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성주의에 대한 해찰 : 통합 없는 ‘지성주의’

반지성주의에 대한 해찰 : 통합 없는 ‘지성주의’

Anti-intellectualism : How do we understand each other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41), 2022.5.18,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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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반지성주의, 대중, 소통, 혐오, 대화

1.머리말

2.‘야만인’ 대중이 몰려온다

3.근데...‘반지성주의적 대중’이 누구지?

4.적과 함께 하기!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통상 새 대통령이 취임할 때 주목받는 것이 있습니다. 취임사입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새로 취임할 때 언론은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곤 했죠.

지난 10일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전문)엔 독특한 포인트가 몇 곳 있었는데요. 그 중 가장 주목을 받았던 단어는 역시 ‘반지성주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관련 대목을 일부 발췌해보겠습니다.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습니다.”

워낙 낯선 얼굴의 말이다 보니 이 ‘거룩한’(?)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이와 관련된 도서들도 많이 소개가 되었죠.(링크)

일단 반지성주의를 간단히 소개하면, 내 의견이 틀렸을 가능성 등 소통 가능성을 무시하고 자기 주장만 옳다고 우기는 것을 가리킵니다.1) 특히 근래엔 트럼프 등 극우파가 세를 얻어 온 과정에서 이 반지성주의가 문제로 부각되었고요.

우리나라에선 비슷한 맥락에서 2020년 교수가 정한 올해의 사자성어에 “아시타비(我是他非·내 말만 맞고 넌 틀렸어!)”가 꼽히기도 했습니다.

반지성주의에 관한 가장 큰 골칫거리는 역시 합의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죠. 대화를 하려면 일단 남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안 들으니까요.(“내 말이 무조건 맞는데 네 말을 뭐하러 듣나?”)

<fig.1> 지난 11일 제 20대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식을 진행하고 있습니다(왼쪽). 2017년 지구의 날에 호주 멜버른에서 과학행진 시위자들이 '무지는 축복이 아니다'라고 쓰여진 피켓을 들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 wikimedia

그간 취임사와 관련해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관련 기사가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반지성주의라는 단어를 넣고, 통합을 뺐다는 내용의 기사입니다.(링크)

그런데 취임사에서 굳이 반지성주의를 몰아내야한다고 강조하면서 통합이란 단어를 뺐다는 것은 뭔가 좀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샌드위치를 먹으려고 봤더니 빵 두 장만 있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오늘 레터에서 저는 “취임사에 등장한 반지성주의자는 누구일까?” 그리고 “반지성주의와 통합이 과연 따로 갈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춰 해찰해보기로 했습니다.

‘반지성주의 대중’의 본격적인 출현을 알린 고전 <대중의 반란>(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과 갈등 상황에서의 ‘소통’을 강조한 <타인에 대한 연민>(마사 누스바움)을 지팡이 삼았습니다.

1)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이라는 말 자체는 사실 굉장히 ‘미국적인 현상(인구 40%가 창조론을 믿는 나라)’에서 탄생한 단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다른 의견과 소통하지 않고 내 주장만 옳다고 주장한다는 측면에 주목하면 우리나라 상황에도 적용이 가능합니다. 오늘 레터에선 이 부분에 집중하려 합니다.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은 하단 참고문헌을 참고해주세요.

【2.‘야만인’ 대중이 몰려온다】

“도시는 사람으로 충만해 있다. 집들은 세입자들로 가득하고 호텔은 여행객으로 가득하고 기차는 승객으로 가득하다. 또 찻집은 손님으로 가득하고 거리는 보행자로 가득하고 명의의 진찰실에는 환자로 가득하다. 때를 놓치지 않았다면 극장은 관객으로 가득하고, 해안은 해수욕객으로 가득하다[...]갑작스레 군집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출현했다[...]그들이야말로 주요인물인 것이다. 이미 주역이라는 것은 없고 있는 것은 합창단뿐이 되었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20세기 스페인 철학자, 정치인인데요. 그의 대표작인 <대중의 반란>(1930)은 ‘대중(Mass)’이 역사의 핵심 주인공으로 떠오른 20세기의 새로운 풍경을 날카롭게 그려낸 책입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18세기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19세기를 대표한다면 <대중의 반란>은 20세기를 대표한다”는 대단한 평가(The Atlantic Monthly)를 받기도 했죠.

