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보내는 예순 번째 흄세레터
하룻밤 사이 50년이 흐른 아침에 눈을 뜨고 싶다고, 그러면 안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날이 있어요. 노년이 된다고 세상을 안도하며 살아가는 건 아닐 텐데요. 남은 인생이 잠든 사이 다 흘러가버리는 것. 그것이 저의 회피였어요. 그런 날들의 저를 붙잡고 일으켜 세웠던 건 저의 의지가 아니라 주변의 응원이었습니다. 기요 할멈이 도련님에게 전해주었던, 조건 없고 한도 없는 그런 응원이요.

여름에 선보인 휴머니스트 시즌5. '할머니라는 세계'의 마지막 레터를 보내드립니다. 님의 응원 속에서 이번 시즌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 오늘은 흄세 편집자가 뽑은 《도련님》 미리보기와 추천 콘텐츠와 흄세 에세이 신간인 《작은 미덕들》을 소개해드릴게요.

짧은 가을과 긴 겨울을 부디 무사히 통과하시기를, 저희는 늦지 않게 다음 시즌으로 또 찾아올게요💗

《도련님》 미리보기 1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기요 할멈은 나를 더욱 예뻐했다. 가끔은 어린 마음에 왜 그렇게 나한테 잘해주는지 미심쩍었다. 귀찮네. 그냥 내버려두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이었다. 미안하게 됐다 싶었다. 그래도 기요 할멈은 나를 예뻐했다. 가끔은 자기 쌈짓돈으로 긴쓰바나 매화 전병을 사주었다. 추운 겨울밤이면 남몰래 메밀가루를 사두었다가 어느 틈엔가 자고 있는 내 머리맡에 메밀 삶은 물을 놓고 갔다. 어떨 때는 냄비 우동도 사주었다. 먹을거리만이 아니다. 양말도 받았다. 연필도 받았다. 공책도 받았다. 한참 나중 일이지만 돈도 3엔쯤 빌려줬다. 내가 빌려달라고 한 것도 아니다. 자기가 먼저 내 방으로 가져와서는, “용돈이 궁하지요. 이거 쓰세요” 하며 건넸다. 나는 물론 됐다고 했지만 부디 써달라기에 못 이기는 척 받아두었다. 솔직히 아주 기뻤다.

그 3엔을 똑딱 지갑에 넣고 품에 찔러 넣은 채 변소에 갔다가 그만 똥통에 퐁당 빠뜨리고 말았다. 별수 없이 우물쩍주물쩍 걸어 나와 기요 할멈에게 사정을 말하자 단숨에 어디서 대나무 꼬챙이를 구해 와서는 자기가 건져주겠다고 나섰다. 얼마 안 가 우물가에서 쏴쏴 물소리가 나기에 가보니 할멈이 대나무 끝에 걸린 똑딱 지갑을 물로 씻고 있었다. 그러고는 지갑을 열고 1엔짜리 지폐 세 장을 펼쳤다. 돈이 갈색으로 변해 무늬가 거의 지워져 있었다. 기요 할멈은 화롯가에서 돈을 말린 뒤 “이제 됐지요” 하며 내게 내밀었다. 슬쩍 냄새를 맡아보고 구린내가 난다고 했더니만, “그럼 이리 주세요. 바꿔다드릴게” 하고는 어디서 어떻게 바꿔치기했는지 지폐 대신 은화로 3엔을 들고 왔다. 그 3엔을 어디다 썼는지 모르겠다. 금방 갚겠노라 말만 하고 안 갚았다. 이제는 열 배로 갚고 싶어도 갚을 길이 없다.(12∼13쪽)

흄's pick

‘기요 할멈’처럼 순수한 애정으로 쏟는 마음은 드러내지 않아도 빛이 나는 모양입니다. 첫 번째 시즌부터 마음을 다해준 ‘세’ 님이 다섯 번째 시즌을 마지막으로 흄세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흄세가 조금이라도 빛날 수 있다면, ‘세’ 님의 덕분임을 여기에 기록해둡니다.

