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보내는 예순네 번째 흄세레터

설 연휴를 한 주 앞두고 인사드리는 '랑'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명절 가운데 하나인데 일주일은 쉬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네요😅 고향에 가시는 분들 기차 예매는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운 좋게 성공해서 한시름 놓고 있습니다😎 벌써 1월이 끝났고, 아시안컵을 하고 있으며, 연휴도 앞두고 있어 그런지 붕 떠 있는 기분이 드는데요. 그때마다 시즌 6 리뷰들을 읽으며 마음을 다잡고 있어요❤️


알라딘에서 《은수저》리뷰를 보다가 "스치듯 지나간 유년의 아름다움(슬픔)을 종이 위에 영원토록 박제"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리뷰를 읽었는데요. 이 책을 정말 잘 설명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했어요👏 좋은 소설을 읽으면 세상이 약간 변했다고 느껴지지 않으신가요? 《은수저》는 제가 겪어보지 못한 유년을 절절히 경험하게 하면서, 제게도 아름답고 슬픈 유년이 있었다는 걸 말해주는 듯했어요. 


어쩐지 명절을 앞두고 읽기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오늘은 박생강 소설가가 《은수저》를 먼저 읽고 쓴 리뷰를 보내드릴게요💌


참, 곧 흄세 인스타그램(@boooook.h)에서 '식탁 위의 큐피드' 이벤트를 진행할 예정이에요. 기억에 남는 음식이나 한 끼를 적어주시면 추첨을 통해 시즌 6 가운데 한 권을 드리는 건데요. 저는 아직도 구현에 실패하고 있는 부모님의 감자볶음이 떠오르네요. 지금의 반려인과 먹었던 첫 번째 식사 자리도 생각나고요. 많이 참여해주시길 바라요😂


* 흄세 레터는 다음 주 한 주 쉬어갑니다.  

우리 마음속엔 서랍이 있다


나의 서재에는 이런저런 잡동사니를 모아둔 책장 서랍이 있는
데, 나는 오래전부터 그 안에 작은 상자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 (9쪽)


어떤 소설은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이야기가 마음에 스며든다. 나의 기억과 공명하는 소설일 때 더욱 그러하다. 특히 그것이 내 유년의 기억, 그때의 감성과 비슷할 때라면 더더욱.

그런 작가의 소설을 발견하면 작가의 손을 잡고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당신이 병약한 아이였다면, 그래서 친구들과 뛰어놀기보다 방 안에서 작은 장난감과 혼자 대화를 나누었던 시간이 많았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에 더욱 공감할 것이다. 또 당신이 울보 남자아이여서 남자 어른들에게 혼난 기억이 많았다면 나와 비슷한 감상으로 이 소설을 읽을 것이다.

게다가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은수저는 당연히 그렇겠지만 금수저, 은수저를 나누는 계급론의 수저는 아니다. 병약했던 주인공에게 이모가 약재를 떠먹이던 은수저가 소설의 제목이다. 나에게도 그런 수저들이 기억에 남아 있다. 은수저는 아니고 스테인리스 수저였지만 쓴약을 어머니가 물에 녹여 먹여주던 그런 숟가락이 있었다.
설령 병약하고 친구가 없다 한들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은 지루하지 않다. 나 역시 그랬다. 나의 유년도 병약해서 늘 방 안에 누워 장난감과 함께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보내곤 했다. 또 마루에 누워 구름만 바라보아도 즐거웠다. 구름이 사자로 코끼리로 한번은 권총을 찬 카우보이로 변하는 걸 지켜볼 때의 즐거움이란. 그때 구름의 풍경이 마흔 중반인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래서 《은수저》의 주인공이 이모가 ‘문수보살님’이라고 이름 붙인 구름을 홀로 지켜보다 구름이 요괴처럼 변하자 무서워서 서둘러 도망가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늘의 구름만이 아니다. 아이에게는 모든 세상의 풍경이 어른보다 훨씬 경이롭고 생생하다. 나 역시 그때 맡았던 뒤뜰 흙의 냄새와 달콤하고 짭짤한 군것질거리의 맛과 고소하게 바삭거리는 잘 구운 김의 식감을 아직도 떠올릴 수 있다. 반대로 싫어하는 가지, 굴 등의 흐물흐물한 식감과 맛도 여전히 기억난다. 유년 시절의 눈과 코와 귀와 혀의 감각은 어른보다 훨씬 예민하고 호기심으로 충만한 것일까? 싫어하는 맛과 싫어하는 냄새란 어떤 공포 영화보다도 더 무서웠다.
《은수저》에는 유년의 감각으로 보고, 듣고, 맛본 세계가 오롯이 들어 있다. 그 감각을 나카 간스케는 섬세하지만 어른의 때가 묻지 않은 문장으로 옮겨놓는다.


과일이나 물고기 모양으로 만든 설탕 과자, 물엿에 절인 채소, 찹쌀가루를 길쭉하게 굳혀 만든 막대 과자. 대나무에 넣어 만든 양갱은 한입 물면 청죽 향을 내뿜으며 혀 위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사탕을 빨아 먹으면 그 속에 그려진 사람 얼굴이 녹아 울거나 웃으면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초록과 빨강 줄무늬 탕을  오도독 깨물어 쪽쪽 빨면 구멍 속에서 달콤한 바람이 나온다.(35쪽)


그렇기에 《은수저》를 읽는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유년의 달콤함과 쓴맛, 그 외에 어떤 감정인지 헤아리기 어려워 그저 엉엉 울고 말았던 순간들을 다시 맛보는 것.


나는 언제나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경탄하며 주변 사물을 바라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많은 것에 익숙해지면서 그것이 그저 당연한 일이라고 받아들이며 지나치기 마련이지만, 생각해보면 매년 봄마다 새싹을 틔우는 나무도 해마다 새삼 우리를 놀라게 하기 마땅하며…….(170쪽)


《은수저》는 박식하고 거대하고 독자가 고민하며 읽어야 하는 소설이 아니다. 유년과 소년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작고 소박하고 오묘하고 사랑스러우며, 계피의 맛처럼 달콤하면서 아련하게 맵다.

누구에게나 마음속 인생 서재에도 잡동사니를 모아둔 작은 서랍이 있다. 그 서랍을 열면 우리들 유년의 세계는 그대로 남아 있다. 만약 그 서랍이 잠겨 있다면 나카 간스케의 《은수저》를 천천히 음미하며 읽기를. 세상에 눈뜨는 병약한 아이의 이야기와 함께 잠겨 있던 유년의 서랍이 다시 열리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박생강 | 2005년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펴낸 책으로는 소설집 《교양 없는 밤》, 《치킨으로 귀신 잡는 법》, 장편소설 《수상한 식모들》, 《내가 없는 세월》, 《보광동 안개소년》, 《나는 빼빼로가 두려워》, 《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 《에어 비앤비의 청소부》, 《나의 아메리카 생존기》, 《빙고선비》 등이 있다.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은수저
나카 간스케 | 정수윤 옮김

도미, 두부, 가자미, 자두, 밤송이, 담죽 등 음식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식욕이 돋고, 어린 시절을 가만히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추억이 밀려온다.

어린아이의 맑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과 자연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옮겼다. 일본 문학 사상 가장 아름다운 소설로 꼽히며 나쓰메 소세키가 극찬한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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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첨자는 다음 호에서 발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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