반지성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책을 꺼내어본 이유는, 이 책이 20세기 반지성주의적 대중의 출현을 알린 상징적인 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누군가를 ‘반지성주의’라고 지적할 때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이미지가 이 책에 담겨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채롭고 꼼꼼한 묘사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fig2.> 아르헨티나 화가 Antonio Berni의 작품 <대중 시위Manifestacion>(1934) 출처 wikiart

그런데 ‘이런 굉장한 책이 무슨 얘길 할까?’라고 생각하며 이 책을 펼쳐본다면 첫 인상에 조금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이 책에서 ‘대중’이라는 단어가 아주 많이 반복되는데, 죄다 극도로 부정적인 묘사 뿐이기 때문입니다.(야만인, 원시인, 철없는 아이...) 19세기 말 당시 유럽에선 산업발전 등의 영향으로 인구가 크게 증가했고, 문화나 정치에 있어 ‘대중’의 입지가 두드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르테가는 이 책에서 ‘신인류’ 대중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쏟아붓습니다.

“대중이란 삶의 계획 없이 파도 위를 떠다니는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가능성과 권력이 거대하더라도 그 무엇도 건설하지 않는다[...]그들은 자신의 복리에만 관심이 있고, 동시에 그 복리의 원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 <대중의 반란>(이하 동일)

오르테가에 따르면 대중은 자신이 처해있는 사회의 역사나 작동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이 ‘물려받은’ 풍요를 즐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인간형입니다. 이 때문에 그의 관심사는 대체로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로 향하는 경우가 없죠.

이는 대중이 남과 소통하지 않는 자기 폐쇄적 인간이라는 것과도 이어집니다. 대중은 자신에 대한 강력한 확신과 무한대의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굳이 남의 말을 듣고, 나와 다른 의견을 설득하려는 노력 없이도 거침없이 스스로의 의견을 내세웁니다.

예를 들면 이 시대의 대중은 넘치는 자기애와 자기 확신을 바탕으로 ‘2+2=5’라고 목 놓아 주장해버리는 것입니다. 옆에서 아무리 2+2=4라고 말해도 내 의견만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절박하고 자신의 의견에 목숨을 걸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이 주장의 사실, 가치를 증명하진 않죠.

오르테가는 이 책에서 대중의 폐쇄성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도덕적, 지적 자질은 뛰어나고 완전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자기만족에 의해 외부의 권위로부터 자기를 폐쇄하고 귀를 닫고 자신의 의견에 의심을 품지 않으며 타인을 고려하지 않게 된다[...]자신과 그 동료만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게 될 것이다.“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이유를 늘어놓아 남을 설득하려고도, 정당화하려고도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는 태도를 취하는 타입의 인간이 나타난 것이다[...]이유를 달지 않을 권리, 곧 도리 없는 도리이다.“

<fig.3> 서로 단톡방 등에서 남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 현상을 표현한 신조어 '집단적 독백'(왼쪽),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 긴 글을 쓰고 마지막에 '반박 시 니 말이 맞음ㅋ'이라는 문장을 쓰는 것이 어느샌가부터 유행이 되었습니다. 즉 반박의 여지를 없앰으로써 ‘귀찮은’ 논쟁을 이어가진 않겠다는 것입니다. 잡앤조이 / 인터넷 커뮤니티

저는 이런 대목을 읽으면서 최근 인터넷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집단적 독백’이나 ‘반박 시 니 말이 맞음ㅋ’ 등의 밈이 떠올랐습니다.

