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에게,

너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 계속 그렇게 생각은 해왔지만, 날리는 눈송이를 보고서 더는 미룰 수가 없었어. 나는 요가를 하러 간 김에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곤 하는데, 그저께는 요가원을 나오니까 뭔가 부스러기 같은 게 떨어지더라. 그걸 눈이라고 불러도 될까? 부스러기는 땅에 닿는 순간 사라졌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후들거리는 팔로 카트를 밀면서 토마토와 달걀과 숙주를 담았지. 나는 할인 코너는 전부 기웃거리는 편이라 산 물건에 비해 오랜 시간이 걸렸어. 장바구니를 한쪽 어깨에 메고 마트 밖으로 나왔을 때 부스러기는 아직도 흩날리며 내 시야를 어지럽혔어. 하지만 여전히, 땅에는 아무 흔적도 없었어.

너에게 안부를 묻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날들이야. 꼭 거짓말 같지 않아? 나는 우리가 했던 일들이 돌판에 글씨를 새기듯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었는데. 우리는 거리로 나가 목소리를 높였고, 법을 바꿨고, 무엇보다 서로의 생각을 바꿨었잖아. 그런데 이제는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모든 게 소리조차 없이 사그라드는 기분이 들어. 나라도 씩씩하지 않으면 더 분위기가 처질까 봐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이제는 너도 이 무력감을 느끼고 있을 거야. 그렇지?

 

어떻게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뉴스를 보지 않을 수는 없잖아. 양대 정당의 대선 후보 본인이, 그 가족이, 선거 캠프에 소속된 인물들이 쏟아낸 발언은 매번 다음이 더 충격적이라서 이전 걸 다 잊어버릴 지경이야. 저울질하기도 지쳐버렸어. 여성부는 남혐부니까 폐지해야 한다는 쪽과 선대위에 남혐 여혐 둘 다 싫어 위원회를 만든 쪽 중에서, 자신은 성범죄자 안희정의 편이라는 발언과 여자의 성기를 찢어버리겠다는 협박 사이에서 대통령 당선이 유력하다니. 유일한 여성 후보는 지지율이 오르지 않고, 두문불출하던 그가 다시 나와 고개를 숙였을 때는 정말 심장이 덜컹거렸어.

 

너도 봤어? 어느 여고에서는 학생들이 아무 연고도 없는 남자 군인에게 편지를 쓰도록 강요당하고, 그게 자그마치 봉사활동 취급을 받아왔대. 학교는 학생들이 스토킹 같은 피해에 노출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어. 이 행사에 반감을 느낀 용감한 학생이 시위하듯 불만을 담은 편지를 쓰기 전까지. 그래서 누군가 학생을 욕 먹이기 위해 온라인에 이 사진을 올리고, 학생이 디지털 성폭력을 비롯한 온갖 피해에 시달리기 전까지. 믿을 수 있어? 그 편지에는 욕설 한 마디 없어.

내가 번역한 <위안부는 여자다>라는 책에서 저자 캐롤라인 노마는 ‘위안부’라는 성노예제가 남성 연대를 다지는 수단이었다고 분석해. 생각해 봐. 군수 사업으로 막대한 돈을 버는 사업가 남자들이면 몰라, 총알받이로 나가 배급도 제대로 못 받는 하층 군인에게 과연 전쟁이 이득이었을까? 이 계급 차이를 눈속임해서, 남자들이 전부 ‘평등’하다고 믿게 하는 마법이 바로 성착취였어. 군인이기만 하면, 남자기만 하면 누구나 ‘위안소’에는 갈 수 있으니까. 마음대로 사용할 여자를 보상처럼 던져주면서 불만을 잠재우고 폭력성이 여자를 향하도록 굴절시켰던 거지. 노마는 현대의 성착취도 다르지 않다고 말해. 일본의 샐러리맨들이 과로사할 정도로 회사에 충성하는 것, 그건 ‘접대’라는 말로 보편화된 성착취 현상과 생각 이상으로 관련이 깊어.

