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부터 매주 수다를 떠는 마음으로 영화 이야기를 하며 놀다 오던 곳이 있었습니다. 영화 팟캐스트 [씨네타운 나인틴]입니다. 그 팟캐스트가 2023년 2월 14일을 마지막으로 멈추게 되었습니다. ‘멈춤’을 하였습니다. 끝, 이 아니라 멈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며, 지나치게 아쉬운 마음이 드는 저를 멈춰 세우고 있는 중입니다.


무언가와 작별하는 것은 늘 어려운 일입니다. 무엇보다 2년 7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매주 한자리에 모여 두 시간이 넘도록 아무 말을 꽉꽉 채워 놓았던 행위를, 이렇게 한순간 멈추게 된 현실이 참으로 어색한 것입니다.


헛헛한 마음이 들어 얼마 전엔, 제가 처음으로 이 팟캐스트에 출연했던 회차를 다시 한번 재생해 보았고, 틀자마자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소극적이고 어색한 말투 때문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날 녹음실의 공기가 선명히 떠올랐습니다. 솔직히 너무 떨어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근래 들어 가장 많이 웃었던 것만큼은 확실했고.. 아니 사실 가장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말은 녹음이 끝난 후 다음 주에 또 오라는 이PD님의 말이었습니다. 응? 다음 주에 또 오라고? 내가? 그래, 다음 주. 까먹으면 안 된다. 절대 잊어선 안 돼. 다음 주에 씨네타운 나인틴에 또 나가는 것이야. 기억해. 다음 주도, 씨네타운 나인틴. 다음 주. 조금 클리셰 같지만 정말로 그땐 미처 몰랐습니다. 그 다음 주가 2년 7개월 뒤의 다음 주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한번 그 첫 방송을 듣고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PD가 다음 주에 또 오라는 말을 방송이 끝난 후가 아닌, 녹음 중일 때부터 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마이크 앞에 앉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PD는 제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김철홍 평론가도 방송이나 유튜브, 이런 거 할 생각이 있습니까?


나 : 기회만 닿는다면 뭐든지 ..


저희 나인틴에서 기회를 드릴게요.


  

기회. 이 말을 듣자 후회가 밀려들어 오는 것만큼은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기회가 정말 소중한 것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순간순간 더욱 최선을 다했어야 했는데.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어야 했는데. 가장 아쉬운 건 제가 이번에도 모든 것이 지나고 난 다음에야 이런 것들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늘 before가 아니라, after일까요. 왜 아프기 전에 예방하지 않고, 아프고 난 다음에야 후회할까요. 왜 미리미리 선크림을 바르지 않고, 피부가 다 탄 다음에야 고통스러워하며 애프터 썬크림을 찾는 것을 반복하는 것일까요.


오늘 얘기하고 싶은 영화는 스코틀랜드 출신 감독 샬롯 웰스의 장편 데뷔작인 <애프터썬>이라는 작품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씨네타운 나인틴의 마지막 방송에서 ‘이번 주 추천 영화’로 소개하였습니다. 사실 이 작품을 소개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땐 방송이 끝이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였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소개하는 순간엔, 이것이 방송의 마지막에 꽤나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너무너무 잘 어울려서, 얘기하면서 마음이 아팠다는 것입니다.


튀르키예의 웰리데니즈(Ölüdeniz)라는 지역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 기본적으론 30대 초반 정도의 젊은 아빠와 11살 딸의 ‘튀르키예에서의 휴가’를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애프터썬>은 이제 부모가 된 딸이, (아마) 아빠의 나이가 지금 내 나이였을 때를 회고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바로, 과거에 그 휴가를 찍었던 캠코더 영상을 통해서 말입니다. 영화 초반엔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11살 때 아빠는 지금 뭘 할 거라 생각했어?” 이렇게 아빠의 11살을 궁금해했던 11살 소피는, 30대가 된 지금 다시 30대의 아빠의 기분을 상상해 봅니다.


