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개편을 하고, 구독자님들의 피드백을 받아서, 이번호에 싣게 되었어요.
큐앤에이 글을 보내주신 애독자님들과 풋노터스 픽에 글을 보내주신 충북교육도서관 애독자님께 큰 절을 올립니다. 🙇‍♀️
만나지 않았는데 만난 듯하고, 동그마니 둘러앉아 같이 수다를 떤 것처럼 속이 따스합니다. 
아니, 이 얘기를 하며 왜 눈이 시큰한 걸까요... (대문자 F에 볼드체 팔랑) 
(왜 뜬금없이 눈이 시큰해? 어제 잠을 못 잤어? 라고 반응하는 사무실 내 T들) 

기초수급생활자로 살아온 97년생 저자 안온은 '요즘' 가난이 어떤 모습인지 일인칭으로 써 내려갑니다. 거침없이, 그러나 신중하게 쓰인 『일인칭 가난』 출간 전 연재를 시작합니다. 11월 출간 예정이에요.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화 피아노


피아노는 희한하게 부의 상징이면서 가난의 상징이다. 부잣집에는 없으면 이상하고 가난한 집에는 있으면 이상한데, 후자의 경우 코딱지만 한 집에 코끼리만 한 피아노가 들어간다는 것과 기십만 원이 없어서 절절매며 사는데 기백만 원짜리 가재를 두드리며 산다는 것이 너무 아이러니해서 이상하다. 어쨌거나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은 가난한 집의 피아노다.

  공공임대주택에 들어가 여생을 살길 바라는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 속 엄마는 하잘것없이 어느 아파트 모델하우스 경품 추첨에서 1등에 당첨돼 400만 원 상당의 피아노를 받는다. 제세공과금을 낼 돈이 없지만, 엄마는 언젠가는 피아노를 갖고 싶었다며 해맑게 좋아한다. 그리고 1년 뒤, 90만 원에 피아노를 판다. 월세를 낼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두가게를 해서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도도한 생활」°°의 엄마는 큰맘 먹고 둘째 딸을 위해 피아노를 산다. 세월이 지나 가세가 기울어 피아노를 팔자고 딸들이 성화해도(80만 원을 쳐준댔다) 엄마는 팔지 않고, 반지하에 사는 딸들에게로 보낸다. 딸들은 피아노를 이고 산다.

  

  항시 팔릴 위기에 있는 가난한 집의 피아노가 우리 집에도 있었다. 크기로 보나 입성으로 보나 우리 집과 어울리지 않았던 피아노는 할아버지의 통 큰 선물이었다. 없는 살림을 쥐어짜 피아노학원에 보내놨더니 또래 중에서는 실력이 꽤 빨리 늘어 덜컥 콩쿠르 준비를 하게 된 것이 이유라면 이유,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들뜬 내가 기특하고 안쓰러웠는지 엄마가 할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부탁했다. 손녀를 제 아들에게서 구제해줄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대신 피아노를 구해주었다.

  매일 정성스레 피아노를 닦아가며 연습한 아홉 살의 나는 전국 초등학생 콩쿠르대회에서 3위에 입상했다. 그 뒤로 피아노는 완벽한 내 보물이 되었다. 누구와도 나눠 쓰지 않아도 되어서 더 좋았다. 피아노학원을 그만두게 된 후에도 아빠가 술에 취해 거실에 널브러져 있지 않은 날에는 계란을 쥔 듯 둥글게 모양 잡은 손을 피아노 건반 위에 올리곤 했다.


어느 날 저녁 아빠가 외출한 틈을 타 피아노에 앉으려는데, 엄마가 급히 내 손을 낚아채더니 현관 밖으로 나섰다. 도착한 곳은 근처 지구대였다. 외상이 밀린 술집에서 또 술을 마시고 패악을 부린 아빠가 지구대 한구석의 의자에 눕다시피 앉아 있었다. 수치심을 모르는 불콰한 얼굴. 엄마가 내 손을 놓고 아빠를 부축했다. 아빠는 발을 끌었고 엄마는 몸을 휘청거렸다. 오직 나만 똑바로 걸었다. 수치심에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간밤의 해프닝을 뒤로하고 다음 날 학교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피아노가 사라지고 없었다.  몸집 큰 가구가 있었다는 과거를 증명하듯 뭉실뭉실 먼지들만 날아다녔다. 그 좁은 집에서 피아노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는 건 기괴한 짓이라 눈만 뻐끔거리며 망연히 집을 둘러보았다. 텔레비전이 없었다. 부엌 가스레인지 위에 늘 있던 곰솥도 없었다. 엄마가 가끔 팝송 테이프를 틀던 카세트도, 엄마의 화장대 구실을 하던 의자도 없었다.

  어린이집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있던 엄마가 집으로 돌아와 울고 있던 날 토닥이며 안아주었다. 엄마도 드문드문 우는 것 같았다. 소리 나는 물건이 증발한 집 안은 적막했다. 늦은 새벽, 집에 돌아온 아빠의 신발 벗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알코올향이 역한 아빠의 신음은 어제도 그랬듯 우리를 울렸다. 다음 날, 엄마가 어찌어찌 텔레비전은 찾아왔으나, 의자와 카세트는 찾지 못했다. 최상급 중고였던 내 피아노는 진즉 팔렸다고 했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러 전자피아노를 산 나는 왕년에 전국 3위를 거머쥐었던 경연곡을 연주하며 날 위로하는데, 가끔은 건반 위 손끝이 선득해진다. 내가 아홉 살에서 한 치도 자라지 못했을까 봐, 영원히 자라지 못할까 봐.



° 이주란,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 『제8회 문지문학상 수상 작품집』, 문학과지성사, 2018.

