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차오르는 공간에 대한 아버지와 두 딸의 글입니다.
2024.4.22. 열일곱번째 이야기
70대 아버지, 30대 두 딸이 함께 같은 주제로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
땡비에서 나눠볼 오늘의 이야기는 🐝생각하면 눈물나는 곳입니다. 이번 호는 편집하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쏟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각자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서 우리가 어떠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님도 오늘 땡비와 함께 왈칵 눈물을 쏟고 후련해지면 좋겠습니다. 💌

씩씩하게 웃고 있는데 눈물이 차올라(by. 아난)

 

회사에서 잘리면 가족에게 말할 수 있을까? 내 대답은 ‘아니요’였다. 엄마가 부산에서 멀리 서울까지 올라와 내 이사를 도와주고 내려간 다음 날이었다. 작은 여행사 스타트업을 다니고 있던 나는 부당해고를 당했다. 고민이 생기면 가족에게 실시간으로 주절주절 말하던 나인데 막상 그 상황이 되니 말문이 막혔다. 부산에 내려가 이사 뒤 고단한 몸을 풀고 있을 엄마에게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내 조언은 별 의미 없다. 이제 네 인생은 너 스스로가 더 잘 결정 내릴 거다.’라고 항상 선택을 지지해 주시던 아버지께 이런 망한 결과를 어떻게 알려드리겠는가? 공공기관을 박차고 나와 스타트업을 다니겠다고 했을 때는 당당하게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그러나 내가 박차고 나온 것과 잘린 것은 완전히 달랐다. 아무런 대안과 소속이 없는 상황에서 내가 가진 불안감을 가족들에게 알려 더 증폭시키고 싶지 않았다.


스타트업에 다닐 당시 내 통장에 찍히는 월급은 180만 원이었다. 회사가 아직 안정적이지 않아 연봉 인상 언급은 쉽사리 꺼낼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쫓겨나기까지 하니 ‘내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는가?’라는 질문이 나를 에워쌌다. 앞으로 박봉의 연봉 계약서를 가지고 안정적이지 못한 여러 기업을 전전하게 될까봐 걱정되었다. 밤에 누워 새하얀 새 집의 천장을 보고 있자면 온갖 결로 퍼져나가는 미래에 대한 고민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대망의 추석이 왔다. 백수가 되어 맞이하는 추석이라니! 2013년 취업한 이후 2번의 이직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연이어 출근하며 살아왔다. 강제로 휴식이 주어진 지금 서울에 혼자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무작정 부산으로 가서 엄마가 주는 과일을 먹으며 시간이 멈춘 듯 쉬고 싶었다. 부모님께는 연차를 오래 냈다 하고 2주를 부산에서 지냈다. 엄마는 "이렇게 휴가를 길게 내도 되나~ 니 잘리는 거 아니가"하며 농담을 던졌다. 겉으로는 "잘리긴 뭘 잘려~"라고 했지만 ‘엄마! 사실 벌써 잘렸어!’라고 속으로 답했다.


이런 상황을 마치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지켜보며 다 알고 있던 이가 있다. 바로 나의 혈육 자매님이었다. 부모님은 너무 걱정하실 것 같아 차마 말하지 못하고, 언니에게는 슬쩍 말해두었다. 혼자서 짊어지고 싶지만 현재 나의 상황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도 동시에 들면서 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긴 추석 연휴가 끝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날이 되었다. 부산역으로 언니네 부부가 태워준다고 했다. 기차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하여 부산역 주차장에 차를 대어 두고, 별 시답지 않은 농담을 던지며 시간을 보냈다. 언니도 나도 불안함이나 걱정은 감추고 애써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드문드문 무언가 씁쓸함이 새어 나오는 듯한 정적이 생겼다. ‘시간이 되어 가보아야겠다’고 나는 씩씩하게 인사를 하고 내려 기차를 향해 걸어갔다. 훗날 언니는 차에서 내려가던 내 뒷모습이 너무 슬퍼서 나를 보내고 나서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그 순간 우리는 담백하게 인사했지만 언니는 홀로 먼 서울에서 힘들게 살아나가고 있는 나를 걱정하고, 나는 언니에게 괜히 짐을 더한 것 같아 언니를 걱정하는 마음에 눈물이 흘렀다.