 

내가 왜 이 얘기를 하는지, 너도 읽어내려가며 느꼈겠지. 지금의 한국과도 다르지 않잖아. 남자가 남자를 착취하면서, 착취당하는 쪽의 남자에게 ‘위안’이랍시고 여자를 던져주는 구조는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어. 그렇게 보면 ‘위문’ 편지라는 말도 의미심장하지. 아무리 희미할지라도 여기서도 여자는 보상이자 제물이고, 그래서 욕 한마디 없이 “열심히” 살라는 말뿐인 고등학생의 편지에 그렇게 광분해야 했던 거야.

 

누군가는 착취당하는 쪽의 남자에게 감정을 이입하겠지만 내게는 여자만 보여. 가장 밑바닥에 있는 남자라 할지라도 그 발밑에는 여자가 있다고 하지. 여자가 마침내 몸을 일으키려 하는 지금 가장 밑바닥의 남자부터 벌컥 화를 내고, 위쪽의 남자는 그들의 비위만을 맞추려 노력해. 그러지 않으면 이 피라미드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 테니까. 여자는 안중에도 없지. 그러니까, 누가 이런 계절을 지나가는 우리에게 위문 편지를 써주겠어? 지금 우리에겐 그 누구보다 위로와 문안이 필요한데도.

내가 무엇에 위로받았는지를 너에게 들려주면 어떨까 했어. 나는 요새 미국에서 1960년대에 시작된 2물결 여성 운동에 참여했던 시인들의 시를 읽고 있어.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이 견디기 힘들어지면 나는 그때로 돌아가는 버릇이 있거든. 그건 60년도 전인 그때가 딱히 지금보다 좋은 시절이었기 때문은 아냐. 당시는 2022년의 여기와 쓰라릴 만큼 유사하지만, 당시의 여자들 역시 우리를 닮았어. 우리만큼 뜨겁고, 우리만큼 용감하고, 우리만큼 유쾌한 여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나는 다시 현재로 돌아올 힘이 생겨. 다시 나아갈 기력이 솟아. 내가 번역한 이 문장대로야.


“만약 여자의 저항이 인류 역사에 걸쳐 계속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여자들이 얼마나 강한 목적의식과 뿌듯함, 자부심, 방향성을 품게 될지 상상해보라.” - <여자는 인질이다>, p. 180

 그러다 제목부터 내 눈에 띈 시가 있어. <밥을 먹자 여자를 믿자eat rice and have faith in women>라는 시야. 나는 제목만 한참을 봤어. 너도 알겠지만, 시인이 태어난 미국은 우리처럼 쌀을 먹는 문화권이 아냐. 프랜 위넌트Fran Winant라는 시인의 이름을 봐도 동양계라는 힌트는 없었어. 그런데 왜 빵이 아니고 밥일까? 왜 밥을 먹고 여자를 믿으라고 했을까? 나는 그게 궁금해서 집중해서 읽기 시작했어. 여기 너도 같이 읽을 수 있게 시를 번역해왔어. 시는 이렇게 시작해.

 

밥을 먹자 여자를 믿자

내가 지금 모른대도

배울 수 있고

내가 지금 혼자래도

나중엔 함께일 것이다

내가 지금 약하대도

강해질 수 있다

천천히 천천히

내가 배운다면 남을 가르칠 수 있고

남이 먼저 배운다면

믿어야 한다

그가 돌아와 가르쳐줄 거라고

가버리지 않을 거라고

배운 지식을 갖고 멀리 떠나

가끔 편지나 써주진 않을 거라고

우리는 평생을 배워야 한다

여자로서 여자에게 받아 여자에게 넘기면서

말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그러고선 도구를 써보고

몸을 써보고

걸리는 시간만큼을 견디고

선생이 없거나

너무 멀 때는 책을 읽어서라도

우리 자신을 가르쳐야 한다

남들도 애쓰고 있음을 떠올리며

언젠가 우리가 함께할 거라고 믿어야 한다

충분한 걱정을 불러 모을 거라고

그래서 내가 혼자 싸워야 할 땐

자매들이 있어 줄 거라고

알기만 하면 싸워줄

나중에라도 편들러 와줄

자매들이 있을 거라고

(...)

