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보내는 쉰네 번째 흄세레터
잊고 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옛 동네를 지날 때나 한 시절의 주제가 같은 음악을 오랜만에 들었을 때 혹은 서랍에서 우연히 발견한 물건들 속에서도요. 물론 잊고 싶은 기억이 눈치 없이, 또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어떤 날에는 마치 사고를 당한 것 같지만요. 그래도 그런 날들을 통과해서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억울하게 여겨선 안 되겠죠.

《마마 블랑카의 회고록》은 삶에서 소중한 기억을 잊지 않는 것이,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방법이라고 말하는데요. 이번 레터를 통해 님을 있게 한 기억들이, 되도록 기쁘고 소중한 기억들이 떠오르기를 바라며 오늘은 흄세 편집자가 뽑은 《마마 블랑카의 회고록》 미리보기와 추천 콘텐츠를 소개해드릴게요.

《마마 블랑카의 회고록》 미리보기 1


4월 어느 날 아침 일찍, 분수대에 모여 있고 처마 위를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지저귀는 작은 새들이 다정한 음악회를 열기도 전에 마마 블랑카는 마치 시골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아무 고통 없이 조용히 하늘나라로 길을 떠났다. 그녀가 일생 동안 자신이 원했던 대로 잘 닦아놓은 그 길은 마음에 가득한 기쁨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고이 잠든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반쯤 벌린 채 저 멀리서 복자들과 함께 합창하고 있었다. 그녀의 영혼처럼 가볍고 화사한 관이 무난하게 대문을 지나갈 때, 시야에 들어온 마지막 각도로 보면 그녀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모든 이를 향해 저 높은 곳에서 외치는 것 같았다.

“모두 안녕히 계세요. 그동안 여러모로 신세 많았습니다!”(22~23쪽)

흄's pick

언젠가 세상을 떠날 때... 이런 쿨한 인사 한마디만 남기고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마마 블랑카의 회고록》 미리보기 2


초라한 실패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을 뿐 속물이 아니기 때문에 촌스럽거나 차림이 남루한 사람들 곁에 공공연히 나타나도 전혀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이처럼 서론이 장황해졌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이 장의 제목을 ‘비센테 이’라고 정했다. 미리 고백하자면, 이 사람은 옷을 거의 입지 않고 다녔던 터라 초라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사람보다 더 형편없었다. 부디 나를 용서해주시기를. 다만 가장 꼴불견인 사람이 일반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사람인 법이니 너그럽게 이해해주기 바란다. 나는 육체가 늘 자신을 치장함으로써 정신에게 해를 끼친다고 믿는다. 이렇게 말하는 건 서글프지만, 그것은 가혹한 신념이다. 육체의 사랑스럽고 신성한 우아함이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영혼에게 옷도, 빵도 주지 않은 채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만든 아름다우면서도 비열한 도둑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옷차림이 초라하다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공동소유는커녕 소나 오두막집, 손바닥만 한 밭뙈기조차 없는 피에드라 아술 농장의 우직한 일꾼 비센테 이는 어린 시절 우리를 든든하게 지켜주던 친구였다. 조막만 하지만 부채처럼 앞으로 갈수록 넓어지던 그의 새까만 맨발에서 이 세상의 흙위로 다섯 발가락이 꽃처럼 피어나지 못한 지도 벌써 70년이 다 되어간다. 하지만 그리운 그의 모습은 희미하지만 영광스럽게도 여전히 나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당신의 거리, 당신의 조각상, 그리고 당신의 무덤이 여기 남아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들처럼, 당신의 용기와 당신이 베푼 덕행 덕분에 당신은 그런 것들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언젠가 나도 그곳을 지나갈 것이고, 모든 도시도! 지나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때, 그리고 그제야 당신에 대한 기억도 내 유골 사이에 묻힌 채 나와 함께 죽어가리라.(123~124쪽)

랑's pick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 왜곡된 기억과 잊어버렸었던 기억까지... 이 모든 기억을 동원해서 잊지 않아야 하는 사람과 시절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마마 블랑카의 회고록
테레사 데 라 파라 | 엄지영 옮김

베네수엘라 최초의 위대한 여성 작가이자 가장 탁월한 라틴아메리카 여성 작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테레사 데 라 파라의 대표작. 국내 초역. 일흔다섯 살의 할머니가 눌러쓴 회고록이자 지금은 사라진 보물 같은 낙원으로서의 어린 시절과 베네수엘라 농장 사회의 아름다운 세계를 시적인 문체로 그린 소설이다. 마마 블랑카가 들려주는 조곤조곤하지만 유머러스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삶의 무한한 지평을 열어주는 '이야기 박물관'의 역할을 한다. 베네수엘라를 넘어 범세계적인 고전으로 자리 잡은 작품.
👀편집자의 추천 콘텐츠👍  

《작은 수집, 스몰컬렉팅》

“무엇이든 수집할 수 있습니다. 내 눈에 아름답다면요.”

흄세의 옆 팀에서 만든 책이기도 하지만, 뒤표지의 이 문장을 보고는 무릎을 탁 치고 말았습니다. 우표, 각종 티켓, 돌멩이... 등등 쓸데없는 것들을 즐겨 모으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거든요.

남들이 뭐라건 내 눈에 아름답고 소중한 삶을 산다면 그게 최선의 삶이 아닐까요.

“손 글씨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는 리넨 종이 오백여 장”에 자신의 삶을 한 줄 한 줄 모아놓은 마마 블랑카처럼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2013

"당신의 기억, 행복한가요?"
주인공 '폴'은 어린 적 부모를 잃은 충격으로 말도 잃게 됩니다. 이모들은 폴을 피아니스트로 만들려고 했지만 어른이 된 폴은 댄스교습소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것이 전부예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이웃 마담 프루스트의 집을 방문한 폴은 그녀가 키우는 작물을 먹고 과거의 상처와 추억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기억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왓챠와 웨이브에서 감상하실 수 있고 포스터에 예고편 링크 걸어두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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