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지 않고 식물에 취한 썰
OCT 4, 2022
아피스토의 풀-레터 vol.1
  식물을 사랑하는 당신께
안녕하세요. 아피스토입니다. 식물집사님들과 함께 다양한 식물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어서, <논스톱 식물집사 아피스토TV>라는 유튜브 채널을 만든 지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네요.

유튜브 영상을 올리면서 느낀 점은, 영상에 미처 담지 못한 뒷이야기나 영상이라는 매체로는 풀어내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편지'라는 형식으로 소통하면 어떨까 생각을 하게 됐죠.

편지는 다른 어떤 매체보다 밀도 높은 쌍방형 소통 방식이잖아요. 네이버카페, 밴드, 단톡방과 같이 여럿이 모이는 공간은 발빠르게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요. 그러나 그 공간에서 말 몇 마디 섞지 못하면 우리는 바로 이방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버려진 단톡방은 또 얼마나 많은지.

편지의 소통 방식은 주고받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느리지만 친밀감을 유지할 수 있는 '편지'를 되살려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보내드린 식물 편지에 당신이 식물 이야기로 답해주신다면, 그리고 그 이야기를 '풀-레터'에서 함께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풀-레터'가 그 소통의 밀도를 높이는 허브(hub)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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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며칠 전 있었던 행사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일러스트레이터로 참여한 <글로스터의 홈가드닝 이야기> 북토크가 있었거든요. 진행자인 마이어반 한민규 대표님과 저자인 식물 인플루언서 글로스터님, 그리고 저 3명이 진행했지요. 그런데 뭔가 '육식남'처럼 생긴 남자 셋이 식물 얘기만 한다는 것 자체가 기이하기도 해서 걱정이 앞섰습니다. 다행히 3시간의 긴 북토크 동안 참석자 분들 모두 끝까지 경청해주셔서 어찌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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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북토크가 있기 몇 달 전에, 저는 '식물친구' 동생이 운영하는 펜션을 놀러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건장한 체구에다가, 팔뚝에는 잉어 한 마리가 펄떡거리는 타투를 멋지게 새긴 경상도 싸나이죠.

동생은 형님이 오셨다며 친히 돼지목살을 구워주었습니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우리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식물로 넘어갔습니다. 그날 밤의 이슈는 단연 고사리였습니다. 동생은 새로 나온 신품종 고사리를 '득템'했다며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죠. 그리고 그 '아이(고사리)'는 어떻게 물을 주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풍성하게 키울 수 있는지까지 비법을 아낌없이 털어놨습니다. 동생이 고사리 사진을 보여주자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고, 저는 폭죽 같은 감탄사를 연신 쏘아올렸습니다.

"꺄오! 지기네~" (펑- 펑-)

둘은 술 한잔 마시지도 않고 식물 얘기에 취해 밤새 깔깔거렸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웃고 떠들다보니 퍼득 정신이 들었죠. 아, 옆에 아내가 있다는 걸 깜빡한 겁니다. 풀떼기는 입에도 안 댈 것 같은 사내놈 둘이서, 레이스가 달린 돌연변이 고사리의 잎 패턴에 감동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기도 안 찼던 겁니다. (실제로 그 동생은 고기를 먹으면서 상추는 입에도 안 댔습니다. 고기맛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나)

예전에도 남식친(남자식물친구) 서넛과 저녁을 먹고 온 날이면, 아내가 "진짜 식물 얘기만 하냐?"며 궁금해했는데 그날 밤, 현장을 목격한 거죠. 상추도 없이, 술도 없이, 남자 둘이 밤새 고기를 구워먹으며 진짜 식물 얘기만 할 수 있다는 걸요.
아내는 그날 이후 한마디했습니다.

"너네 정말 웃기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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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지난주에는 공식적으로 남자 셋의 식물 이야기가 펼쳐졌습니다. 아마 30시간짜리 식물토크였어도 우리는 충분히 깔깔거리며 날을 샜을 겁니다. 사실 북토크가 있기 전에 단톡방에서부터 그날의 열기는 예정돼 있었습니다. 제가 제안한 '식물 물주는 법'은 너무 단순하다며 '까였거든요'.

"그럼 잘 크다가 한번에 훅 가는 알로카시아 키우는 법은?"
"그건 괜찮네. 의외로 사람들이 많이 죽이잖아."
"역시 알로카시아는 과습이 쥐약이지. ㅠ"
"상토를 코코피트+펄라이트 5:5로 해봐. 절대 안 죽어."
"오. 대박."
"배합은 예술이야."
"ㅋㅋㅋㅌㅋ"
bla bla-.

막상 몰입을 하면 기이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몰입의 바깥에서
몰입하는 저를 발견할까봐, 그게 두려울 뿐이죠. ☺️

다음 편지에서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길 바라겠습니다.

p.s. 그날의 식물토크는 영상에 담아놨으니 조만간 <아피스토TV>에 업로드할게요.


-몰입의 경지에 다다른 아피스토 드림. 
  

사진_식물 이야기에 몰입하는 세 명의 육식남 같은 초식남들
식물 인플루언서 글로스터, 마이어반 대표 한민규, 유튜버 아피스토(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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