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변하지 않을 가치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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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1. 18(금)

<아트앤팁> 36호

안녕하세요.

이장훈입니다.

살면서 학생 때가 좋았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저는 옛날에도 학생이었고, 지금도 학생이고, 미래도 학생이라 여겨서 딱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지만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 사회인이 되고 보니 아무 것도 신경쓰지 않고 공부만 할 수 있던 때가 가장 마음이 편했다는 것을 이제 알겠다는 의미죠. 비단 학생과 직장인의 비교가 아니라 직장인으로만 한정해서 봐도 그렇습니다.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하는 것보다 어렵고 오래 걸려도 하나의 프로젝트를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군대에서 군탈체포조로 활동했습니다. 작년에 인기가 높았던 넷플릭스 드라마 <D.P> 속 D.P였습니다. 지금은 많이 감소했지만 그때만 해도 1년에 탈영병이 평균 1,500명이나 되었죠. 그래서 체포요원 한 사람당 맡은 탈영병이 동시에 2, 3명이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하루는 헌병대장실에 들어가서 문책을 받았는데 그 때 대장님 말씀이 아직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대구 사람 특유의 사투리로)이장후이는 한 번에 일 하나만 맡으면 120% 해낸단 말이야. 근데 거기에 자그마한 일 하나만 더 얹어주면 둘 다 60% 밖에 못해. 전투복으로 환복하고 당분간 잡초나 제거해. 넌 자격없어. XX야.”

식은 땀을 흘리며 질책을 받고 있는 중에도 속으로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 저 양반 또 시작이구나’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저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저를 아주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여러 경험을 겪으면서 보니 맞는 말이긴 하더라구요.

이것을 깨닫고 난 후부터 저는 일을 동시에 잘하려고 애쓰기보다 일의 순서를 정하는 데 더 집중했습니다. 동시에 모두 잘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순서를 매겨서 하나씩 일을 마무리하면 결국 다 잘 한 게 될 거란 생각이었죠. 그래서 지금도 발표나 토론 의뢰, 원고 요청 등의 일들이 들어오면 얼른 머리속으로 기간을 대충 따져봅니다. 하고 있던 일을 그 전에 끝낼 수 있는지, 같은 기간동안 겹치는 다른 일은 없는지 등을 시뮬레이션합니다. 괜찮으면 수락하고 불가능한 기간이면 거절합니다.

한 번에 두 가지 이상을 잘 해내는, 즉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사람이 부럽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면 최소한 ‘빵꾸’는 안난다는 생각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과부하가 걸릴 때는 어떻게 해결하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일단 저도 이렇게 여기고 있습니다만, 너무 과부하가 걸릴 때는 ‘아휴~ 무슨 나라 구하는 일도 아니고’라는 생각으로 너무 몸이 축나지 않게 대처하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장훈 드림

이응노, 고전에서 변하지 않을 가치를 찾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면 어느 시점에서부터 표정이 온화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강렬했던 바로크적인 빛이 따스한 조명으로 바뀌고, 자신감에 차있던 표정도 세상 모든 일을 포용해줄 것처럼 인자하게 바뀌었습니다. 이 변화의 시점은 렘브란트가 야심차게 준비한 <야간 순찰대>가 세상의 온갖 비난을 받게 되고, 같은 시기에 부인은 세상을 떠난 때였죠. 이 때를 기점으로 그의 자화상은 이전처럼 화가로서 성공하기 위해, 혹은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그렸다기 보다는 담담하게 ‘나는 그래도 화가다’를 되뇌이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인생에서 사람이 의도치 않게 바닥까지 내려가게 되면 두 가지의 행동 양식을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끝까지 부정하고 과거에 머무르는 사람과 자신에 대해 되돌아보고 정체성을 다시 찾아가는 사람으로 말이죠. 여기에 비추어보면 렘브란트는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이런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을 과시할 때 사용되었던 장식들을 모두 걷어내고 본질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잘 나갈 때는 나를 대변해주는 세속적인 것들이 많았지만 이것들이 모두 사라진 이제는 ‘나는 누구인가’를 떠올리며 오히려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게 되죠. 이런 때일수록 흔들리지 않는 가치, 절대 변하지 않을 행복을 찾게 됩니다. 자신이 바닥까지 내려오게 된 게 의도치 않은 세상의 풍파일수록 그러합니다.