그래서 부산역은 내게 참 좋으면서 슬프고 아린 공간이다. 스무 살 처음으로 아무도 없는 서울에 올라와 사무치게 외로운 순간이 많았다. 그래서 첫 월급을 받고 연말정산을 했을 때 급여 담당 선배가 슬쩍 와서 물었다. “대중교통비가 이렇게 많이 나온 사람은 처음 본다. 도로에서 대체 뭘 하고 다니니?”라고 할 정도로 나는 부산에 갈 기회가 생기면 부산에서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서투른 운전에도 부산역까지 늘 나를 데리러 왔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아는 부산역 옆 길가에 엄마 차를 발견하면 볼살이 다 흔들리도록 뛰어가 엄마에게 안겼다. 서울로 돌아가야 할 때면 부산에서 있을 수 있을 때까지 지내다가 저녁 8시 반 넘어 기차를 타 서울역에서 막차 버스를 타고 신촌 집으로 와 짐을 풀었다. 부산역에 마중 나온 가족들과 헤어질 때면 웃는데 눈에는 눈물이 차올라 눈물을 닦으며 서울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멈춘 듯 부산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오니 다시 시간이 팽팽 돌아갔다. 내가 몸담았던 스타트업의 IT 팀장님께서 잠시 나를 프리랜서처럼 고용해 주셨다. 회사에서도 늘 나를 성장시켜 주시고 동기부여해 주시며 거둬준 IT 팀장님 덕분에 부당해고된 상황에서도 자책하거나 스스로를 할퀴지 않을 수 있었다. 독서실이 여러 개 묶인 것 같은 공유 오피스가 나의 새로운 근무지가 되었다. 나는 잠시 비를 피하는 백수지만 약속한 날에 성실히 출근했다. 동시에 다시 부산과 서울의 여러 기업에 서류를 넣고 면접을 하며 취업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던 12월 9일 박근혜 탄핵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는 방송을 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부산에 있는 한 회사에 최종 합격을 했다는 전화였다.


그렇게 나는 고향을 향하는 연어 마냥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삶의 터전이 부산이 된 요즘 부산역을 지나갈 때면 웃음이 슬며시 나온다. 치열했던 나의 20대가 휘리릭 재생된다. 그러다 기억 저 안쪽까지 들어가 보면 그때의 부산역 주차장이 떠올라 목에 울대를 차오르게 한다. 시커먼 언니네 차에서 내려 기차로 걸어가던 그 순간이 한 번씩 떠오른다. ‘와 여기서 그렇게 오갈 때는 부산에서 다시 살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인생은 어디로 흘러갈지 정말 알 수가 없다. 앞으로도 부산역을 수없이 오고 가겠지만 마음 한 곳에 묵직함을 안겨다 주는 이 기억들 때문에 부산역은 여전히 내게 참 좋으면서도 아린 공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문이 닫히고 나면(by. 흔희)

결혼한 지 7개월 만에 아이가 찾아왔다. 10개월을 뱃속에 품고 다녔고 31살이 되던 해, 아이는 개나리꽃과 함께 태어났다. 12시간의 진통이었다. 분만 직전에 혈압이 오르고 열이 올라 난산이 예상되었다. 엄마는 연신 나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걱정 어린 시선을 건넸다. 낯선 세상에 내던져진 아기는 울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었고 분만실 밖에서 전전긍긍하던 엄마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같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출산은 순탄했지만 육아의 과정은 생각보다 더 혹독했다. 직장에서 한창 재미를 붙여가던 때에 휴직을 해야 했고 13살 때부터 살았던 익숙한 동네를 떠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말도 못 하는 아기를 안고 생활을 해야 했다. 꼭 외따로 떨어진 무인도에 갇힌 기분이었다. 엄마의 양수 안에서 아늑하게 지내왔던 아기도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고생이었다. 탯줄로 연결되어 큰 노력 없이 배를 채울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세상에 나오니 젖을 빠는 노동을 해야 배를 불릴 수 있었다. 밖은 추웠다가 더웠으며 날은 밝았다가 어두워졌다. 변화된 환경에 적응을 하느라 나뿐만 아니라 아기도 부단히 애를 쓰던 시기였다.