이런 얘기는 일상 생활 차원에서의 대화에서 자주 보이는 모습이긴 한데요. 일상 생활의 대화 방식조차도 점차 서로 소통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해진다면 사회 전체적으로도 소통이 잘 되고 있다고 보기엔 어렵겠죠. ‘반박 시 니 말이 맞다’는 것도 사실은 진짜로 상대방을 존중하기보다는 나와 다른 의견이나 반박에는 대응을 하지 않겠다는, 즉 소통을 하지 않겠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런 방식의 ‘소통’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나’만 있고 ‘남’ 은 없다는 것이죠.

만약 대화의 주제가 ‘오늘 점심 메뉴’ 정도라면 큰 상관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차별, 분배, 환경 문제 등 정말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일들에 대해서 서로 귀를 닫기만 한다면 사회는 결국 ‘실제로 결정권이 있는 극소수의 사람’에 의해서만 굴러가게 될 것입니다.

이는 오르테가가 활동했던 20세기 초중반에도 마찬가지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한편 오르테가는 ‘대중’에 반대되는 인간형으로 ‘귀족’을 내세웁니다.

귀족은 자기를 희생하고, 소통을 통한 ‘사상’을 만들어가고 자신이 선택한 권위와 진리에 기꺼이 복종하며 더 나은 삶과 사회를 향한 상승의 의무를 가진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인간입니다. 심지어 오르테가는 이 책에서 “세상은 본질적으로 귀족적”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이쯤 되면 ‘아니 이런 굉장한 엘리트주의자가 있나!’하면서 깜짝 놀라게 되는데요.

물론 이 정도로 내용이 간추려지는 책(“대중은 죄다 얼간이야”)이라면 현재까지 고전으로 불리며 거듭 읽히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래에서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3.근데...‘반지성주의적 대중’이 누구지?】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대중/귀족’의 분류가 우리의 통상 생각하는 바와 큰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보통 정치인이나 부자, 전문가 등 돈과 권위를 많이 가진 -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들을 ‘귀족’이라고 생각하고, 나머지 일반인들이 ‘대중’일 것이라 생각하게 되는데요. 오르테가가 말하는 ‘대중’과 ‘귀족’을 가르는 건 결코 현실에서의 문화적, 정치적 계급이 아닙니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기꺼이 대화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기꺼이 의무를 짊어지는 사람이야말로 ‘귀족’인 것이죠.

이와 관련해 심일섭은 (오르테가가 말하는) “대중이란 다수인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대중을 구성하고 있는 일정한 성격을 가진 인간 유형”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즉 ‘대중’은 구체적인 계층(가난한 사람, 저학력 등)이 아닌 ‘성격’에 가깝다는 거죠.

즉, 그에 따르면 부자, 정치인, 대통령이면서도 얼마든지 ‘대중’일 수 있습니다. 오르테가는 이 책에서 단지 세습받은 작위를 유지할 뿐 어떠한 책임, 노력도 짊어지지 않으려 하는 ‘(겉만) 귀족’ 등에 대해서도 대중 못지않게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대중의 엄청난 소요를 앞두고 베르사유 궁전의 마마님처럼 점잔 빼면서 찡그린 얼굴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귀족적인 것이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베르사유는 귀족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사회의 귀족은 자신들만이 ‘사회’라는 이름을 독점할 요량으로 스스로를 ‘사교계’라 부르며 초대하고 초대받으면서 살아가는 소수 집단과 아무 관계도 없다[...]고귀함은 권리가 아니고 의무를 동반한다. 곧 고귀한 의무이다.

이처럼 물려받은 권리, 부를 누리는 것에만 급급한 귀족들에 대해서 오르테가는 “‘귀족’이란 말이 본디 의미를 잃고 변질된 채 쓰이고 있으니 분통 터질 일”(!)이라고 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그는 대중과 귀족 외에도, 당시 새로 떠오르고 있던 사회적 상류층인 부르주아 ‘전문가’라는 새로운 계층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기도 한데요.

이들은 교육, 과학, 법률, 의학 등 자기 분야의 깊은 전문지식을 가졌지만, 대중과 마찬가지로 전체를 조망하는 시각과 소통하려는 진정한 의지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저자는 전문가 역시 본질적으로는 대중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고 비판합니다.