이응노는 1967년에 동백림 사건에 휘말리면서 투옥되었습니다. 납북되었던 아들을 만나러 당시 동독 영토였던 동베를린에 갔다가 간첩 누명을 쓰게 된 겁니다. 전혀 예상할 수도 없이 세상의 풍파에 휘말리게 된 그는 감옥에서 예술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때부터 이응노는 이전보다 더욱 고전을 추구했습니다.

프랑스에 건너가서 처음 10년 동안에는 서양미술의 조류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예술을 펼치려 했다면, 수감시절 이후에는 상형문자, 한자의 전서와 예서, 훈민정음의 판본체 등을 자신의 회화에 녹이려 했습니다. 트렌디한 것보다 변치 않을 미적 가치를 찾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옛 것, 고전이야말로 세상의 조류에 신경쓰지 않고도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죠. 지난 주에 발표했던 논문은 수감시절을 기점으로 보이는 이응노 회화의 변화, 그리고 서예와의 영향관계를 주제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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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씨네마인드>를 보고

우연히 유튜브에서 <지선씨네마인드>라는 프로그램을 접하고 꾸준히 즐겨보고 있습니다. SBS에서 매주 금요일 밤에 하는 프로그램인데 <그것이 알고싶다>의 외전 성격입니다. 원래는 <그것이 알고싶다> 유튜브 채널에서 담당 PD와 박지선 범죄심리학 교수가 영화를 소재로 한 영상이었다가 반응이 좋아서인지 9월부터 공중파 프로그램으로 방송하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의 주제는 범죄심리학자의 관점으로 본 영화 해석입니다. 아무래도 주로 범죄, 스릴러 영화가 주요 소재로 사용되지만 <위플래쉬>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처럼 범죄와 전혀 관련없는 영화도 있습니다. 범죄, 스릴러 영화의 경우는 특히 <양들의 침묵>처럼 웰메이드 영화일수록 범죄심리학자만이 볼 수 있는 디테일을 알 수 있어 또 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양들의 침묵>에서 시신 감식하는 장면에서 감식관들의 옷차림, 태도를 통해 저 인물은 직접 감식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식 경험이 없는 행정직일 것이다와 같은 얘기를 들 수 있습니다. 이건 소소한 예이고, 주로 주인공들의 심리, 영화 속 장면을 깊이 있게 분석해줘서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 해줍니다.

흥미로웠던 것은 <위플래쉬>였는데 이 영화는 본래 ‘예술은 가볍고 즐거워야 한다’와 ’예술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에 대한 감독의 고민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지휘자로 나오는 인물이 워낙 괴팍하고 극단적인 언행의 소유자로 묘사되긴 했지만 대체로 이 고민 속에서 영화가 소비되어 왔죠. 결국 음악 영화로 귀결됩니다.

그런데 박지선 범죄심리학 교수는 가스라이팅이라는 범죄의 영역으로 이를 끌고와서 색다른 해석을 소개해줍니다. 괴팍한 지휘자가 본격적으로 주인공을 가르치기 전에 잘 챙겨주는 교수처럼 “아버지는 뭐하시냐”, “어머니는 뭐하시냐” 등을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를 두고 박지선 교수는 “내가 이 사람한테 해를 끼쳤을 때 내가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지 미리 캐는 거다”라며 심리적 지배대상을 물색하는 과정으로 설명했습니다.

박지선 교수는 이를 설명하며 <부산 엄궁동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린 두 사람이 21년동안 수감되었던 사건을 예로 들었습니다. 두 분이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경찰의 증거 조작과 고문에 의한 자백 강요가 밝혀진 사건입니다. 이 분들이 당시에 조사를 받을 때 경찰 조사관이 이 분들에게 “혹시 집안에 공무원이 있냐”는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해를 끼쳐도 되는 사람들인지 아닌지를 우선 파악한 거죠.

