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가장 의아한 순간은,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달은 에블린이 남편 웨이먼드를 포옹하며 눈앞에 놓인 비루한 버전의 인생을 선택하는 때입니다. 에브리씽과 에브리웨어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존재’의 입장에서, 그중 가장 초라한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이 저는 합리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는데요. 오히려 이 영화의 빌런인 조부 투바키가 하는 짓들이 훨씬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삶이란 다 무의미한 것이며, 무슨 짓을 하든 그냥 외딴 우주에 박혀 있는 돌덩이와 다를 바 없는 셈인데 왜 움직이고, 왜 노력하고, 왜 갖지 못한 것에 안타까워하며, 왜 별것도 아닌 것들에 일희일비하느냐는 것입니다.



[NO.34]


성의를 봐서 한 번 받아들여 보겠습니다.


2022년 10월 29일

  


에블린의 선택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과는 별개로, 이 선택 자체는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이 전개는 말이 안 되긴 하지만, 낭만적입니다. 솔직히 이 세상이 다 무의미하다는 식의 결론으로 이야기를 끝맺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다 같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죽자!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결국 이 영화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영화에 나오는 말로 다시 표현하자면, ‘무엇 하나 성공해 본 적 없는 것 같은 비루한 일상’을 무한히 - 멀티버스만큼 - 늘린 다음, 토닥여주고 포옹해 주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에블린이 일상으로 돌아가는 지금의 결말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결말이 제공하는 메시지는 사실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많은 힐링 영화들처럼 <에에올> 역시 “OO야 힘내, 성공하지 못해도 괜찮아, 네 인생도 소중해”라고 말하는 영화입니다.


다만 이 영화가 특별한 건, 위로에 엄청난 성의가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성의냐면 상대를 위로하기 위해 멀티버스까지 창조해 내는 성의입니다. 우리가 가끔 힘들어서 상대방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때, 영혼 없는 위로를 받게 되면 오히려 기분이 나빠지는 경우가 있잖아요. 반면 이 영화의 감독 다니엘 콴과 다니엘 쉐이너트, 합쳐서 ‘다니엘스’는 멀티버스를 들먹입니다. 에블린아, 일이 잘 안 풀려서 힘들지? 언제부터 잘못된 것인가 자꾸 따져보게 되지? 특히 그때 남편 웨이먼드를 따라 미국에 오는 것이 아니었다는 후회를 가장 많이 하지? 잠깐 기다려봐. 내가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줄게. 니가 만약 웨이먼드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말이야, 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가 됐을 거야.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 그걸 이해하기 위해선 일단 


멀티버스가 있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여야 해.


저는 다니엘스의 황당무계한 이야기와 에블린의 비합리적인 선택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들의 성의가 감동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감동적인 것은 성의입니다.


성의에 담긴 마음입니다.


“다들 어쩔 수 없잖아요. 울지 마요. 혼자만 그런 게 아니니까”


<사라진 시간>의 주인공 형구(조진웅)가 영화 후반부 초희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 영화는 형구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영화입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우실 수 있겠지만 일단 한 번만 받아들여 주시길 바랍니다. 멀티버스보다는 조금 더 쉬우니까요.


형구는 형사입니다. 형구는 어느 날 화재로 인해 세상을 떠난 교사 부부의 사건을 조사하러 한 작은 마을에 가게 됩니다. 조사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이 권하는 술을 마시게 되고, 술에 취해 그 화재가 일어난 집에서 잠에 들게 됩니다. 그리고 눈을 뜨니 형사 형구는 교사 형구가 되어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 됐습니다. 아무런 특별한 장치 없이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이걸 글로 적어도 이렇게 말이 안 되는데, 당연히 당사자인 형구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해서 현실을 부정합니다. 경찰서에 찾아가 하소연을 하기도 하고, 똑같은 장소에서 다시 한번 술을 잔뜩 먹은 뒤 잠을 자보기도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부정만 하다가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그리고 초희를 만납니다. 형구는 이제 슬슬 이 현실을 받아들이며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를 만나도 자신을 도와달라며 현실을 부정하던 형구는, 이제 그 누구를 만나도 자신이 형사였다, 아니 형사’이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초희를 만납니다.


초희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누구한테 자신의 이야기를 잘 털어놓지 않았던 초희는 이날 형구와의 하루가 마음에 들었는지, 형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전 아픔이 있어요. 남들이 모르는. 밤이 깊어지면 전 다른 사람이 돼요.”


초희가 자신이 해리성 정체감 장애, 일명 다중인격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자 형구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 그거 알아요. 그거 아프죠. 그게 많이 아파요.”


그렇게 이어서 위에 적었던 ‘어쩔 수 없으니 울지 말라’는 대사가 나오며 영화는 곧 마무리됩니다. 결국 <사라진 시간>이라는 영화 역시, 사람들을 위로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현실에서 꼭 정신 질환이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내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영화일 뿐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런 영화는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 역시 말도 안 되는 어떤 기발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그 성의가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나 <사라진 시간> 두 영화 모두, 누군가에겐 장난 같은 영화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도 안 되는 멀티버스가 나오거나, 갑자기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영화라니. 심지어 영화 속 문제도 딱히 명쾌하게 해결이 되지 않은 채 끝을 맺습니다. 대체 이런 영화를 왜 만드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번만 그 부자연스러움을 그 자체로 받아들여 본다면, 멀티버스만큼 무궁무진한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영화만큼은 그 최소한의 성의를 갖춘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쓴 제 성의를 봐서라도…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넷플릭스 추천작]
<그 남자, 좋은 간호사>

연쇄살인범 찰스 컬렌의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 'THE GOOD NURSE'를 영화화한 영화로, 연기 괴물 에디 레드메인과 또 다른 연기 괴물 제시카 차스테인이 주연을 맡은 영화입니다. 특히 에디 레드메인은 <신비한 동물사전>의 천재 박사 뉴트, <대니쉬 걸>의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는 화가,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서 루게릭 병을 앓고 있는 스티븐 호킹 등 '특별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인물을 연기할 때 늘 괴력을 발휘했던 배우인데요. 이번 영화에서도 역시 다른 역할들에 비해 뒤지지 않는 괴력을 선보입니다. 제시카 차스테인의 연기가 에디를 서포팅해주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보다가 한 두어 번 실제로 깜짝! 놀랐던 것 같습니다. 사운드 조절 잘하시길 바랍니다.
재밌게 읽으셨나요?
이번 원데이 원무비가 재밌으셨다면
평생 무료로 원데이 원무비를 운영하고 있는 연재자 김철홍에게
좀 더 열심히 하라는 의미에서 커피 한 잔을 사주시면 어떨까요?

[ 계좌번호 : 신한 110 - 253 - 914902 ]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