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완전히 실패해버렸습니다. 무엇에 실패했냐면 그건 아카데미 수상 결과를 예측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이번 주 월요일 아침에 진행됐었죠. 실시간까지는 아니지만 틈틈이 진행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는데요. 일단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이렇게까지 많은 상을 받을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습니다. <에에올>은 제9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각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남우조연상, 각본상, 편집상 총 7개의 상을 휩쓸었습니다. 저는 작품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편집상 정도까지는 받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예상을 뛰어넘는 의외의 결과를 접하고, 더욱 겸손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고 있는 제 자신이 조금 웃기기는 합니다. 왜냐면 바로 지난 호에 어떤 영화가 무슨 상을 받는지에 대해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말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런 생각 자체가 오만한 것 같기도 합니다.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아무 의미 없다’고 말하고 있는 나 자신이 우습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런 생각을 한 결정적인 계기가 따로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오스카의 ‘주제가상’ 부문의 수상 결과를 확인하게 된 것이었는데요. 인도 영화 <RRR(라이즈 로어 리볼트)>이 영예의 주인공을 차지한 부문이었습니다. 노래의 제목은 'Naatu Naatu'인데, 인도 전통춤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단어의 뜻 자체는 native라는 단어의 뜻과 가깝다고 하네요. <RRR>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시기의 인도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영화인데, 그런 의미에서 ‘토종’의 가치를 말하는 이 노래가, <RRR>이라는 영화 전체를 대표하는 ‘주제가’인 것은 상당히 적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적절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노래가 오스카 수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 노랜 제겐 그저 인도 영화들에 흔히 나오는 군무 씬을 위한 ‘또 하나의 신나는 노래’로밖에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노래가 후보에 오른 건 이 노래가 자체가 뛰어난 것이 아니라, 아카데미가 이 영화를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에 올리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기까지 했었습니다. 정말 제 맘대로 소설을 썼던 거죠.



그렇다고 이 노래가 상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제 생각이 바뀐 것은 물론 아닙니다. 제 마음대로 소설을 쓴 것, 그리고 모두가 나처럼 생각할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한 것은 반성하지만, 노래 자체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관련해서 떠오르는 일화가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지난 레터에 언급했던 제가 진행한 ‘아카데미 시상식을 미리 예측해 보는 모임’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현장에서 저는 주제가상 후보에 오른 다섯 곡의 노래 전곡을 참석자들과 함께 듣는 시간을 마련했었습니다. 즉석에서 다 함께 영화를 볼 수 없으니, 노래라도 함께 들어 현장감을 살리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현실과는 많이 다른 형태긴 하지만, 마치 진짜로 수상작을 뽑기 위해 난상토론을 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보려고 했었습니다. 물론 행사 당일에는 계획했던 것에 비해 분위기가 잘 살지는 못했었는데요^^; 대신 그때가 가장 분위기가 좋았던 것만큼은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바로 <RRR>의 주제가를 함께 듣던 순간이었습니다. 이미 노래를 알고 있는 저는 그냥 멀뚱멀뚱 앉아 있었는데, 저를 제외한 참석자 모두가 이 노래를 흥미롭게 들은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가장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고, 이 노래 때문에 영화가 보고 싶어진다는 분들도 꽤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때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오스카를 결과를 듣고 보니 이때가 다시 떠오르더라구요. 눈앞에 생생한 현상이 있었는데도 알아채지 못한 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 이번 주였습니다.

  

그런데 혹시 <RRR>의 그 춤 장면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 노래/춤이 공연되기도 했는데요. 심지어 유튜브에 업로드되어 있는 영화 속 영상은 현재 무려 1억 뷰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뜨거운 영상이기도 합니다. [영상은 여기에서]


개인적으로 꼽는 이 춤의 시그니처 동작은 바로, 한 다리로 콩콩이를 뛰며 반대쪽 다리를 앞뒤로 강하게 휘젓는 동작입니다. 위에 첨부한 사진에서 보시면 느끼실 수 있듯 마치 점프를 하며 공중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춤인데요. 영상을 보면 엄청난 에너지와 신나는 기분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참고로 이 춤 시퀀스는 2개월간의 리허설을 거친 뒤 무려 20일 동안의 촬영 기간을 거쳐 완성된 장면이라고 하는데요. 이를 듣고 새삼 세상의 다양함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없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이 군무 장면을 이렇게 공을 들여 찍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면서 한편으론 또 다른 춤 영화 한 편이 떠올랐었습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2000년 작 <빌리 엘리어트>입니다.



이 영화는 너무 유명해서 많은 분들이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간단히만 말하자면 11세 소년 빌리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레리노의 꿈을 이루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완강했던 아버지가 마침내 빌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순간이 큰 감동을 주는 영화였죠. 그중 제가 꼽는 가장 명장면은 바로 이 장면입니다. 빌리는 아빠와 함께 마침내 발레 학교로 향하게 되는데요. 너무 신난 빌리는 그 기분을 주체할 수 없어 춤을 추며 걷기 시작합니다. 도저히 평범하게 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춤이 좋아 미칠 지경인데, 그렇게 단호하던 아빠가 이제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본 아빠가 빌리에게 말합니다. “꼭 그래야겠니? 평범하게 좀 걷지 않을래?”


저는 이 장면을 보고, 이 평범하지 않은 걸음을 현실에서도 자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입시 경쟁 제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채 부모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신나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런 발걸음을 자주 발견하고 싶었습니다. 혹은 미래에 제 아이가 생긴다면, 다른 무엇보다 이 춤 사위 같은 발걸음을 선물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걸음이 결실을 맺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이 춤 자체가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RRR>의 신나게 걷는 듯한 춤을 보며, 오랜만에 보고 싶었던 그 춤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누군가 멀리서 이 춤을 추고 있는 사람을 본다면 분명, “저기 이상하게 걷고 있는 사람 좀 봐!”라는 말을 할 것 같은 춤. 그리고 저는 이 춤 같은 발걸음을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며 여러 번 목격하였습니다. 절대 ‘나의 시간’이 올 거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키 호이 콴 배우가 남우조연상을 받으러 나갈 때. 아시아 배우로서는 최초로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양자경 배우가 오스카 트로피를 손에 쥐러 무대로 나갈 때. 그리고 등등등..


그래서 제가 했던 말을 번복하려고 합니다. 제가 틀렸다는 사실을 고백하기 위해 너무 말을 길게 끈 것 같네요. 딱 말하겠습니다. 지난주 아카데미를 포함한 세상 모든 상 따위에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 않다고 말했던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누군가 자신의 꿈을 향해 걸어가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들이 태어나서 가장 평범하게 걷지 못하는 그 순간이 너무나 감동적으로 느껴집니다. 이 자리를 빌려 <RRR>을 만든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오스카 수상자들에게, 축하하다는 말과 그동안 평범하게 걷지 않느라 고생이 많으셨다는 말을 전합니다.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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