아기는 자라 3살이 되었고 2년의 휴직 끝에 나는 복직을 했다. 복직을 하면서 다시 친정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갔다. 어린이집 입소 날짜는 복직 날짜와 같았다. 원장님께 양해를 구해 입소일 2주 전부터 적응 기간을 가졌다. 처음에는 한 시간 정도 같이 어린이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며칠 다니다 보니 아이도 선생님과 기관 분위기에 익숙해지는 듯했다. 엄마 없이 어린이집에 있어봐도 될 듯하다고 원장님이 한번 나가보라고 하셨다. 엄마가 나가려는 것을 귀신같이 눈치챈 듯 아이는 갑자기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울먹거리는 엄마의 얼굴을 보자마자 원장님은 얼른 나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막상 엄마가 가고 나면 아기는 괜찮아진다고 하였다. 쫓겨나다시피 서둘러 나온 나는 한동안 어린이집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울음이 너무 길어지지 않기를. 힘이 너무 빠지지 않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눈물에 가려 시야가 일렁거렸다. 적응의 시간은 며칠 더 이어졌고 다행히도 아이는 상황을 점차 받아들였다. 담임 선생님에게서 놀다 보니 잠이 들었다고 내일부터는 낮잠 이불을 들고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어린이집을 적응하고 난 뒤 또 다른 언덕이 기다리고 있었다. 출근이었다. 직장이 멀어 7시 전에 집에서 나서야 했다. 아이에게 찾아온 엄마의 빈자리를 할미와 할비가 채워주었다. 새벽잠을 쫓아가며 부은 얼굴로 엄마와 아버지가 번갈아가며 집으로 왔다. 그냥 편히 자면 좋으련만. 숨죽이며 움직였지만 집을 나서기 전에 아이는 일어났고 목놓아 울었다. 품에 파고들어 놓아주지 않았다. 울음이 그치길 바라며 안아주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버지는 늦겠다며 얼른 일어나라고 하였다. 또 가고 나면 괜찮아진다고 하였다. 품에서 떨어뜨리면 아이의 울음은 더 짙어졌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뒤로 하고 도망치듯이 문을 나섰다. 당시엔 서로 직장이 가까워 남편과 같이 출근을 하였다. 나는 남편이 먼저 차에서 내리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울었다. 그냥 운 것이 아니라 울부짖으며 울었다.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 눈물을 휴지로 찍어대며 차를 몰았다. 아이를 낳고 나니 미안한 일 투성이었다. 직장에서도 엄마로서도 딸로서도 계속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고 뭐 하나 제대로 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신없이 토해내듯 울고 나면 어느덧 직장에 도착해 있었다. 누가 봐도 울었던 티가 나서 바로 내리지 못했다. 꺽꺽 거리며 숨을 몰아 쉬었고 들썩이던 어깨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잠잠해지고 나면 룸미러를 통해 눈 상태를 확인했다. 슬픔을 거둬들인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간 얼굴로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업무를 시작하기 위해 컴퓨터를 켜고 메신저를 확인할 때쯤이면 휴대폰이 징~ 울렸다. 부은 눈으로 웃고 있는 아이의 사진이었다. 아이가 울지 않고 출근하는 엄마를 배웅해 줄 때까지, 부모님이 보내준 아이의 사진은 핸드폰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아침마다 눈물바람이었던 3살 배기 아기는 자라서 9살 소녀가 되었다. 여전히 엄마는 아이보다 집을 빨리 나선다. 집을 나서는 엄마를 따라 나오며 아이는 빙긋 웃는다. “엄마, 사랑해. 하루 잘 보내.” “연서야, 사랑해. 하루 잘 보내. 연서 먼저 방에 들어가. 들어가는 거 보고 엄마 현관문 닫을게.” 아이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문을 닫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문이 열린다. 아이는 고개를 쏙 내밀며 엄마를 바라본다. 손을 볼에 갖다 대며 하트를 만든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는다. 엘리베이터는 도착하고 아이에게 들어가라며 손을 흔든다. 문이 닫힌다. 


직장에 도착한 후, SNS에 올렸던 아이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시간을 거슬러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다 보니 아이가 유아차를 타고 다녔을 때의 사진까지 나온다. 사진 밑에 그때 적어 놓았던 글을 읽어 본다.