외려 이들은 대중 지배 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톱니바퀴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 더 나쁘기도 하죠.

그(전문가)는 무식한 식자(識者)라고 말해야겠지만 사안은 중대하다. 이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모든 문제에 대해 무식한 사람으로 처신하지 않고,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처럼 유식한 행세를 하며 거드름을 피우기 때문이다[...]내가 계속 대중의 특징으로 거론해 온 ‘남이 하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높은 권위를 따르지 않는다’는 성격은 부분적인 자질만을 가진 이 전문가들에게서 완벽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오늘날 대중에 의한 지배를 상징하고 있고 또 대중에 의한 지배의 주요한 목표이다.

이 밖에도 오르테가는 20세기의 ‘대중주의’를 좌파 혹은 우파 어느 한쪽만의 문제로 치부하고 있지 않은데요.

<fig.4> 나치의 행진(왼쪽)과 환호하는 대중들. <대중의 반란>이 쓰여진 시기인 1930년 이후 국제 상황을 볼 때 20세기와 '대중'에 집중한 오르테가의 분석이 상당히 유의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Rick Steves' Europe 유튜브 갈무리

그가 이 책을 집필했던 당대의 ‘반자유주의자’와 ‘혁명파’가 외치는 구호는 달랐을 지 몰라도 모두 핵심은 내 말만 맞다고 믿는 ‘대중성’이었죠. 자기성찰과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한 대중들은 오로지 자신이 믿는 진실에 따라 강력한 자신감으로 행동하기만 하면 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누굴 죽이든, 밀어버리든 큰 문제가 아니었죠.

그 결과가 2차대전, 그리고 그 이후 20세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떠올려본다면 오르테가의 이런 지적은 굉장히 시의적절하고도 핵심적인 문제제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덮을 즈음엔, ‘20세기-대중의 시대-를 가장 잘 설명한 고전’이 제기했던 커다란 문제가 21세기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나와 다른 이들을 가차없이 배제해 온 20세기의 문제는 21세기에도 현재진행형입니다. 물론 이는 우리가 통상 떠올리는 ‘일반인’이랄지 ‘대중’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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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함께 산다! 반대자와 함께 통치한다! 이런 친절한 마음은 이제 이해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대중은 대중이 아닌 것과의 공존을 바라지 않는다. 대중은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필사적으로 싫어한다.”-오르테가 이 가세트, <대중의 반란>

【4.적과 함께 하기!】

오르테가가 지적하는 ‘대중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남의 말 안듣는 폐쇄성’, 즉 소통 불가입니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타인에 대한 연민>에서 가장 강조하는 가치 역시 소통인데요.

이 책은 마사 누스바움이 2016년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소식을 전해 듣고 참담한 마음으로 써내려간 글인데요. 여타 이론서와는 달리, 이 책은 당장 우리에게 닥쳐온 ‘대혐오’의 시대, 반지성주의의 시대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를 적극적으로 궁리하는 ‘실용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fig.5>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해 1월 6일 백악관 Ellipse에서 지지자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고 있습니다. 이후 수천명의 군중들은 의회의사당으로 몰려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AP

이 책에서 그는 두려움과 시기, 분노 등 혐오를 둘러싼 ‘감정’들을 정의합니다. 타인의 고통과 삶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반지성주의-혐오자들은 두려움과 시기 등 강렬한 감정에 휩쓸려 여성, 이주민, 외국인 등 소수자들을 혐오합니다.

이유 없이 뺨을 맞으면 당연히 화가 납니다. 혐오 공격을 받는 약자들 역시 분노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누스바움은 결코 ‘분노’해선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왜냐면 분노는 자칫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혐오에 맞서 분노해버리면 소통의 다리는 완전히 끊어져버리고 말기 때문이죠.

만델라와 킹이 보여주었듯이 우리는 인종 차별주의자들을 악으로 규정하지 않으면서도 인종 차별주의를 비난할 수 있다. 서로를 악으로 규정하는 한 밝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고 협력과 인류애를 가능하게 할 사랑도 갖지 못한다.

