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보내는 서른네 번째 흄세레터
저는 아포칼립스를 다룬 작품을 좋아해요. 그런데 최근에 본 몇몇 작품은 등장인물이 너무 극단적으로 그려져서 별로더라고요. 1초도 시야를 돌리지 못하도록 설계된 듯했어요. 어떤 상황이든 누구는 정의롭기만 하고, 누구는 돈만 으며, 누구는 그 세상이 자신을 위한 세상인 양 세력을 만들어 과시하기만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망했다고 해도, 사람의 일면을 이토록 부각시키기만 하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토록 극단적인 등장인물들의 태도와 대립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 의미를 찾을 수는 있었지만요.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도 그런 점에서 비슷했습니다. 주인공 리는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있지만, 심히 어긋나 있거든요. 리는 이 상태로 극단까지 치닫습니다. 자신이 품은 복수심의 방향을 점검하지 않아요. 직선주로를 전력 질주하는 단거리 선수처럼요. 다만 리가 도착하게 되는 곳은 결승선이 아닌 당연하게도 막다른 길이었습니다. 
오늘은 편집자 세&랑이 뽑은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미리보기와 추천 콘텐츠를 소개해드릴게요.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미리보기 1


“내가 아무 남자랑 춤출 거라고 믿는 건 아니죠?”

“난 그 아무 남자야.”
“아녜요. 잘 알면서.”
이렇게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대화는 해본 적 없었다. 루는 꼭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어떤 때는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가 싶다가도, 또 어떤 때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욱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뭐가 다르다는 거야?”
“모르겠어요. 당신은 멋진 몸을 가졌지만, 또 다른 게 있어요. 예를 들면 목소리요.”
“목소리가 어떻다고?”

“평범한 목소리가 아녜요.”

나는 다시 한번 실컷 웃었다.
“그래요. 당신 목소리는 더 그윽하고…… 더……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러니까…… 더 균형이 잡혔달까.”

“그거야 기타 반주로 노래를 해서 그런 거지.”
“아녜요. 난 당신 같은 목소리를 가진 가수라든지 기타리스트를 본 적이 없어요. 당신의 목소리를 상기시키는 목소리를 들어본 건…… 그래…… 거기였어요……. 아이티. 흑인들이었죠.”
“나로선 영광인데. 그들이야말로 세계 최고의 음악가들이니까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그렇지 않아. 그들이야말로 미국 음악의 원조라고!”

“난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댄스 음악을 연주하는 일류 악단들은 다 백인이라고요.”

“물론 백인은 훨씬 더 나은 위치에서 흑인의 창조물을 착취하지.”
“그건 맞는 얘기가 아닌 것 같은데요.”
“모든 위대한 작곡가는 다 흑인이야. 예를 들어 듀크 엘링턴 말이야."

“아뇨, 거슈윈이나 컨 등의 작곡가는 다 백인이에요.”

“그들은 다들 유럽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야. 두말할 것도 없이 최고의 착취자들이지. 거슈윈의 음악에는 독창적인 소절이 단 하나도 없어. 온통 발췌하고, 표절하고, 전재했을 뿐이지. 예를 들면 〈랩소디 인 블루〉에서 독창적인 부분이 한 소절이라도 있나 찾아봐.”
“당신은 참 별스러운 사람이군요. 난 흑인이 정말 싫어요.”

더 바랄 게 없었다. 나는 형을 생각했고, 하마터면 하느님께 감사할 뻔했다. 하지만 그녀를 너무나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분노할 수 없었다. 그리고 좋은 일을 하는 데 하느님은 필요 없었다.(109~111쪽)

세's pick

복수의 목적은 정의 구현이 아니지요. 새삼 깨닫습니다.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미리보기 2


“자, 가자. 흑인들을 위한 정의가 아직은 이 땅에 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부엌에서 깜박거리던 빨간 불빛이 확 커졌다. 휘발유 통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폭발했고 그 섬광이 옆방 창문을 환히 비추었다. 그러고 나자 긴 불꽃이 판자벽 위에서 혀를 날름거렸고, 바람 때문에 불길은 더욱 거세졌다. 불길은 여기저기로 춤을 추었고, 형의 얼굴은 붉은빛 속에서 땀으로 반짝거렸다. 굵은 눈물이 그의 뺨 위로 흘러내렸다. 형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고, 우리는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났다.

형은 집을 팔 수도 있었다. 돈만 있으면 모런의 가족을 궁지에 몰아넣거나 어쩌면 셋 중 한 명을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자기 생각대로 하는 걸 막고 싶지 않았다. 나라면 내 방식대로 했을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선의와 신성(神聖)으로 이루어진 편견이 아직 너무나 많이 남아 있다. 그는 너무 정직하다. 그래서 이렇게 신세를 망친 것이다. 그는 선을 행하면 보답을 받는다고 믿지만, 그런 일은 우연일 뿐이다. 중요한 건 오직 한 가지, 복수하는 것, 그것도 가장 완전한 방법으로 복수하는 것이다. 나는 나보다 훨씬 더 희었던 그 아이를 생각했다. 그 아이가 앤 모런을 좋아하고 데이트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모런의 아버지는 단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아이는 결코 도시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10년 이상을 이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져 나의 기원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살면서 마치 우리가 반사작용처럼 조금씩 몸에 익혀가던 그 비굴한 겸손함을, 톰 형이 찢어진 입술로 동정의 말을 하게 했던 그 지겨운 겸손함을 버릴 수 있었고, 우리 형제로 하여금 백인의 발소리가 들리면 몸을 숨기게 만들었던 그 공포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82~83쪽)

랑's pick

주인공 리는 "가장 완전한 방법"라고 말하지만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복수의 대상을 고릅니다. 소설을 다 읽고, 리가 왜 "가장 완전한 방법"이라고 말했는지, 형의 선의를 왜 편견이라고 말해야 했는지 납득이 되지 않아서 자꾸 이 부분을 들춰보게 되었어요. "머릿속에는 선의와 신성"으로 가득한 형에게서 리는 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을까요.

👀편집자의 추천 콘텐츠👍

더 글로리

1화를 틀면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6시간이 가버린다는, 아마도 요즘 가장 핫한 작품이죠.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속 리의 복수가 물불 가리지 않고 폭주하는 복수라면, 더 글로리〉의 주인공 동은이의 복수는 계획적이고 치밀합니다. 극 초반에 등장하는 학교 폭력 장면의 수위가 세서 보기 힘들지만, 그것만 넘기면 흥미롭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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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테마, 다섯 편의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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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3. 질투와 복수
011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 황유원 옮김

012 동 카즈무후

마샤두 지 아시스 | 임소라 옮김

013 미친 장난감

로베르토 아를트 | 엄지영 옮김

014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보리스 비앙 | 이재형 옮김

015 밸런트레이 귀공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이미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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