2017년. 1월 18일. 오랜만에 아이와 함께 친정에 다녀왔다. 연서가 아버지의 필통에 흥미를 보이며 혼자 잘 노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물었다. “아 보기 안 힘드나?” “아유, 아부지 내 새끼니 봐주지 아니면 못 봐요.” 뒤늦게 아버지와 주고받던 대화를 떠올려보았다. 내가 아이를 보고 있던 그때 우리 아부지는 나를 보고 있었나 보다. 집으로 끌고 가던 유아차를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인생에서 생각하면 눈물나는 곳(by. 못골)


내 젊은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재수를 하면서 학원도 다니지 않고 그냥 기본 참고서를 겸한 문제지를 과목별로 1권씩 골라서 그 책만 죽자고 파헤쳤다. 그렇게 하면 입시는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본 책만 몇 번이고 반복을 했다. 첫 해 입시 실패를 하고 집에 쳐 박혀 혼자서 갖고 있는 책을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한다'(책을 반복하여 보고 또 보면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한다.-양주동)는 각오로 읽고 또 이해하며 팠다. 그런데도 실패였다. 왜일까?


빵과 과자, 생필품을 평상에 진열해 놓고 판매를 하는 작은 구멍가게를 하며 어머니가 생계를 꾸렸다. 나는 ‘대학은 꼭 가야 되겠다.’는 목표 의식만 강했지 정작 방법은 몰랐다. 입시에 계속 실패하니 답답한 마음에 이웃에 거주하는 모 교수에게 어머니가 물어본 모양이다. 나는 중학교 1학년 1학기만 다니다가 장기 결석으로 퇴학을 하고, 두 해가 지난 뒤 2학년에 복학을 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교수님은 ‘1학년이 공백 학기가 되어 아들의 발목을 잡는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 특히 수학 과목을 두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진단만 쉽게 내렸지 어떻게 하라고는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물론 그 말도 일면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백 기간에 빠진 부분은 상급 학년을 올라가면서 조금씩 해결되어 간다고 생각했다. 기초 공부를 마음먹고 보충하지 않으면 현재의 학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보완을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금정산에 ‘관음사’란 절이 있었다. 명칭만 절이지 실제로는 작은 판잣집 같은 가난한 절이다. 어머니가 “그곳에 가서 공부해 볼래?”라고 물으며 함께 가본 적이 있다. 아는 절이기 때문에 실비로 숙식이 가능한 조건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연이은 아들의 실패에 몹시 안타까웠나 보다. 문맹인 어머니가 얼마나 애탔을까? 어머니 나름의 해결책이었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더 갑갑하셨으리라!


무슨 고시 공부한다고 절에까지 가겠나 싶어 집에서 계속 혼자 견디어 나갔다. 그리고 다음 해 세 번째 입시를 치렀다. 그때는 예비고사가 있고 전기‧후기대학이 나누어져 2번의 본고사를 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전기 대학에 실패하고 후기 대학에 시험을 치고 오니 형이 물었다. 

“어떻터노?”

“장학생도 하겠더라”

“어! 진짜로?” 하고 형은 기뻐했다. 합격자 발표날 가서 보니 몇 단계의 상위과를 골라도 충분한 성적이었다. 자신의 수준을 모르니 그냥 선택한 진로였다. 입대 날짜도 되고 경제적 이유 때문에 더 이상 입시를 시도해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원하는 대학을 욕심내어 보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1974년 9월 5일 입대하는 영장을 받았다. 우울한 날들이었다. 목표한 것을 극복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엄청난 차이다.


그리고 제대를 하여 복학을 했다. 복학을 하니 나는 수입이 급한 학생 가장이 되어있었다. 홀로 계시는 어머니와 내가 살기 위해서는 벌이가 필요했다. 야간학교에 강사로 나가며 끈질기게 학업을 계속해 나갔다. 전두환 때 과외는 금지되어 있었다. 도시락을 2개 싸서 라면과 말아먹으며 한 치 옆도 쳐다볼 수 없는 힘든 시기였다. ‘대학생’은 나에게 사치스러운 이름이었다. 졸업식에서 친구가 축하 삼아 해준 말은 “정말로 고생했다”였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가 태어났다. 내 입시의 실패 원인이 다양한 문제를 경험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그런 실패를 반복하게 하지 말자고 하여 여러 문제를 많이 폭넓게 다루어 보도록 배려했다. 아이들은 고맙게도 내 바람처럼 열심히 공부하였다.


