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보내는 마흔 번째 흄세레터

님에게는 소중한 기억인데 상대는 전혀 떠올리지 못하거나 시큰둥해서 서운했던 적이 있지 않나요? 혹은 여전히 과거의 어느 순간에 붙잡혀 있는데 이제는 극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만났을 때 질투심이나 자기혐오가 생겼던 적은요?

 

  “나한테서도 터마시와 에버,

그리고 너희들에 대한 기억을 물리쳐줄 수 있을까?”(188쪽)

 

《여행자와 달빛》의 ‘미하이’는 신부가 된 옛 친구 ‘에르빈’에게 이렇게 애원합니다. 하지만 에르빈은 거절하죠. 그 기억마저 없다면 미하이에게 무엇이 남을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인데요. 에르빈에게 뛰어난 영적 능력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미하이는 좌절합니다. 이제는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를 그릴 수 있고 마음도 평온해질 거라 믿었거든요.

“너에게서 놀랄 만한 대답을 기대했어. (중략) 나를 내버려두지 마. 지금도 외롭게 혼자 있잖아. 내가 뭘 해야 할까?” 하지만 미하이는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다음 날 로마로 향합니다.

이렇게 미하이는 한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을 만나고 각자가 과거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으며 사는지 보게 됩니다. 그들을 통해 과거의 자신을 되짚어가는 이 여행의 끝에서 미하이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요.

 

오늘은 흄세 편집자가 뽑은 《여행자와 달빛》 미리보기와 추천 콘텐츠를 소개해드릴게요.

《여행자와 달빛》 미리보기 1


모든 것이 풀어진 듯했다. 매우 피곤하고도 만족한 채 그들은 서로를 놀란 눈으로, 행복하게 쳐다보았다.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은 점차 깨달았다. 에르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아침, 당신은 이런 걸 생각지도 못했을 거야. 그렇지 않아?”
“맞아. 당신은?”
“나도 생각지 못했지. 아니, 모르겠어. 나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여기에 왔던 거야.”
“에르지! 이 세상에서 당신이 최고야.”
실제로 미하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에르지에게서 발산되는 여성의 따스한 기운이 그를 뒤흔들었다. 고마웠고, 어린아이처럼 행복했다.
“그래, 미하이. 당신에게 나는 항상 좋은 사람이어야 해. 당신이 상처를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말해줘……. 우리가 다시 한번 결혼할 수 있을까?”

에르지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어쨌거나 그녀는 이 질문을 기다렸었다. 그녀의 야릇한 허영심도 바라던 바였으나…… 실제로 그것이 가능할까? 그녀는 오랫동안 주저하더니 찬찬히 탐색하듯 미하이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해봐야 해.” 미하이가 말했다. “우리 몸이 서로를 잘 알고 있잖아. 진실은 보통 몸에 있어. 몸은 자연의 언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영혼으로 우리가 망쳤던 것을 몸이 바로잡을 수 있을 거야. 우리는 다시 한번 삶을 같이 살아봐야 해.”
“만약, 만약에 그렇다면…… 당신은 왜 나를 그곳에 두고 떠났었어?”
“에르지, 향수야 그건. 하지만 지금은 어떤 마법에서 풀려난 것 같아. 노예와 죄수가 되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지금은 나 자신이 조금 더 일상적이고, 또 강해졌음을 느껴. 나는 당신과 함께 있어야만 해. 그건 분명해. 물론 이기적이지. 문제는 무엇이 당신에게 더 나을까 하는 거야.”

“나는 모르겠어, 미하이.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당신을 훨씬 더 사랑하는 것 같아. 그리고 당신이 내게 많은 고통을 줄 것 같아 두려워. 게다가, 아니면 그 다른 여성과…… 모르겠어.”

(중략)

에르지는 새벽에 잠에서 깨어 이렇게 생각했다. ‘미하이는 변하지 않았으나 나는 변했어. 이전에 나에게 미하이는 대단한 모험, 반란, 낯설고 신비한 사람을 의미했었 어. 외부의 힘에 그가 사로잡혔던 것은 자신의 수동적인 성격이 그렇게 되도록 스스로를 방기했던 것뿐이지. 이제는 알아. 그는 호랑이가 아니야. 최소한 미하이보다 훨씬 더 독특한 사람들이 있지. 세페트네키 야노시가 그렇고,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을 거야. 미하이가 지금 나에게 다시 돌아오고 싶어 하는 것, 그것은 바로 그가 내 안에서 부르주아의 질서와 안전을 찾고 있어서야. 내가 그에게로 도망치게 되었던 그 모든 것을 그는 지금 내 안에서 찾고 있어. 아니야, 아무런 의미도 없어. 미하이로부터 나는 회복되었어.’
그녀는 일어나 씻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미하이도 일어났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는 모든 상황을 즉시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옷을 차려입었다. 대화도 거의 없이 그들은 아침 식사를 했다. 미하이는 기차역으로 에르지를 배웅했고, 떠나는 그녀 뒤로 손을 흔들었다. 둘은 알고 있었다. 그들 사이의 일은 이제 끝이라는 것을.(323~326쪽)

