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김철홍입니다.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오랜만이 너무 오랜만이라, 대체 무슨 말로 이 글을 시작할까 고민이 참 많았습니다. 그 고민 때문에 이번 한 주는 쭉 불안했던 것 같은데요. 하지만 아무리 시간을 들여 머리를 굴려봐도, 이 질문을 생략한 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재를 시작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영화 잘 보고 계셨나요? 2023년 1월은 어떤 영화를 보며 새로운 한 해의 시작 시기를 보내셨나요?


말이 나온 김에 짧게 1월의 영화들에 대해 얘기해 볼게요. 2023년 1월에 가장 뜨거웠던 영화는 누가 뭐래도 뜨거운 코트를 가르며 우리에게 다가온 <더 퍼스트 슬램덩크>였습니다. 이 영화는 <아바타: 물의 길>을 제외하면 1월에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영화입니다. 그렇게 2월에 드디어 200만 관객수를 기록하였는데요. 관객수뿐만 아니라 일종의 문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화제를 몰았었습니다. 그동안 90년 대의 향수를 부르는 콘텐츠가 꽤 많았다고 생각하는데, 그중 최강자는 단연 슬램덩크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90년대 때 슬램덩크를 즐기지 않았던- 상대적으로 ‘젊은 관객’들에게도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어떤 지점이 그렇게 젊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제가 직접 영화관을 찾아가 영화를 관람해 보았는데요. 참 안타깝게도 저는 그 이유를 발견하지 못 한 채, 씁쓸한 마음으로 영화관을 빠져나왔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젊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화에서 표현하고 있는 농구 경기 자체의 박진감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영화의 한 축인 주인공 송태섭의 과거 사연이 전혀 감동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감동이 전혀 없었다기보다는, 영화로 담을 정도로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상이 되는 감동이었달까요. 비유하자면 ‘각본이 보이는 드라마’ 같았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각본 있는 드라마’라는 비유를 든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짜릿한 스포츠 경기를 보고 난 다음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이 ‘각본 없는 드라마’잖아요? 그런데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절반 분량을 차지하는 ‘산왕전’만큼 각본이 널리 알려진 드라마는 드물 것인데요. 이 영화가 뛰어난 영화라는 생각이 든 이유가, 바로 ‘각본 있는 드라마’도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는 점 때문입니다. 분명 (송태섭의 이야기처럼) 결말을 알고 있었음에도, 경기의 순간순간을 묘사하는 연출만으로 엄청난 몰입감을 느끼게 했다는 점에서, 영화의 감독을 맡은 원작 만화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영화 연출을 해도 웬만한 감독보다 잘하겠다는 생각을 들게 하였습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후속편에 관한 전망은, 밝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래도 이 작가의 다음 작품만큼은 꾸준히 지켜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데뷔작 영화 단 한 편으로, 꼼짝없이 다음 작품을 꾸준히 지켜보게 만들어버린 감독의 신작이 2월 1일 개봉했습니다. 그 감독의 이름은 데이미언 셔젤이고, 신작의 이름은 <바빌론>입니다.


셔젤 감독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사실 저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다가 <라라랜드>를 떠올렸습니다. ‘슬램덩크’는 분명, '그때 그렇게' 끝났기에 전설이 된 작품입니다. 물론 가정법을 활용해 상상을 펼쳐 볼 수는 있습니다. 슬램덩크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연재를 했더라도, 충분히 전설적인 작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행복회로를 돌려보는 것입니다. 행복회로를 돌린다? 이것이 바로 <라라랜드>의 엔딩입니다.


엔딩에서 5년 만에 서로를 알아본 세바스찬과 미아는, 세바스찬이 연주하는 음악이 흐르는 동안 영화적 가정법을 활용해 둘이 이별하지 않은 버전의 LA를 상상합니다. 이 아름다운 뮤지컬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꿈같이 황홀한 장면들과, 완벽한 하모니를 이룬 음악이 약 8분 동안 영화를 보는 우리와 영화 속 두 주인공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습니다. 마치 이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습니다. 계속했다면 정말 아름다웠을 거야. 지금 네 인생에서 느끼는 행복보다 훨씬 더 큰 행복이 너에게 주어졌을 거야.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셔젤 감독의 선택은 우리로 하여금 그 달콤한 가정법에서 머물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면 나의 5년 전 선택이 내린 결과물인 현재의 남편이 미아에게 말을 겁니다. “Do you want to stay for another?” 여기서 another가 지칭하는 것은 물론 단순히 또 하나의 연주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방금 8분 동안의 새로운 버전의 인생을 살고 온 미아의 입장에서 이 질문은 분명 엄청난 의미를 지닌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IF가 몰고 올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는 미아는 '이제 그만 나가자'는 말을 합니다. 남편의 질문이 없었다면 한 곡 정도는 더 들었을 수도 있지만, 남편의 질문이 때마침 있었기에 여기서 멈추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이 남편이 감독 데이미언 셔젤의 분신이라는 상상을 해본다면, 또 하나의 재미있는 해석이 시작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과연 미아의 이런 모습을 ‘성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성장은 잘 모르겠지만, 미아가 <라라랜드>의 이야기 속에서 분명 변화한 것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전반부에서 미아는 세바스찬과의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이미 한 번 현재를 부정하는 선택을 내린 전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현재의 애인 대신, 달콤한 가정법의 손을 잡았던 인물인 것입니다. 그랬던 미아가 영화의 끝에선, ‘현재’의 손을 잡습니다.


이것이 성장인지에 대해선 확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확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꼰대겠죠. 하지만 미아의 변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미아 역시 이제 저처럼 앞서 언급한 ‘젊은 사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다른 ‘젊은 사람’들처럼 <슬램덩크>를 즐기지 못했던 것처럼, 미아 역시 <세바스찬과의 인생>을 즐기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슬램덩크가 그때 그렇게 끝나지 않았더라면>은, 아니 <sLAm sLAm Land>는, 저의 머릿속에서 상영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미 완결된 과거에 대해 이런저런 프리퀄과 시퀄을 추가해 보는 것은 분명 달콤한 것이지만, 현재의 저는 그럴 여유가 없나 봅니다.


그런데 <바빌론>은 그런 저에게 (계속)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 진짜 <바빌론> 이야기하려고 시작한 글이었는데, 그만 길어져 버렸네요. <바빌론> 이야기는 다음 주에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혹시나 해서) 여기서 '젊은 사람'은 진짜 어린 사람들을 지칭하는 게 아니고 비유입니다. 저는 젊읍니다.. 🥲

  
주변이 다 어두워지고 조명이 나만을 비추는, 그런 마법 같은 순간이 가끔 우리를 찾아온다. 그 '순간'은 나를 해고당하게 하거나 간절히 원하던 캐스팅에 합격시켜주곤 한다. 하지만 동시에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해주거나 혹은 그 사람과 헤어지게 만들기도 하는 것. 말하자면 이 '순간'의 결과가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도 모르고 순간도 모른다. 그저 나에게 찾아온 그 순간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해 보여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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