-마사 누스바움, <타인에 대한 연민>

강렬한 감정에 감정으로 맞부딪친다면 우리는 영영 ‘통합’의 가능성을 잃게 되겠지만 우리가 혐오자들에게 칼 대신 손을 내민다면, 거기서부터 미래는 바뀔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중의 반란> 속 대중처럼 ‘폐쇄적’인 태도가 아닌, 상대의 말을 듣고 이해해 ‘우리’를 위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겠다는 고귀한 의지입니다.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혐오, 반지성주의의 유일한 해결법은 결국 소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반드시 통합된 공통의 공간을 손바닥만큼이라도 되찾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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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 이튿날 여성행진에서 마돈나가 한 기억할 만한 연설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 행진이 결국 아무 의미도 없을 거라고 주장하는 비방자들은 들어라. 엿이나 먹어. 엿 먹으라고!"[...]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엿 먹어"에 대꾸할 수 있는 말은 "너도 엿 먹어" 뿐이다."-수전 제이코비, <반지성주의 시대>

【5.맺음말】

오늘 레터를 정리하면서, 통합 없는 지성주의(?)란 결국 속 없는 찐빵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반지성주의는 ‘남을 이해하는 데 지성을 쓰지 않겠다’는 폐쇄적인 결심이고, 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다면 결국 반지성주의든 지성주의든 별 다를 게 없으니까요. 오르테가가 만약 오늘날 자기 아집에만 갇힌 똑똑한 사람을 본다면 당연히 그를 ‘귀족’이라 부르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지성주의가 상대를 향한 ‘모욕’이 될 때, 우리는 잊기 쉽습니다. 반지성주의 비판의 핵심이 ‘내가 틀릴 수 있다는 망설임’이며, 이런 겸손함을 기반으로 한 소통이라는 점을요.

자기 의견만 내세우기 위해 반지성주의라는 단어를 활용하는 모습은 벽에 커다랗게 ‘낙서금지’라고 쓰여있는 낙서를 떠올리게 합니다.

반지성주의라는 말이 공격의 수단이 될 때 - 즉 본인만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우리 사이엔 더욱 큰 벽이 생기고 말 것입니다.

‘지성주의’의 핵심은 지식이 아니라 대화입니다.

그리고 대화와 통합을 강조하지 않을 셈이라면 반지성주의란 단어는 아이러니하게도 단지 반지성주의를 강화하는 도구가 되어버리기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반지성주의라는 알쏭달쏭한 단어가 새삼 떠오른 대강의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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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인 삶의 의미는 진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것을 새로이 탐색한다는 데 있다. Harold Rosenberg는 지적인 삶의 이런 측면을 요약해서, 지식인이란 해답을 질문으로 바꾸는 사람이라고 말했다.-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김현창 옮김, 『대중의 반란/철학이란 무엇인가』, 동서문화사, 2016.

-본문에서도 썼듯, 얼핏 이 책은 대중 비하, 귀족주의적인 책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전문가, 지배계층 역시 얼마든 '대중'이 될 수 있다는 지적(그리고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다는 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곽영진 영화평론가는 이 책에 대해 “대중을 공격하려는 사람, 반대로 집단지성 운운하며 치켜세우려는 사람 모두에게 무기가 될 만한 고전”이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여러 판본으로 나와있습니다만, 맥락을 충분히 살펴 읽기 위해 옮긴이 해제가 충실한 책(거의 100쪽 분량!)을 선택해서 읽어보았습니다. 어렵고 무거운 책처럼 느껴지지만 이 책의 내용은 당시 언론에 실렸던 글을 모은 것이므로, 당대 상황을 조금 파악하고서 읽기 시작한다면 비교적 술술 읽힙니다.

기타 관련 참고 문헌

*심일섭,「오르테가의 대중비판론과 그 문제」,『기독교사상』24, 대한기독교서회, 1980.

*후카이 토모아키, <사상으로서의 편집자>, 한울아카데미, 2015 중 관련 내용

(파울 틸리히와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론')

마사 누스바움, 임현경 옮김, 『타인에 대한 연민』, 알에이치코리아, 2020.