세's pick

미하이와 에르지가 헤어진 뒤 재회해 하룻밤을 보낸 다음 장면입니다. 미하이의 (섣부른!) 고백에도 에르지는 '나'라는 중심을 잃지 않고 찬찬히 생각하죠. 혼자였던 시간은 에르지에게 둘의 관계를, 자기 자신을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허락해주었고요.

《여행자와 달빛》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주인공 '미하이'의 아내로 나오는 '에르지' 캐릭터를 소모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거였어요. 미하이의 시점에서 한 번, 에르지의 시점에서 또 한 번 읽어도 좋을 작품이랍니다.

《여행자와 달빛》 미리보기 2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고백을 거부할 수 없었다. 달아난 이후로는 그냥 본능적으로 지냈을 따름이라는 사실을, 그 모든 것을 미하이는 말하는 도중에 자각할 수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어른 또는 ‘가짜 어른’의 삶을 살았으며, 결혼은 또 얼마나 망쳐버렸는지, 그리고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자신의 미래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진정한 자신에게로 어떻게 되돌아갈 수 있는지 미하이는 진정 모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단지 본능적으로만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향수 짙은 청년 시절과 그 시절의 친구들이 그를 매우 괴롭힌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각성하자 미하이는 강렬한 감정으로 혼란스러워졌으며, 목소리는 멈칫거렸다. 스스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에르빈 앞에서, 에르빈의 산정 같은 청명함 앞에서 자신의 감상적인 행태가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놀라서 물었다.
“너는 어때? 도대체 너는 어떻게 참고 있는 거야? 너는 고통스럽지 않아? 너는 그립지 않아? 너는 어떻게 한 거야?”
에르빈의 얼굴에 다시 그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에르빈은 고개만 숙였고, 대답하지 않았다.
“에르빈, 대답해봐. 이렇게 간청할게. 대답해봐. 너는 그립지 않아?”
“그립지 않아.” 무채색의 목소리로, 침울한 얼굴로 그가 말했다. “나는 이미 그 어떤 것도 그립지 않아.”
그들은 꽤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하이는 에르빈을 이해하고자 했다. 이해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 아마도 그는 스스로 모든 것을 지운 듯했다. 실제로 에르빈은 모든 이와 단절해야 했고, 사람들 간에 감정의 싹이 틀 수 있는 뿌리들마저 영혼으로부터 덜어냈다. 지금, 이제 고통스럽지는 않지만, 여기 버려둔 땅에 그는 머물고 있다. 메마르고 척박한 이 산에서…… 미하이는 전율을 느꼈다.(185~186쪽)

랑's pick

한 시절을 함께 보냈어도,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건 각자의 몫인 듯합니다. 평생 머물러도 좋을,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시절을 갖고 있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도 알게 되네요.

👀편집자의 추천 콘텐츠👍

〈래빗 홀Rabbit Hole〉, 2011

'과거에서 벗어난다'는 표현을 관용적으로 쓰곤 하지만, 어쩜 그건 불가능할지 몰라요. 과거는 흘러가는 게 아니라 몸에 새겨지는 것 같거든요. 영화는 아들을 떠나보낸 부부를 중심으로 '과거를 안고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얘기합니다. 같은 경험을 한 엄마가 딸에게 건네는 대사가 인상 깊어요. "언제부턴가 견딜 만해져. 결국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조약돌처럼 작아지지. 때론 잊어버리기도 해. 하지만 문득 생각나 손을 넣어보면 만져지는 거야."

〈애프터 양After Yang〉, 2022

'미카'라는 중국계 아이를 입양한 '제이크' 가족은 정체성 교육을 위해 중국인으로 프로그래밍된 안드로이드 '양'을 구입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고장나버린 양. 핵심 부품도 망가져 원상 복구할 수 없는 와중에 양이 소중히 간직해온 '특별한 메모리 뱅크'가 발견되는데요. 양의 기억을 통해 알게되는 사랑, 관계, 가족에 대한 영화입니다. 포스터에 예고편 링크 걸어두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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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4. 결정적 한순간
016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 황유원 옮김
017 데미안 
헤르만 헤세 | 이노은 옮김
018 여행자와 달빛 
세르브 언털 | 김보국 옮김
019 악의 길 
그라치아 델레다 | 이현경 옮김
020 위대한 앰버슨가 
부스 타킹턴 | 최민우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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