<지선씨네마인드>는 영화 하나를 두고 다른 관점과 해석을 볼 수 있어 매번 감탄하면서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영화에 대한 해석은 영화평론가들의 영역이었는데 전혀 관련없는 분야의 전문가의 관점이 영화를 더욱 즐겁게 해줘서 좋았습니다. 예전에 말씀드렸던 잡지 준비에도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미술작품을 둘러싼 다른 분야 전문가들의 해석을 담는 잡지를 말이죠. 머릿속에서 이게 과연 실현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늘 있었는데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p.s.

<지선씨네마인드>는 프로그램 성격상 잘 만든 영화들을 소재로 삼아야하기에 대부분 과거에 봤던 영화들이지만 이렇게 보니 새로 보는 느낌도 나서 좋습니다. 강추입니다. 그리고 <지선씨네마인드>라는 중의적인 제목이 감탄을 자아내게 하네요. ‘(박)지선 (교수의) 씨네 마인드’도 되고, ‘지선씨네 마인드’도 되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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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미술사 1년 넘게 연구했죠. 전시회 본 빈미술관장도 '엄지척'"

1. 5만4000여 명. 지난달 25일 개막 이후 이날(17일)까지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전시를 찾은 관람객 수다. 개막 이후 불과 한 달도 안 돼 세운 대기록이다. 하루 2000명 넘는 인파가 몰리자 박물관 측은 지난 14일부터 반드시 사전예약을 거쳐야 전시를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2. 작품이 워낙 좋긴 하지만, 수준 높은 전시 구성·디자인이 전시의 품격을 한 단계 더 높였다는 게 관람객들의 평가다. ‘원조’인 빈미술사박물관의 사비나 하그 관장조차 전시장을 직접 둘러본 뒤 “빈미술사박물관 소장품의 해외 전시 중 사상 최고”라고 극찬했다. 이번 전시는 양승미 학예연구사와 이현숙 디자인전문경력관 중심으로 마련되었다.

3. 개막 기자간담회가 열린 지난달 25일, 전시장에서 양승미 학예사의 설명을 듣던 윤성용 국립박물관장이 수행 직원에게 넌지시 물었다. “양 학예사가 오스트리아 미술사 전공이었나?” 인터뷰 자리에서 뒤늦게 이 얘기를 전해 들은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제 전공은 러시아 미술입니다. 학부 전공도 노어노문학과를 나왔고요. 그래서 전시 준비를 위해 1년 넘게 공부했습니다.”

4. “합스부르크 가문을 제대로 조명하려면 유럽 전체 역사와 미술사를 꿰고 있어야 하는데, 이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페르디난트’라는 이름의 동명이인은 왜 이리 많은지 원망스럽기도 했죠. 전시 작품 실사와 자료 조사를 위해 오스트리아를 두 번 다녀오고 나니 비로소 감이 좀 잡히더군요. 다른 박물관에 있는 작품 딱 한 점을 보기 위해 왕복 10시간 기차를 타기도 하는 ‘빡센’ 출장이었어요.”

5. 전시 구성에는 빈미술사박물관의 적극적인 자료 협조도 큰 도움이 됐다. 이 전문관은 “빈미술사박물과 수백 통에 달하는 메일을 주고받았는데, 매번 바로바로 답이 왔다”

6. 이번 전시의 평균 관람 시간은 한 시간 이상. 비슷한 급의 다른 걸작전들과 비교해도 이례적으로 긴 시간이다. 작품 설명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거나, 비치된 헤드폰을 끼고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오랫동안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객이 많다.

7. 이번 전시에서 가장 내보이고 싶은 공간은 어딜까. 이구동성으로 “꽃 방”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15~16세기 유럽 미술의 ‘대세’였던 플랑드르 회화의 정수를 모은 작은 방이다. 양 학예사는 “생화와 조화를 섞어 꽂은 꽃병을 통해 플랑드르 ‘꽃 정물화’의 특징을 강조했고, 이 공간에서 동·서·남·북 어디를 바라보든 각기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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