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보내는 예순두 번째 흄세레터

오 헨리 단편집 원고를 받고, 〈마지막 잎새〉부터 읽고 싶어서 목차를 살폈어요.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터라 기억하고 있는 건 마지막 장면뿐이었지만, 오히려 결말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인물들의 감정선에 더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너무 뭉클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의 기분도 언뜻 스쳤고요. 역시 명작은 결말을 알고서도 찾게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크리스마스 선물〉, 〈식탁 위의 봄날〉, 〈마녀의 빵〉, 〈추수감사절의 두 신사〉 등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단편들부터 차례로 읽었어요.

그렇게 마지막에 남은 건, 처음으로 번역해 선보이는 〈힘들게 얻은 과일의 작은 흠집〉, 〈식탁 위의 큐피드〉였는데요. 곧바로 읽어버리기 아쉬워 한참을 딴짓했답니다.


세계문학을 종종 읽지만 이상하게 오 헨리는 읽기 전인 분들에게, 올해부터 세계문학을 읽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분들에게 자신 있게 권해요. 오늘은 정찬 소설가가  《식탁 위의 봄날》을 먼저 읽고 쓴 리뷰를 보내드릴게요.

셰에라자드가 펼치는 반전과 아이러니


“좋군요! 코스 요리를 먹게 되다니 말입니다. 자, 나의 쾌활한 바그다드의 지배자여. 식사가 끝나고 이쑤시개가 나올 때까지 죽 제가 당신의 셰에라자드입니다.”
위의 인용문은 〈매디슨 스퀘어의 아라비안나이트〉에서 노숙자 플러머가 자신을 저녁 식사에 초대한 차머스에게 한 말이다. 차머스는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나려면 “뭔가 변덕스럽고 말도 안 되는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생면부지의 노숙자를 만찬에 초대했고, 초대받은 플러머는 우아한 식사와 하룻밤 잠자리를 얻는 대가로 차머스를 동양의 칼리프로, 자신을 칼리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셰에라자드로 변신시킨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오 헨리를 플러머로, 차머스를 독자로 환치해도 어색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헨리의 셰에라자드적 재능은 반전과 아이러니에서 발현된다. 〈매디슨 스퀘어의 아라비안나이트〉에서의 반전과 아이러니는 노숙자 플러머가 고백한 삶의 스토리에 내재해 있다. 이야기 속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등장해 독자를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이끌면서 플러머가 겪은 희극적이면서 비극적 아이러니를 통해 삶의 예측 불가능성과 복잡성을 환기한다.
〈추수감사절의 두 신사〉는 〈매디슨 스퀘어의 아라비안나이트〉와 비슷한 이야기 구조를 취하나 반전과 아이러니의 결은 많이 다르다. 노숙자 피트는 지난 9년 동안 그랬듯 추수감사절에 성찬을 베푸는 노신사를 만나러 가는 도중 ‘붉은 벽돌집’의 하인에게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간다. 추수감사절이 오면 정오가 되자마자 제일 먼저 지나가는 배고픈 길손에게 성찬을 대접하는 것이 그 집안의 오래된 전통이었던 것이다. 배가 터지도록 먹고 나온 피트가 약속 장소에서 노신사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반전과 아이러니로 점철된다.
〈아르카디아의 단기 투숙객들〉의 반전과 아이러니는 우아하면서도 따뜻하다. 감식안을 갖춘 소수의 사람만 찾는 호텔 로터스의 최고 손님으로 대우받는 아름다운 보몽 부인과, 그 부인을 둘러싼 호텔 분위기를 묘사하는 셰에라자드의 목소리는 섬세하고 유려하다. 새로운 투숙객인 청년 패링턴이 보몽 부인을 만나면서 보몽 부인의 숨겨진 실체가 드러나는 반전과 아이러니 속에서도 셰에라자드의 섬세함과 유려함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두 남녀가 스스로 누리는 삶의 짧은 유희에 대한 셰에라자드의 따뜻한 시선 때문일 것이다. 이런 따뜻함은 〈하그레이브스의 연기〉에서도 느껴진다.

남북전쟁 이전 대농장을 소유했던 남부 귀족계급 출신인 탤벗 소령이 딸과 함께 워싱턴의 하숙집으로 거처를 옮긴 후 하그레이브스라는 연극 배우를 만나면서 일어나는 반전의 스토리에 두 인물에 대한 셰에라자드의 따뜻한 마음이 배어 있다. 이런 따뜻함이 꽃처럼 피어오르는 작품이 〈식탁 위의 봄날〉이다.
소설은 ‘뉴욕의 아가씨’ 세라가 메뉴판을 앞에 놓은 채 울고 있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프리랜서 타자수인 세라는 레스토랑의 스물한 개 테이블에 놓일 메뉴판을 근사하게 타이핑하는 일을 한다. 그 일로 겨울을 춥지 않게 지낼 수 있었는데 어느덧 봄이 왔다. 그녀가 타이핑할 레스토랑의 다음 날 메뉴에는 봄의 설레는 분위기가 진하게 담겨 있다. 그런 메뉴를 보면서 세라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월터와 봄에 결혼하기로 약속했으나 그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기 때문이다. 세라가 타이핑한 메뉴판이 일으키는 반전은 독자의 마음을 훈훈히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셰에라자드의 그런 따뜻함이 〈마녀의 빵〉에서는 심술궂음으로 바뀐다. 마흔 살의 미혼 여성인 마사는 한 주에 두세 번씩 자신의 빵 가게로 와 갓 구워낸 빵의 반값인 묵은 빵 두 덩이만 사 가는 중년 남자에게 관심을 가지는데, 여러 정황으로 보아 가난한 화가로 보이는 남자에게 마사는 어느덧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던 어느 날 마사는 남자가 구입한 묵은 빵 안에 남자 몰래 버터를 듬뿍 퍼 넣고 빵 덩어리를 다시 붙여놓는다. 그날 마사는 가난한 화가가 자신의 ‘작은 속임수’를 발견하는 장면을 설레는 마음으로 상상하지만, 셰에라자드는 마사의 상상을 심술궂게 헤쳐놓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이중적인 미소를 짓게 한다.
이러한 셰에라자드의 다변적 마음이 이 지면에 언급되지 않은 작품들, 오 헨리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알린 〈마지막 잎새〉를 비롯한 18편의 소설에서 어떤 색채와 결로 나타나는지를 음미하는 즐거움은 독자의 몫이다.

정찬 | 1983년 《언어의 세계》에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기억의 강》, 《완전한 영혼》, 《아늑한 길》, 《베니스에서 죽다》, 《희고 둥근 달》, 《두 생애》, 《정결한 집》, 《새의 시선》, 장편소설 《세상의 저녁》, 《황금 사다리》, 《로뎀나무 아래서》, 《그림자 영혼》, 《빌라도의 예수》, 《광야》, 《유랑자》, 《길, 저쪽》, 《골짜기에 잠든 자》, 《발 없는 새》 등이 있다. 동인문학상, 동서문학상, 올해의 예술상, 요산김정한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식탁 위의 봄날
오 헨리 | 송은주 옮김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단편 〈힘들게 얻은 과일의 작은 흠집〉, 〈식탁 위의 큐피드〉와 〈크리스마스 선물〉, 〈마지막 잎새〉 같은 오 헨리의 대표작 18편을 모았다. ‘반전의 대가’의 작품답게 허를 찌르는 결말과 곳곳에 숨겨진 음식에 연관한 복선을 찾아 읽는 즐거움이 있다. “나는 우울할 때 오 헨리를 읽는다”라는 전기 작가 로버트 데이비드의 말은,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오 헨리 단편의 매력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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