그 상상이 특별한 무언가는 아닙니다. 영화엔 ‘영화에 나올 법한’ 심각한 사건 같은 것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빠와 딸 사이의 약간의 갈등이 있긴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흔한 아빠와 딸 사이의 갈등’일 뿐입니다. 이 여행이 마지막이 아니라면 굳이 돌이켜보지 않아도 될 정도의 작은 갈등들입니다. 그렇다고 이 여행지가 ‘영화에 나올 정도로’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냐고 한다면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휴가는 영화 같지 않습니다. 내용 자체뿐만 아니라 감독이 이를 표현하는 방식 역시 그렇습니다. 중간중간 캠코더 영상이 끼어들기는 하지만 딱히 스타일이 부각되는 영화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좋은 영화입니다. 그건 이 영화가 전달하고 있는 특별한 감정 때문입니다. 30대가 된 소피가 30대의 아빠를 상상하는 영화는 분명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정말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것은 ‘상상’이라는 행위 그 자체입니다. 상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슬픈 것입니다. 원래 아빠의 기분이 어땠었는지 궁금하다면, 과거의 영상처럼 그냥 물어보면 되는 일입니다. “30대 때 아빠는 기분이 어땠어? 아빠도 이렇게 힘들었어?”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상상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제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피 역시 저처럼 이것을 지나고 난 다음에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저처럼 지난 기록을 들춰보던 소피는, 아빠가 자신에게 기회를 줬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영화에서 행위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영화엔 아빠가 소피의 등에 썬크림을 발라주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아빠는 이제 물놀이를 시작하려는 소피를 앉혀 놓고 썬크림을 발라줍니다. 자외선 노출 전에 바르는 ‘비포’ 썬크림을 말입니다. 이를 당연하게 여겼었던 소피는, 이제 자신의 아이의 등에 선크림을 고루고루 발라줘야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소피는 무엇보다 선크림만큼은 반드시 잘 챙기는 부모가 될 것입니다. 소피가 이 상상을 통해 그것이 아프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크림을 제때 바르지 않으면 아프다는 것을. before에 바르지 않고, after에 바르는 것은 늘 슬프다는 것을. 시간이 우리에게 기회를 줬을 때 이를 소중히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영화의 엔딩에서 소피는 상상을 멈춥니다. 360도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아빠에 대한 기억을 최대한 이어가보려던 카메라가 정지합니다.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들리는 것은 자신이 앞으로(after) 책임져야 할 아이의 울음소리뿐입니다. 소피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30대의 소피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저는 소피가 자신의 아이만큼은 자신과 같은 상상을 하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애프터썬>이 훌륭한 점은, 이 다짐이 아이가 없는 각자들에게도 울림을 준다는 점입니다. 그 울림의 진동이 가장 강렬한 순간은 영화에 퀸과 데이비드 보위의 듀엣곡인 ‘Under Pressure’가 흐르는 때입니다. 아빠와 딸은 각자의 춤을 추고 있고, 노래는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 제발 사랑하세요! 진짜 마지막으로 말하는 거예요. 이게 우리의 라스트 댄스에요. 다음은 없을 거예요. 서로 사랑을 나누어 주세요.


그 노래를 부르던 프레디 머큐리도, 데이비드 보위도, 소피의 아빠도, 씨네타운 나인틴도 모두 각자의 춤을 멈추었습니다. 그들과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는 것은 분명 슬프고 동시에 원망스럽지만, 고마웠다는 말로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싶습니다. 아프지만 당신들이라는 훌륭한 애프터 썬크림 덕분에 덜 아플 수 있었다고.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재밌게 읽으셨나요?
이번 원데이 원무비가 재밌으셨다면
평생 무료로 원데이 원무비를 운영하고 있는
연재자 김철홍에게
좀 더 열심히 하라는 의미에서
커피 한 잔을 사주시면 어떨까요?

[ 계좌번호 : 신한 110 - 253 - 914902 ]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