°° 김애란, 「도도한 생활」, 『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



지은이 안온

가난하고 지난한 날에서 지나간 불온을 기록하는 사람. 나의 불온한 나날에 대한 기록이 당신의 생을 안온하게 덥히는 땔감이 되길 바랍니다.

번하다(‘번연하다’의 본말)

[1] 여두운 가운데 밝은 빛이 비치어 조금 환하다.

[2] 어떤 일의 결과나 상태 따위가 훤하게 들여다보이듯 분명하다.

[3] 잠깐 짬이 나서 한가하다.

[4] 장마가 잠시 멎고 해가 나서 밝다.

[5] 병세가 조금 가라앉다.

[6] 바라보는 눈매가 뚜렷하다.

[7] 걱정거리가 어지간히 뜨음하다.

[8] 거리가 가깝게 뚜렷하다


“사랑한다는 그 거짓말이 거짓말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아니 거짓말이어도 좋으니 누군가 나타나서 명화 씨, 당신이 좋다고, 심수봉 노래처럼 못 견디게 네가 좋다고 […]” 

— 공선옥, 가리봉 연가, 유랑 가족 (실천문학사, 2005), 64.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에 대한 답변
박정현 편집장님의 다음 책은 언제쯤 나오나요? ㅎㅎ 답변이 기다려집니다 +.+
이참에 소식을 전합니다. 이제 박정현 편집장입니다. 편집부의 일원으로 남아 있지만 편집장에서는 물러났습니다. 현재 서성진 에디터가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다음 책을 무엇을 쓸지는 정했습니다. 4.3그룹과 그들의 시대』로 제목을 정했습니다. 90년대 이후 한국 건축의 담론 지형을 장악한 4.3그룹과 동세대 건축가들을 본격적으로 다루려고 합니다. 차례도 정해져 있고요, 이제 쓰기만 하면 됩니다. 내년 출간 목표입니다!
출간 전 연재의 글도 마치 멸균된 것처럼 무해하고, 마음을 뜨뜻하게 채워 줍니다. 안온 작가님은 처음으로 책을 쓰시는 건가요? 마티는 어떻게 안온 작가님을 알게 되셨는지, 또 이번 책이 안온 작가님의 첫 책인지 궁금해요.
2년 전쯤일 거예요, 안온 님이 친구들과 함께 공저 원고로 투고를 하셔서 만나게 되었어요. 출판 가능성이 큰 원고는 아니었지만, 쓰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하신 것이 느껴져 응원도 드리고 좀 더 무르익은 후에 글을 쓰셔도 좋겠다는 조언도 드릴 겸 전화를 드렸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연이 이어져, 안온 님의 생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일인칭 가난'으로 글을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역제안을 드렸습니다. 이후 시간을 쪼개고 쪼개 글을 써서 보내주셨고, 서로 원고를 주고받으며 수차례 크고 작은 개고를 거쳐 여기까지 왔습니다. '일인칭 가난'은 안온 님의 첫 책이에요.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크 궁채 맛있죠 오독오독하니
궁채 좋아하시는군요! 서울 연희동에 있는 수유너머104에 저녁 강연을 들으러 가기 전, 맞은편 문김밥에서 끼니를 해결하곤 하는데요, 후후, 문김밥의 모든 김밥 메뉴에는 궁채가 들어가요. 오독오독, 맛있어요.
곧 가을입니다. 가을 산책 플레이스트 추천해주세요!
가을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많이 덥네요. 가을 플레이리스트는 다음 호를 기다려주세요.
' Gathering Words ' 코너..! 넘 좋네요..! 앞으로도 기대가 됩니다 :)
고맙습니다.🙇🏻‍♀️ 오늘은 ‘쀼죽쀼죽’과 ‘번연히’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뜻이 8개나 되는 ‘번연히’를 택했습니다. 쀼죽쀼죽은 느낌이 오시죠? 뾰족뾰족의 큰언니 느낌?!
  
❝ 충북교육도서관 애독자가 산 중고책 ❞

배수아 소설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비약하자면 독서모임 때문이었습니다. 독서 모임에서 제가 처음으로 발제를 담당하게 되어서 저는 정지돈 소설가의 에세이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책을 선정했습니다. 아무래도 처음이다 보니 부담이 많이 되더군요. 책도 거듭 읽고 출간 기념 인터뷰도 있길래 찾아봤습니다. 인터뷰 영상에서는 정지돈 님이 추천하는 3권의 책도 소개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배수아 소설집 이었습니다. 정지돈 님은 이 책을 읽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도 영상을 보고 있었으니 그 표정을 읽을 수 있었죠. 저는 이 책을 희망도서를 신청해서 읽었습니다. 과연 일반적인 한국소설과는 다릅니다. 출판사에서도 한국문학계의 낯선 존재라고 소개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무튼, 배수아의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지 생각하던 참에 들른 중고서점 서가에서 배수아라는 이름을 발견해서 구매했습니다.

배수아 님의 책을 우연찮게 손에 얻은 저는, 읽고 싶었던 책을 찾아서 구매하기보다는 서가를 둘러보며 새로운 책과 만나보자는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무릎을 굽혀야 하는 맨 아랫줄도 샅샅이 살펴보며 서가를 한 줄 한 줄 누비고 있었답니다. 중고서점의 특성상 서가의 있는 책들은 유명한 책 아니면 오래된 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독특한 책이 나오길 더 바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배수아 님의 책처럼 낯섦을 주는 책을 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저는 묘한 제목과 마주했습니다. 전자 시대의 아리아솔직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책을 펼쳐서 훑어 보니, 기호도 많고 일본어도 많고 글자에 ‘굵게’ 처리가 많이 되어 있는 등 실험적인 분위기가 압도적이라 구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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