 

나머지 시와 원문은 여기 올려놓았어. 읽어보면 알겠지만 실은 이 시는 끝까지 왜 쌀인지, 왜 밥인지를 설명하지 않아. 나는 뭐라도 건지려고 검색을 거듭했어. 시를 쓴 프랜 위넌트는 시집도 여럿 냈고, 레즈비언의 자긍심으로 여성 운동에 참여했으며, 파트너와 페미니즘 출판사를 운영했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기도 했대. 내가 읽고 있는 여러 여성 시인의 시를 모은 시선집에도 그런 이력이 적혀 있어. 그런데 그 외에는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아. 영어 위키피디아 페이지 하나 없고, 시집은 전부 절판이야. 위넌트가 어떤 행사에서 (이 시는 아닌) 자기 시를 읽는 영상이 유튜브에 하나 올라와 있는데, 조회수가 얼만 줄 알아? 44회야, 44회!

 

다들 이 시를 잊고, 시인을 잊었나 봐.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시인이 살아있다면(살아있는지조차 모르겠어) 끝없이 가라앉는 기분이지 않을까? 땅바닥에 흰 기색조차 남기지 못한 눈송이처럼 말이야. 아니, 이렇게 좋은 시잖아. 사전을 찾을 필요도 없이 가장 쉬운 단어로 썼는데도 울림이 있고, 내 머릿속에서는 계속 그 짧은 구호가 맴돌아. ‘밥을 먹자 여자를 믿자.’ 멍하니 절망에 빠져서 이젠 뭘 해야 할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때, 당연한 답처럼 떠오를만한 문장인걸.

 

이렇게 된 이상 나는 나 좋을 대로 시를 해석하기로 했어. 나는 읽지 않은 책인데 페미니즘과 채식주의의 연관성을 분석한 <육식의 성정치>에서 3부 제목으로 이 시를 인용했대. 한국어 번역판 목차에는 “쌀을 먹는 것이 여성을 믿는 것”이라고 적혀 있어. ‘쌀’을 채식의 상징이라고 본 거지. 아마 그 해석이 더 시인의 의도에 가까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내 번역이 더 맘에 들어.

 

“밥은 먹었니?”

“언제 밥 한번 먹자.”

“내가 밥 사줄게.”

“밥심으로 사는 거지.”

“밥 먹듯이 네가 생각나.”

 

꾸준한 일상과 최상의 배려를 ‘밥’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우리잖아. 나는 힘을 내서 따끈한 쌀밥을 지어 먹고, 가끔은 바깥의 찬 기운을 머금고 들어온 네게 얼른 밥을 차려주고, 그러고 나면 밥을 먹듯 여자를 믿기로 해. 내가 지금 혼자처럼 느껴져도, 어딘가에는 같이 괴로워하는 네가 있을 테니까. 우리가 지금 약하더라도 우리는 강해질 수 있으니까, 천천히 천천히.

 



 

쌓이는 눈송이와 쌓이지 않고 사라지는 눈송이는 대체 뭐가 다른 걸까?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언덕을 오르며 골똘히 고민했어. 세상을 바꾸는 일을 눈에 비유한다면, 나는 쌓이는 눈송이일까 아닐까?


이 편지는 <별세계에서 온 편지>라는 이름으로 나갈 거고, ‘별세계’는 내가 오래 준비한 출판사의 이름이야. 등록을 한 게 2020년 8월인데 이제야 너에게 보여줄 만한 일을 하고 있네. 곧 있으면 이 출판사에서 내가 쓴 책을 첫 책으로 내려고 해. 2년 넘게 걸려 썼고, 내 일생을 재료로 썼고, 세상을 바꿀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쓴 책이야. (편지가 너무 길어지고 있어…. 아마 책 얘기는 나중에 더 자세히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당연히 쌓이는 눈송이가 되고 싶어. 내가 낼 책이 눈이라면 폭설 주의보가 내릴 정도로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고 싶어. 잊히는 게 아니라 영원히 기록되고 싶어. 하지만 내가 아무리 간절히 바란들 그러지 못할 수도 있겠지. 내가 본 눈송이처럼 그저 부스러지고 말 수도 있을 거야.

