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02ㅣ  구독  지난레터
첫번째 매생이
글_차차

안녕하세요! 늦은 새해 인사 드립니다.

18년 여름에서부터 약 1년 남짓, 파리에서 체류했던 적이 있습니다. 짧은 기간 나름 이곳저곳 돌아다녔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곳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파리 도심에서 기차로 약 1시간 정도 떨어진 작지만 특별한 도시. 19세기 인상파 거장이자, 고독한 삶을 살았던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정착지‘오베르-쉬르-우아즈(Auvers-sur-Oise)’입니다.

(5~6년 지나버렸지만, 현장감에 도움이 될까하여...최대한 직접 찍은 사진으로 준비했습니다)

1. 오베르-쉬르-우아즈(Auvers-sur-Oise),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70일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폴 고갱과 함께‘노란 집’에서 화가 공동체를 꿈꾸던 빈센트 반 고흐. 하지만 폴은 아를에서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떠나기로 결정했다는 고백에 상심에 빠진 빈센트는 신경쇠약의 악화로 스스로 귀를 자릅니다. (초상화, 자화상 등으로 미루어보아 왼쪽 귀 밑 부분(귓불)을 잘랐다는 것으로 알려집니다.) 결국 마을에서 쫓겨난 그는 생레미드프로방스 외곽 요양원 1년을 보낸 후, 1890년 5월 20일, 다시 한번 재기하리란 희망을 품고 파리 북쪽 근교 마을 오베르-쉬르-우아즈(Auvers-sur-Oise, 이하 오베르)에 도착합니다.

이곳의 자연이 매우, 매우 아름답다. …

정말이지 나도 여기서 기꺼이 붓질 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 1890. 5. 20.,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中

2019년 6월 15일, 파리에서 복잡하지 않게 기차를 갈아타고 약 1시간, 제가 처음 오베르에 내려서 느낀 감정도 빈센트와 같았습니다. 그가 살았을 때와 비교해 큰 변화가 없는 마을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도착했으니, 그가 보았던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았겠죠. 마을 곳곳 흐드러지게 핀 꽃, 큼직한 나무가 초여름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이 가득한 아주 고요한 마을이었습니다. 빈센트는 특히 오베르의 농가를 좋아했습니다. 경사가 급한 지붕의 소박한 집은 그의 고향 네덜란드 남부 브라반트의 시골집의 풍경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 연구가이자 저널리스트 마틴 베일리는 평생을 이곳저곳 전전하며 가족, 친구와 떨어져 살았던 빈센트에게 이런 시골집의 풍경은 안락한 가정의 상징이었을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빈센트의 예술가 인생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기점이기도 합니다. 이 기간에만 평균 하루에 한 점꼴로 총 7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는데요. 이는 그의 생을 통틀어 가장 많은 작품을 그려낸 시기입니다. 그 스스로 ‘자신감이 붙은 붓질’이라고 할 만큼 갈고 닦은 임페스토 기법과 더불어 구도, 작품 크기, 과감한 색채 등 다양한 새로운 시도가 나타납니다. 어쩌면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형인 자신을 묵묵히 믿어주는, 평생의 후원자이자 친구이자 형제인 동생 테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시도일 수도 있습니다.

(왼쪽부터)포도밭과 집, 1890년 5월/지붕 사진/오베르 성당, 1890년/오베르 성당 사진

2. 라부 여관(L’auberge Ravoux), 3층 장기 투숙객 고흐

(왼쪽부터)오베르 창문/라부여관 사진

역에서 나와 중심가를 따라 5분 정도 걸으면 빈센트가 오베르에서 머물렀던 라부 여관(L’auberge Ravoux)이 나옵니다. 현재는 ‘반 고흐의 집(Maison de Van Gogh)’으로 불리는데요. 1980년대까지 카페였다가 이후 그 시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장기 투숙객이었던 빈센트는 이곳에서 먹고, 자고, 편지를 쓰고 이내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3층으로 올라가면 그의 방이 나오는데요. 체구가 작은 편인 저에게도 좁은 방으로 느껴질 정도로 협소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었던 빈센트에게 이곳은, 편견 없이 자신을 받아준 여관 주인 라부(Ravoux)부부와 옆 방의 같은 힘든 처지인 동료 화가 등 잠시나마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현재는 3월부터 11월 중순까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며 1층 및 야외에서는 예약 후 식사도 가능합니다.)

(왼쪽부터)오베르 계단/오베르 계단(풀)/라메리(시청), 1890년 7월/시청 사진

라부 여관이 있는 마을 중심가에는 그의 작품 배경이 된 장소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라메리(시청)>, <오베르의 계단> 등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듯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찾아다닌 기억이 있습니다.

3. 폴 가셰 박사의 집


그는 내가 보기에 확실히 아프고, 너나 나만큼이나 혼란스러워 보인다. …”  

- 1890. 6. 3.,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中

빈센트의 오베르 생활은 이 사람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의사이자 아마추어 화가, 수집가였던 ‘폴 가셰’박사입니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빈센트는 본인만한 괴짜 같은 사람이라며 박사를 설명했는데요. 그의 독특한 이력과 기록을 보면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과학과 예술에 폭넓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세잔, 르누아르 등 빈센트 반 고흐와 함께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들과 폭넓은 친분을 자랑한 한편, 골상학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사람들의 두개골을 집에 두기도 했습니다.) 해부학조차 환영받는 학문이 아니었던 당시 사회를 생각하면 빈센트가 왜 박사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 앞에서 25살 차이인 ‘두 괴짜‘는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로 발전합니다. 