-이 책의 영어 원제는 <두려움의 군주제>(The Monarchy of Fear)입니다. 그의 핵심 사상을 쉽고 평이하게 잘 풀어놓은 느낌의 책입니다. 서문을 보면 트럼프가 당선됐다는 소식을 들은 뒤 충격을 받고 긴급하게 정리한 글을 갈무리, 보완해 낸 책이라고 합니다. 그런만큼 글을 읽어 갈 때 호쾌함과 동시에 절박한 마음이 잘 느껴집니다. 통상 철학책, 이론서는 현실과 동떨어져 다소 무거운 느낌인 경우가 많지만, 이 책의 경우엔 '당장 내일 일어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지?' '집이 무너졌는데 당장 밥은 어떻게 먹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느낌입니다.

처음 이 책에서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후반부를 읽을 때 힘들게 느껴졌었는데요. 이번 레터를 쓰면서 다시 읽어봐도 버거웠는데, 그 버거움이야말로 반지성주의를 타파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 '각자'가 감당해야하는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리처드 호프스태터, 유강은 옮김, 『미국의 반지성주의』, 교유서가, 2017.

수전 제이코비, 박광호 옮김, 『반지성주의 시대』, 오월의봄, 2020.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반지성주의와 관련해 주로 거론되는 고전입니다. 미국에서 1963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상당부분은 건국 초기 미국에서의 '복음주의' 전파 과정 및, 그 과정에서 '라틴어만 줄줄 외지만 정작 신심은 없는, 젠 체하는 계란머리(지식인을 비하하는 단어)'가 어떻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는지, 그것이 어떻게 20세기 미국의 매카시즘으로 이어지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수전 제이코비의 책은 미국에서 2008년 출간되고, 트럼프 당선 이후 2018년 개정판본이 나왔습니다. 서문에서부터 리처드 호프스태터를 중점적으로 인용하고 있는만큼, 이 책은 <미국의 반지성주의>를 반세기 이후의 미국 상황에 덧대어 새롭게 읽은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들을 읽어내려가다보면, 반지성주의가 분명 어느정도는 미국의 '특수한 상황'(창조론 우세, 근본주의 종교 등)이란 생각도 드는데요. 다만 결국 그들에게 부족한 '지성'의 핵심이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는데...'라는 겸손한 망설임이자 타인과 소통하려는 의지라고 할 때, 그건 미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요.

【글 속 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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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성주의’는 멍청한 대중 탓인가?

독서시간: 약 5분 / 글자수: 약 1500자

🖍글 속 한 문장

“이는 지성에 대한 맹목적 반감이 아니라 자기성찰이 결여된 권위적 지성에 대한 반동이라고 보는 게 마땅할 것이다...반지성주의적 의식은 비단 미국에만 해당되는 특수 현상은 아니다. 부실한 엘리트주의가 만연하면 시간, 장소를 불문하고 나타날 현상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등을 바탕으로 반지성주의를 짚고 있는 한명식 대구한의대 교수의 칼럼입니다. 반지성주의가 '자기성찰이 결여된 권위적 지성'에 대한 반동이라고 짚은 부분이 탁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엘리트가 '반지성주의' 운운하는 건 대체로 남 탓이기 쉽다는 거죠.

소비되는 국민과 검찰국가의 그림자

독서시간: 약 6분 / 글자수: 약 1700자

🖍글 속 한 문장

”반지성주의로 오염된 민주주의가 자유 시민의 주인됨을 부정하고 있으므로[...]자유 시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새 대통령의 의지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반지성주의에 물든, 자유 시민의 적이자 극복의 대상으로 단정하는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김종철 연세대 교수가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 속 '자유'와 '반지성주의'를 연결해 해석한 칼럼입니다. 오늘 레터에선 '반지성주의'라는 단어에만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의 취임사에서 자유라는 단어는 무려 35회 등장했습니다.

