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보내는 쉰세 번째 흄세레터
어려서부터 세계지도를 들여다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평생 가닿을 일이 없을 것 같은 낯선 지명들을 톺아보면서 도대체 저기엔 어떤 사람들이 어떤 얼굴로 살아가고 있을지 마구마구 궁금해했죠. 《마마 블랑카의 회고록》 역시 비슷한 호기심으로 읽어볼 수 있었습니다. 어쩐지 우리와 가깝다고는 하기 어려운 ‘베네수엘라’의 어느 할머니가 자식들에게까지 숨겨가며 꾹꾹 눌러써온 회고록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오늘 레터에서는 김인숙 소설가가 《마마 블랑카의 회고록》을 읽고 쓴 인상적인 에세이의 전문을 보내드립니다. “폭죽처럼 터지는” 빛나는 주말 보내시길요🙏

아이에서 할머니가 되는 나


어린 시절, 우리 집은 하숙집이었다.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하숙을 쳤다’. 지금도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한 사람이 쓰는 방은 독방, 둘이서 쓰는 방은 합숙. 엄마와 우리 형제들이 쓰는 방을 제외하고, 하숙생들이 쓰는 방만 여섯.


그 방을 채우는 사람들은 대개 남자였다. 회사원도 있었고, 고시생도 있었고, 뭘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당연히 백수도 있었다. 그들은 내 기억 속에서 실루엣으로 존재한다. 희미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기억의 실루엣. 저녁이면 한 사람, 두 사람씩 대문 안으로 들어서던 하숙생들, 엄마가 일개미처럼 한 상씩 차려 방마다 나르던 저녁상……. 상을 내가고 상을 치우고, 상을 차리고 상을 내가고……. 더운 여름 저녁에는 그들과 우리 식구가 구분 없이 마루에 앉아 같이 밥을 먹었다. 추운 겨울에는 우리 집 안방에서 우리 식구들과 같이 이불 속에 발을 묻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함께 수박을 사다 먹었고, 비닐 끈으로 묶은 얼음덩어리를 사 와 깨 먹었고, 그 얼음에 잰 수박화채를 먹었다. 반찬이 나쁘다고 화를 냈고, 하숙비를 제때 내지 않았고, 화장실을 더럽게 썼다. 아주 간혹 여자 하숙생이 들기도 했다. 술집 나가는 여자는 낮에는 자고 밤에 출근했다. 나와 내 형제들은 그 술집 나가는 여자의 아들을 밤마다 데리고 놀아줬고, 그 아이는 밤늦어도 돌아오지 않는 엄마 대신 우리와 같이 잤다. 새벽이면 어린 고시생은 잠들지 못하고, 방의 벽을 뚫었다. 집요한 끈기로 구멍을 냈다. 옆방의 여자를 훔쳐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있다. 하숙을 치는 내 엄마. 하숙은 고된 노동이었다. 요즘처럼 공동 식당이 있는 하숙집이 아니었다. 한 방 한 방, 다 상을 차려 날라야 했다. 한 방 한 방, 다 연탄을 갈아줘야 했다. 빨래도 해줘야 했다. 그래서 내 기억 속에는 오직 일만 하는 어머니. 그리고 몇 명의 식모 아줌마. 그중 한 아줌마는 욕을 잘해서 ‘조자바리 아줌마’라고 불렀었다. 그런데 ‘조자바리’는 무슨 뜻이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노동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엄마는 빚을 내서 식모를 두었다. 그래서 식모 아줌마는 을이 아니라 갑. 갑인데 그냥 갑이 아니라 우리 식구인 갑. 이모, 큰이모 같은 갑. 김밥도 같이 말고, 소풍도 같이 갔던. 그리고 또 여자들이 있었다. 엄마가 힘들 때마다 우르르 달려오던 네 명의 고모들, 큰엄마, 작은엄마, 두 명의 이모와 외숙모. 그야말로 군대처럼 진군해오던 여자들. 그들이 추운 겨울밤에 입김을 뿜어내며 담그던 김장. 하숙집 김장은 단순한 김장이 아니었다. 백 포기 이백 포기 삼백 포기 쌓아 올리던 배추. 그러면 그 옆에 슬쩍 주저앉아 같이 소를 넣던 술집 나가던 진동이 엄마.