(왼쪽부터)가셰 팻말/정원1/정원2/가셰 내부

라부 여관에서 한적한 길을 따라 15분 정도 걸으면 가셰 박사의 집이 나오는데요. 그의 집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합니다. 집 안에는 정물화로 그릴만한 것들이 늘 있었고, 정원은 꽃과 동물들로 가득했습니다. 가셰 박사는 언제든 그의 방문을 환영했죠. 실제로 그의 집은 아름다웠습니다. 세련되고 깔끔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6월 중순, 종류를 셀 수 없는 식목이 정원 여기저기 만발했고, 저마다 다른 색의 방이 있는 집 안은 햇빛이 환하게 들어왔습니다.

(왼쪽부터)가셰 박사의 초상, 1890년/정원의 마그리트 가셰, 1890년

4. 밀밭과 고흐 형제의 무덤

가셰 박사의 집에서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15분쯤 더 깊숙이 들어가 고흐 형제의 묘지로 향합니다. 따가운 햇빛을 양쪽에 늘어선 커다란 나무가 가려주는 시골길을 올라가면 고흐 형제가 쉬고 있는 공동묘지와 그 너머로 광활한 밀밭이 이어집니다. 밀밭을 경계로 하는 벽 앞에 자리 잡은 묘소는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자란 영향인지 평생 소박한 삶을 추구했던 고흐 형제에게 어울리는 수수하지만 따뜻한 자리였습니다.

나는 언덕을 뒤로하고 펼쳐진 드넓은 밀밭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바다처럼 크다.”

- 1890.06.10.~14, 편지 899 中


“거친 하늘 아래 광활하게 펼쳐진 밀밭이며,

나는 슬픔과 극한의 외로움을 표현하려 했다”

- 1890. 7. 10.(추정),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中

(왼쪽부터)공동묘지/고흐 형제의 묘비

너무 사랑하기도 또 고통받기도 한 그곳에서 빈센트는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깁니다. (이 사건을 타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여러 가지 정황상 스스로 총구를 겨눴다는 것에 무게가 실립니다) 심장을 빗나간 총알로 인해 라부 여관으로 돌아온 그는 그로부터 이틀 후인 1890년 7월 29일, 오베르에서 맺은 인연들과 동생 테오의 곁에서 눈을 감습니다.

(왼쪽부터)흰옷을 입은 여인, 1890년/밀밭, 1890년 6월/밀밭

밀밭은 빈센트에게 여러 가지 감정을 안겨준 장소입니다. 고향인 네덜란드를 향한 향수이자 다시 일어설 원동력이자 끝으로 고독을 안겨준 존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회화적 요소로써도 밀밭을 사랑했습니다. 광활한 자연 그 자체로는 물론 인물의 배경으로도 “완벽한 장치”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풍경이 양귀비가 사이사이 핀 수확 직전 밀밭이라고 합니다)

5. 오베르의 미스터리, <러빙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여러 차례 영화로 각색되었습니다. 그중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 싶은 영화는‘러빙 빈센트(2017)’입니다. 이야기는 대략 빈센트가 죽고 1년 후, 그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 풀기 위해 주인공 ‘아르망 룰랭(조셉 룰랭의 아들)’이 오베르로 내려가며 시작합니다. 미스터리의 사실여부를 떠나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영화의 프레임이 65,000장의 캔버스 유화로 구성되었다는 점입니다. 총 115명의 화가를 모집해 수년간에 걸쳐 빈센트 반 고흐의 기법으로 장면을 그려냈습니다. 그의 실제 작품 속 주인공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합니다. 영화 제작자도, 그림을 그린 화가들도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작품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OTT: 시리즈온, 웨이브, 왓챠)

러빙빈센트<@LovingVincentMovie/YouTube>

이번 뉴스레터를 준비하며 고흐 형제가 주고받았던 편지를 모은 서한집,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다시 읽었습니다. 줄곧 두 사람의 편지는 어쩐지 고독한 일생의 고백이라고 기억에 남아있었는데요. 이번 기회에, 특히 후반부 편지를 다시 읽으며 누구보다 삶과 예술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강한 사람이 바로 '빈센트 반 고흐’ 였다고 느낍니다.


‘오베르-쉬르-우아즈(Auvers-sur-Oise’단어 그대로 우아즈강(Oise) 위(sur)에 있는 오베르(Auvers)라는 뜻입니다. 늦봄에서 초여름 반짝이는 오베르 강을 따라 반나절이면 둘러볼 수 있습니다. 파리의 화려함에 잠시 벗어나고 싶을 때, 꼭 한 번 가보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한여름, 가을, 겨울은 파리에 계속 계셔도 좋습니다>.<)

  

벌써 이번 주도 오늘이면 끝이네요...(이왕 이야기가 길어진 김에...)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 덧붙이며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의 뉴스레터는 여기까지~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피드백을 남겨주세요↩︎
1. 본 메일은 세계지식포럼 유료 참가자와 뉴스레터 구독자에게 발송됩니다
2. 스팸메일로 잘못 분류되는 것을 막기위해서는 발신주소 newsletter@wkforum.org 이메일 주소록에 추가하시면 됩니다. 
세계지식포럼 사무국
매경미디어그룹 ㅣ 서울 중구 퇴계로 190 매경미디어센터
02-2000-2411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