생각보다 이야기할 거리가 많아, ‘영화 속 미술’로 여러분께 소개해드리게 되었습니다. 다소 구시대적인 빈의 몸짓과 음성에 코미디적으로는 재미를 못 느끼실 수 있지만, 제가 소개한 내용 외에도 영화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가 있으니 가볍게 보시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
11호
발행인: 땡땡 콜렉티브
발행일: 2022/03/03
문의: 00collective202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