 

그래도 내가 절망하지 않고 나아간다면, 눈송이를 관찰하며 배운 게 있어서일 거야. 첫 번째로 쌓이는 눈송이가 흰 자국을 남기는 건 걔가 뭐가 달라서가 아냐. 계속 자세히 보니까 그래.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던 부스러기가 계속 땅을 적시고 온도를 내린 후 마침내 어느 순간에야 눈은 쌓이기 시작하는 거였어. 그런 의미라면 나는 쌓이지 않는 눈송이여도 좋아. 내가 소리 없이 지더라도 훗날엔 다른 여자가, 네가 와주기만 한다면.

 

어쩌면 할머니가 되었을 시인도, 프랜 위넌트도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지 몰라. 어떻게 알았겠어? 상식적으로는 알았을 리가 없겠지. 몇십 년 후에 지구 반대편의 어느 나라에서 누군가 자기 시를 읽고, 번역하고, 편지에 써서 보낼 만큼 감동했을 거라고는, 그것도 쌀이라는 단어를 이렇게나 제멋대로 해석해버릴 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을 거야.

 

그렇지만 나는 시인이 조금은 알았으리라는 의심이 들어. 시에 나와 있잖아. “나중에라도 편들러 와줄 / 자매들이 있으리라고” 많이 나중이지만 나는 시인의 편을 들러 이렇게 왔어. 먼 훗날에도 분명 우리의 편을 들러 와줄 여자들이 있을 거야. 그게 나에게는 이 기후에도 절망하지 않을 이유야.

 

그 이전까지는 우리 서로에게 편지를 쓰고 안부를 묻기로 해. 하지만 시에서처럼 멀리 떠나가 가끔 편지나 써주는 게 아니라, 편지‘도’ 쓰는 걸로. 우리에겐 아직 할 일이 많잖아.

 

그러니까 우리 밥을 먹자, 여자를 믿자.

 


2022년 1월 28일

너를 믿기로 한 혜담으로부터.

 

 


추신 1.

밥 얘기를 했으니까, 진짜 간단하게 해 먹을 수 있는 요리 한 가지를 알려줄게. 재료를 다 때려 넣고 전기밥솥 취사 버튼만 누르면 끝이야. 이름은 초간단토마토밥이라고 하자.

먼저 종이컵 한 컵 정도의 쌀을 씻고, 솥 안에 잘게 썬 양배추(가로세로 1cm 정도면 돼) 1/4통과 참치 한 캔, 칼집 낸 토마토 2개를 아무렇게나 올려. 물의 양은 쌀과 1:1로 잡아. 올리브오일 한 숟갈과 케첩 한 숟갈, 굴 소스 두 숟갈을 뿌려주고 평소처럼 밥을 해. 취사가 끝나면 토마토를 주걱으로 쓱쓱 으깨서 뒤섞어줘. 밥솥에 30분 정도 내버려 두면 더 맛이 좋지만, 배가 고프면 바로 먹어도 괜찮아. 다 된 밥에는 치즈나 계란후라이를 올려도 맛있을 거야.


나는 이 레시피를 셀 수 없이 변형해봤어. 참치 대신 냉동 고등어나 연어를 넣어보기도 했고, 케첩이나 굴소스 대신 치킨스톡이나 쯔유나 각종 맛내기 소스를 넣어봤고, 각종 허브를 뿌려보고, 캔 옥수수를 넣고, 심지어 김치를 썰어서 넣어본 적도 있어! 계량도 안 하고 실험하듯 아무렇게나 재료를 섞기도 했지.


그래도 그저 맛이 조금씩 달라질 뿐 이 요리는 항상 넉넉하게 날 받아줬어. 도저히 제대로 된 요리를 해먹을 시간이 없을 때도 밥솥 가득 토마토양배추밥을 해놓으면 매끼 따듯하고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었거든. 반찬 걱정 없이 식이섬유와 단백질까지 한 번에 챙길 수도 있고.