《도련님》  미리보기 2


사람 눈이라는 게 한번 멀면 무섭다. 기요 할멈은 내가 장차 출세해서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면서 공부하는 형은 허여멀겋기만 하고 당최 쓸만한 구석이 없다고 혼자 단정 지었다. 이런 할머니를 만나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인물이 되고, 싫어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망한다고 믿는다. 나는 그때 딱히 뭐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래도 기요 할멈이 된다, 된다 하니까 뭐가 되긴 되겠구나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다. 하루는 기요 할멈에게 내가 뭐가 될 것 같으냐고 물어보았다. “자가용 인력거를 타고 번듯한 대문을 드나들겠지요.” 할멈도 뾰족한 안은 없었던 모양이다.
또 기요 할멈은 내가 독립해서 집이라도 장만하면 따라올 심산이었다. “꼭 저를 데려가주세요” 하고 수차례 간곡히 부탁하기에, 나도 어쩐지 내 집이 생길 것만 같아서 “알았어. 데려갈게”라고 대답은 해두었다. 그런데 상상력이 어찌나 뛰어난지, 도련님은 어느 동네가 좋아요? 고지마치로 갈까요, 아자부로 갈까요? 정원에는 그네를 다는 게 좋겠어요, 응접실은 하나면 충분합니다 등등 자기 멋대로 세운 계획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때는 집 같은 거 관심도 없었거니와 서양 가옥이니 일본 가옥이니 다 필요 없었기에 “나는 그런 데 관심 없어” 하고 대꾸했다. 그러면 또 “도련님은 그렇게 욕심이 없으니까 마음이 예쁜 겁니다”라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기요 할멈은 내가 무슨 소리를 해도 칭찬해준다.(14~15쪽)

랑's pick
날씨가 추워질수록 더 생각나는 책이 라는 걸, 이번 주의 추위를 통해 깨달았어요. 기요 할멈과 도련님처럼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는 가을과 겨울이 되기시를 바라겠습니다.
도련님
나쓰메 소세키 | 정수윤 옮김

일본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 지금까지는 주로 고지식하지만 정의로운 도련님 캐릭터만 강조되었으나 실제 소세키가 친부모에게 외면받고 그들을 조부모로 알았던 사실에 주목해본다면, 그가 창조해낸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기요 할멈’이 조금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세상에 딱 한 명뿐이라도 온전한 내 편에게 받는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 사랑으로 무엇이 변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이 작품은 여전히 세계문학 필독서로 꼽힌다. 원문의 활기를 그대로 살려 생동감 있게 번역했다.
👀편집자의 추천 콘텐츠👍  

전시 〈러브 인 파라다이스 뱅크시 & 키스 해링〉

키스 해링과 뱅크시의 주요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예요.

2018년 소더비 경매에서 낙찰되자마자 뱅크시가 액자 속에 숨겨둔 파쇄기를 통해 스스로 그림을 파쇄해버리면서 더욱 유명해진 〈풍선 없는 소녀〉도 만나보실 수 있어요(포스터에 관련 기사를 링크해두었어요). 나들이 삼아 다녀오기 좋은 전시입니다. 무료이고요…….

나쓰메 소세키, 마음

개인적으로 《도련님》만큼 좋아하는 소세키의 작품입니다. 《도련님》에서 보여준 재기 발랄한 모습과는 정반대로 무거운 죄책감과 자괴감을 서술하는 문장에 반했던 기억이 나요. 작품 속 '나'는 가마쿠라의 한 해수욕장에서 '선생님'을 만나 알 수 없는 매력을 느껴요. 그러나 선생님에게선 모종의 거리감이 느껴지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은 유서만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고, 유서에는 왜 마음의 문을 닫게 되었는지 적혀 있습니다. 표지 사진에 서점 링크 걸어두었습니다❤️
🎇신간 출간 알림
흄세 에세이 004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작은 미덕들》이 출간됩니다.
현대 이탈리아 문학의 가장 눈부신 불빛이자 움베르코 에코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소설가로 꼽히는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1944년부터 1962년까지 발표한 11편의 에세이가 묶여 있어요. 긴츠부르그가 통과해온 삶을 사랑, 우정, 인간관계, 직업, 전쟁, 교육이라는 주제 속에서 탐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여진 속에서 실존적 의미가 고갈된 당시의 시대상을 해부학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비극과 고난을 통과하며 형성되는 삶에 대한 태도가 물질적인 성공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예리하게 이해했는데요.
작가와 책을 자세히 만나볼 수 있는 레터 특별호도 깜짝 발송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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