‘마마 블랑카’의 기억을 이야기하지 않고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누구나 마찬가지로) 어찌나 애틋한지 아무 데서나 꺼내놓고 싶지 않다. 그런데 마마 블랑카가 그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맙소사, 마마 블랑카. 당신은 내 할머니예요? 물어보고 싶어지는.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맙소사, 마마 블랑카. 당신은 혹시 나예요?


이전까지 테레사 데 라 파라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베네수엘라의 여성 작가라고 했고, 남미의 여성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책을 펼치기 전에 먼저 남미 문학, 혹은 남미 혁명에 빠져 살았던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백 년의 고독》, 《거미 여인의 키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마리오 바르가스요사, 옥타비오 파스…… 뿐인가.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그러고 보니 이들은 다 남자들. 훌륭하고 끝내주지만, 그래봤자 남자들. 《마마 블랑카의 회고록》에는 여자들이 나온다. 자매들, 그리고 엄마. 그들의 세계는 아직 남자들이 지배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빛을 뿜어내는 것은 여자들이다. 아직은 무엇을 해야 할 줄 모르는 여자들, ‘지배당하는 세계’에서 안전함을 느끼는 여자들……. 그러나 그들은 본능적으로 진짜를 알아본다. 여자들과 약자들. 삶을 바닥에서 살아내는 사람들. 아마도 죽는 날까지 그러할 사람들. 그래서 싸울 힘이, 싸워야 하는 힘이 익살이 되거나 시가 되어버린 사람들. 그리고 그들 곁에서 아이의 시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다.


이 아이는 커서 그 무엇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래봤자 ‘여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군대처럼 진군하는 여자들의 한 명이 될 것이고, 약자들의 삶 속에 깃들어 있는 그 빛나는 캐릭터들을, 그 캐릭터의 아름다움을 폭죽처럼 터뜨려 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는 마침내 할머니인 마마 블랑카가 될 것인데, 마마 블랑카는 어쩐지 다시 나, 아주 오랜 시절의 어린 나인 것도 같다. 폭죽처럼 터지는 삶의, 빛나는 어떤 순간의 나, 아이에서 할머니가 되는 나.

김인숙 |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펴낸 책으로는 소설집 《칼날과 사랑》,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안녕, 엘레나》, 《단 하루의 영원한 밤》, 중편소설 《벚꽃의 우주》, 장편소설 《’79~’80 겨울에서 봄 사이》, 《꽃의 기억》, 《봉지》, 《소현》, 《미칠 수 있겠니》, 《모든 빛깔들의 밤》, 《더 게임》, 산문집 《어느 봄날, 아주 따듯한 떨림》, 《1만 1천 권의 조선》 등이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이수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마마 블랑카의 회고록
테레사 데 라 파라 | 엄지영 옮김

베네수엘라 최초의 위대한 여성 작가이자 가장 탁월한 라틴 아메리카 여성 작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테레사 데 라 파라의 대표작. 국내 초역. 일흔다섯 살의 할머니가 눌러쓴 회고록이자 지금은 사라진 보물 같은 낙원으로서의 어린 시절과 베네수엘라 농장 사회의 아름다운 세계를 시적인 문체로 그린 소설이다. 마마 블랑카가 들려주는 조곤조곤하지만 유머러스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삶의 무한한 지평을 열어주는 ‘이야기 박물관’의 역할을 한다. 베네수엘라를 넘어 범세계적인 고전으로 자리 잡은 작품.
독서모임 지원 이벤트
신청 자격: 최소 3인 이상의 회원으로 구성된 독서모임
신청 기간: 8월 17일(목) ~ 8월 23일(수)
신청 방법: 네이버 폼으로 지원서 작성 후 제출
지원 내용: 최대 10팀(한 팀당 최대 10권)

⭐️ 한 팀에서 한 권의 활동 도서만 선택가능.
⭐️ 당첨 여부는 23일 이후 개별 연락.

📌 활동 내용
① 활동 도서 중 한 권을 선택 후 한 달 이내 독서 모임 진행
② SNS에 자유롭게 인증샷 및 해시태그 달아주시면 완료.

⭐️ 도서는 9월부터 순차적으로 발송.

📌 활동 도서(택1): 《도련님》,《사라진 모든 열정》, 《4월의 유혹》, 《마마 블랑카의 회고록》, 《불쌍한 캐럴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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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첨자는 다음 호에서 발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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