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보다는 둘, 둘보다는 열
August 22, 2023
아피스토의 풀-레터 vol.24
  
🌿 식물을 사랑하는 당신께


#1
언젠가 보르네오섬이 원산지인 베고니아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식물 이름표에는 베고니아 이름 뒤에 ‘Begonia from Sarawak(사라왁이 보내온 베고니아)’이라고 적혀 있었지요. 저는 한치의 의심없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라왁이라는 분이 보냈구나!’

그후 보르네오섬에서 온 식물들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그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베고니아만이 아니었습니다. 호말로메나, 라비시아, 아르디시아라는 식물 이름 뒤에도 어김없이 ‘사라왁’이 적혀 있었지요. 사라왁은 틀림없이 보르네오섬에서 유명한 플랜트헌터이거나 식물계의 큰손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식물을 수집하면 할수록 더 많은 큰손들의 이름을 만났습니다. 그중에는 링가, 자바, 수마트라, 칼리만탄 씨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들의 이름에 강한 의구심이 들게 된 일이 있었는데, 보내온 사람의 이름이 타일랜드, 베트남, 페루 씨였기 때문입니다. 그때서야 저의 무지함을 깨닫게 되었죠.

‘아차!’

사라왁은 식물계의 큰손이 아니라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섬에 위치한 주 이름이었습니다. 링가 씨도 자바 씨도 모두 말레이시아의 지명이었습니다. 심지어 사라왁의 면적은 우리나라의 1.2배였고, 연중 강수량은 우리나라의 3배가 넘었습니다. 2천 종의 나무와 1천 종의 난초, 757종의 양치식물이 살고 있는 천혜의 보고였습니다. 사라왁은 멸종위기종인 오랑우탄의 서식지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사라왁 씨든 사라왁 주든 저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라왁이라는 이름은 저에게 온 순간 ‘나의 열대’로 각인되었으니까요. 저는 1년 내내 우기인 열대의 밀림 사라왁을 상상하며 그동안 모아온 식물들을 하나하나 테라리움장에 옮겨 심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식물들은 헌 잎을 떨구고 새 잎을 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되었다는 신호였습니다. 식물들은 마치 원래부터 여기에 있었던 것처럼 자리를 잡았습니다. 낯선 열대 사라왁으로부터 온 식물들이 어느덧 ‘나의 열대’의 일부가 되어갔습니다. 그 해 여름, 저는 테라리움을 감상하면서 '자뻑' 일기를 남겼습니다. 

나의 정글- 
보르네오섬을 깍뚝썰어놓은 듯한
'작은 열대'에 도취되어
나는 보르네오가구 붙방이장처럼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네 그려.


#2
보르네오섬의 사라왁은 12%가 이탄 습지로 덮혀 있습니다. 이탄 습지는 식물의 잔해가 물이 고인 상태에서 수천 년에 걸쳐 퇴적되어 만들어진 땅을 말합니다. 면적은 지구 표면의 3%에 불과하지만, 전 세계 1/3의 이산화탄소를 저장하고 있습니다. 이탄 습지가 아마존의 열대우림과 함께 지구의 탄소 저장고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분갈이 흙의 주요 배합재료로 쓰이는 피트모스가 바로 이탄 습지에서 채취됩니다. 피트모스는 물과 영양분을 보관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세균 번식을 막을 수 있어 오래전부터 식물집사에게 사랑받아왔지요. 이탄 습지는 사라왁뿐 아니라 북유럽과 러시아, 캐나다 등지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특히 20세기 초부터 20세기 말까지 유럽에서는 이탄 습지의 피트모스를 무분별하게 채취했습니다. 피트모스는 원예용 식물과 농작물을 키우는 데 좋은 재료이기도 했지만 연료와 가축의 먹이로도 유용했거든요. 인간은 수십 년 동안 이 쓸모 있는 피트모스를 채취해오면서 결국 수천 년 동안 퇴적되어온 이탄 습지가 순식간에 고갈 위기에 처해집니다. 

영국의 이탄 습지는 90%가 파괴되어 매년 1,000만 톤의 이산화탄소가 대기중에 배출되고 있습니다. 2015년과 2019년, 인도네시아의 이탄 습지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자 단 며칠 만에 10억 톤의 이산화탄소가 빠져나왔습니다. 사라왁도 예외는 아니었죠. 이곳에 팜나무를 심기 위해 물을 빼고 벌채를 하면서 파괴되어 갔습니다. 

이탄 습지의 생태계가 파괴되면 기후변화에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이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이탄 습지를 보유한 나라들은 부랴부랴 이탄 습지를 보호하기 시작했지요. 영국 정부는 이미 2024년부터 가드닝용 피트모스의 판매를 금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넓은 이탄습지를 보유한 캐나다 역시 원예용 피트모스를 채취하는 동시에 복원 작업을 병행하면서, 피트모스의 지속가능한 사용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규제와 관리를 하고 있고요. 미국의 한 업체는 폐지를 재활용하여 피트모스를 대체하는 분갈이흙을 개발하여 판매하기도 합니다. 

다행히 지금은 이탄 습지를 살리기 위해 전 지구적인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중한 식물을 예쁘게 키우기 위해 지구가 멍들어왔다는 것도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지요? 
   

아피스토 드림
📺 아피스토, 라이브 방송도 합니다
오늘의 풀-레터 어떠셨나요?
당신의 식물 이야기나
식물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답장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