윤 대통령 취임사를 보는 언론들의 시각

독서시간: 약 6분 / 글자수: 약 1700자

🖍글 속 한 문장

“윤 대통령은 통합·화합·소통·협치 같은 단어를 쓰지 않았다. 국회가 압도적 여소야대 상황이며, 대선 결과가 0.73%포인트 차로 갈렸음에도 외면했다. 그러면서 반지성주의라는 생경한 개념을 들고나온 것은 의미심장하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각 언론사들이 취임식 다음날 신문 지면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모아 분석한 미디어스 기사입니다. 각 언론사의 지향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자유와 반지성주의라는 단어에 눈이 모였습니다.

‘수신자 전원에게 알림’ 언어 넘은 소통

독서시간: 약 5분 / 글자수: 약 1400자

🖍글 속 한 문장

릴레이 리그에서 ‘언어’보다 더 중요한 건 소리·몸짓 같은 ‘비언어의 소통’ 방식이다....“위기에서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망연한, 말 없는 사색으로부터 싹텄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비언어 소통을 꿈꾸었던 작가, 안젤리카 메시티 전시에 대한 글입니다. 오늘 레터에서는 소통 불가능이라는 의제를 '반지성주의'라는 키워드에 맞춰 해찰해보았는데요. 그러다보니 마치 소통은 '지식'이 있어야 가능한 것처럼 여겨지기 쉽지만 소통에선 나를 낮추고 객관화하는, 벽을 허무는 태도가 핵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회차의 반응

연구자님들께서 이전 레터('일론 머스크는 트위터로 지구를 구할까?')에 대해 의견을 보내주셨습니다. 대표적인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에 대해서 제가 읽었던 글은 대부분 트위터라는 거대한 소셜 미디어가 한 사람의 손에 떨어지는 것의 문제점에 대해 다루었는데, 머스크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예전부터 머스크에 대해 비판적으로 다루는 글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흥미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됐습니다. 루디크러스도 읽고 싶네요.

지난 회차 레터를 보내고 나니 그 이후에도 많은 일이 다 있어서 참...깜짝 놀라기도 하고 정신이 없었는데요.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습니다.

한편 루나, 테라코인 급락 등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는 지난 회차에 다루었던 책 <루디크러스>가 많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언젠가 관련해서 좋은 읽을거리를 찾는다면 레터에서도 다뤄보면 좋겠습니다. 코인 관련해서 읽을만한 재미난 책이나 아티클 등을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정합니다>

지난호(40회) 챕터 4에서, ‘아이언맨(조니 뎁)’은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오기입니다. 마감하느라 정신이 없었는지 말도 안되는 오타를 내버렸네요.

1. 오늘 레터는 어떠셨나요? 아래 ‘💌편지보내기’ 버튼을 눌러서 오늘 레터에 대한 감상이나 질문 등을 보내주세요. 간단한 한줄 감상도 좋고, 연구자님이 떠올리신 독특한 해찰거리도 좋습니다 :) 레터를 통해서 보내주시는 작은 격려와 의견들이 레터를 쓰는 데 큰 힘이 됩니다. 흥미로운 해찰은 레터를 통해 함께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인스피아에서 차후 다뤄볼만한 주제나 좋은 콘텐츠 등의 추천도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1.혹시 지난 회차 가운데서 '아, 이 회차에서 이 책(혹은 영화 등)을 다뤘었으면 좋았을텐데, 아깝다!'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지난 회차의 주제에 대한 책이라도 추천해주시면 검토 후 레터에서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신간도 구간도 상관 없습니다. 회차명과 책 이름, 그리고 짤막한 추천 이유를 적어서 아래 '💌편지 보내기' 버튼을 통해 보내주세요. 지난 회차의 레터 내용은 아카이브 페이지(💬링크)를 참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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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월 18일입니다. 광주 민주화운동으로부터 42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영령들의 명복을 빌며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역사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해봅니다.

다음주는 5월 마지막주이므로 지난 4월 마지막주와 마찬가지([4월의 김스피])로 에세이 및 큐레이션 형태의 레터가 발송됩니다.

오늘도 레터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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