너에게도 이 레시피가 급할 때 믿을 구석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에 덧붙인다.



 

추신 2.

이 편지를 재미있게 읽었다면 다른 친구들에게도 추천해줄 수 있어? 이 링크를 공유하면 돼. (https://stib.ee/tWg4) 출처만 밝힌다면 얼마든지 일부 혹은 전부를 옮겨도 좋아. 그리고 혹시 편지에 담았으면 하는 내용이나 고민이 있다면 sistarly@kakao.com으로 메일을 보내줘. 맨 아래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공개 게시판에 써줘도 좋지. 내가 해결해줄 수 있다거나 전부 답장해주겠다는 비현실적인 약속은 못하지만, 그래도 잘 참고해서 더 좋은 편지를 써볼게.




추신 3.

이렇게 편지를 끝내기는 아쉬우니까 마지막으로 내가 한 달 동안 읽은 것, 본 것, 참여한 것, 좋았던 것을 나눠볼게.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남대문 시장에서 국수집을 하시는 손정애 씨를 인터뷰한 경향신문 기사야. 여자의 생애를 남자의 방해 없이 서술하기란 언제나처럼 어렵지만, 그럼에도 파도와 맞서는 꿋꿋한 삶의 태도를 꼭 배워보려고. 노인세대 여성들에게 명함을 찾아주겠다는 기획 의도도 너무 마음에 들어.

"여가부 폐지론이 보여주는 것... 신성한 빵을 구워도 마녀로 몰린다":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집을 지은 마녀 알지? 그 마녀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여가부 폐지 공약 비판으로 나아가는 너무 흥미로운 한국일보 칼럼이야.

"위문편지 논란에…'편지 찢는 여자들'이 등장했다": 고작 시키는대로 편지를 썼을 뿐인 여자 청소년에게 비판과 공격이 쏟아지는 야만적인 분위기가 막막했겠지만, 아직도 누군가는 분노하고 싸우러 거리에 나가. 편지를 쓴 학생이 볼 수 있도록 해당 여고에도 응원하는 현수막을 걸었대.

[유]례없는 여혐 대선에 [권]리를 찾아 [자]발적으로 모인 여성들: 줄여서 '유권자', 정치판 사람들은 다들 잊고 있는 것 같지만 여자도 같은 한 표를 지닌 유권자가 맞아. 그걸 보여주기 위해 이 연서명에 참여해보는 건 어때? 몇 가지 정보만 입력하면 돼. '유권자' 트위터 계정에는 대선 후보들의 여성 정책을 비교해둔 이미지도 있으니 체크해봐.

여고추리반2가 티빙에 공개되기 시작한 거 알고 있어? 이미 여고추리반1을 보면서 출연자 모두에게 정이 들어버려서인지 벌써 지난 시즌보다 더 재밌는 느낌이야. 난 3화를 보고 있는데, 불법촬영을 한 교직원에게 분노하는 학생들을 소재로 넣은 것에서 세심함을 느꼈어.

극락왕생 연재 재개 소식도 빼놓을 수 없지! 관음처럼 익숙한 불교 인물을 비롯해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여자인 만화인데, 난 딜리헙에서 연재될 때부터 매화를 결제해 읽고 단행본도 다 살 만큼 이 만화를 좋아해. 모든 일에 항상 지나치게 열심인 도명이가 내 '최애캐'야. 원래 흑백 만화였던 극락왕생이 더 접근성이 좋은 카카오페이지에서 아름다운 올컬러로 처음부터 다시 풀리고 있어. 8화까지는 무료고 이후에도 '기다리면 무료' 제도로 볼 수 있지만, 아마 너도 나처럼 기다릴 수 없을 거야. 



추신 4.
이 편지에 담은 그림과 글씨는 전부 동생이자 동지인 윤희가 만들어주었어.



그럼 이젠 진짜 안녕!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설 보내길 바라. 다음달에 다시 편지 쓸게.

별세계 (대표: 유혜담)
sistarly@kakao.com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