큰 아이는 성적은 괜찮으나 석차가 한참 뒤로 밀렸다. 1점으로 석차가 크게 뒤바뀌는 살벌한 학교 현장이었다. 첫해 수능시험은 영어 과목에 발목을 잡혔다. 입시는 실패였다. 내 대물림인지 둘째 해도 입시에 실패하였다는 소식을 부산에서 서울까지 도보여행을 하는 2004년 2월에 경북 왜관을 지날 때 들었다. 아이도 열심히 노력하여 성적이 많이 향상되어 합격할 것이라고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는데 내신 산출을 태만하게 하여 다시 실패했다. 실패라니! 이 꽃다운 젊은 시절을 어둡고 좁은 독서실에 처박혀 모든 즐거움을 차단해 버리고 자신과 힘겹게 다투어 나갈 또 한 해를 생각하니 아이가 느끼게 될 암담함에 눈물이 났다.


여행 중에 함께 걸어가는 표 선생이 “형님! 무슨 일 있어요?” 하고 묻는다. 그때 비로소 생각이 났다. 아해를 낳아서 길러 보아야 부모님 마음을 안다는 그 말을, 아이가 입시에 실패하는 것이 내가 실패하는 것처럼 가슴 아팠다. 그러나 수험자 본인은 그것까지 느낄 수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도 에너지가 부족할 지경이기 때문에 옆의 상황에 관심 가질 여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그랬다. ‘왜 실패할까?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극복할까?’하는 문제해결에만 관심이 있었지 옆에서 마음 졸이며 바라보는 어머니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실패하고 낙담하는 나를 보면서 어머니는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얼마나 우울하고 안쓰러웠을까? 내가 그런 처지가 되니 비로소 어머니가 느꼈을 아픔이 전해져 온다. 그 해 덕문여고에서 수능시험을 치러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났다. 아이가 겪은 그 힘든 시기를 생각하니 가슴이 저렸다.


다행스럽게 그해 세 번째 해에는 열심히 하여 큰 아이의 수능 성적은 상당한 수준이 되었다. 시험에 다시 실패하지 않도록 알아볼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동원해 두드려 보고 또 확인해 가며 신중에 신중을 기해 학교 선택을 했다. 나군 00 교육대학에 면접을 보기 위해 아침에 학교 앞 식당에서 딸과 둘이서 말없이 떡국을 먹을 때 묘한 쓸쓸함이 몰려들었다. 푸스슥 부은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우리들이 그렇게 견뎌온 날들을 생각하면 마음은 까닭도 없이 우울해졌다. 그 해 다행스럽게 원하는 가군학과에 아이는 진학을 하고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순간순간 나의 입시 실패를 자신의 실패인양 가슴 아파했을 어머니 당신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 구석이 저려온다. 살아가는 과정은 기쁨도, 슬픔도 모두 함께 대물림하며 되새김하며 흘러가는 가보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다. 함께 사는 것이 슬픔이고 기쁨이다.

💌 지난 호 구독자 후기 (#16. 우리 동네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
쏘피님 :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술술 읽다보니 제가 머무는 공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제가  동네에 정을 붙이고 머무는 만큼 제 소중한 추억들이 동네와 한 덩어리가 되는 것 같아요.
🍯 땡비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 소개
 - 못골👨🏻‍🎨 : 한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진을 찍어왔다. 한계를 넘어 뭐든 끝까지 가는 남다른 의지력을 지녔다.
 - 흔희👩🏻‍🎤 : 눈치를 보지않아 '인간 사이다'로 불리나 K장녀로 은은히 돌아있다. 직업 때문에 생계형 낱말수집을 한다.
 - 아난👩🏻‍🍳 : 목구멍 보이게 웃는 큰 리액션과 미친 에너지 때문에 '어린 짐승'으로 불렸다. 빵을 굽는 방구석 빵수니. 
오늘의 땡비 어땠나요?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읽으면서 머리를 스친 어떤 의견이든 편하게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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