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젠가 보르네오섬이 원산지인 베고니아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식물 이름표에는 베고니아 이름 뒤에 ‘Begonia from Sarawak(사라왁이 보내온 베고니아)’이라고 적혀 있었지요. 저는 한치의 의심없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라왁이라는 분이 보냈구나!’
그후 보르네오섬에서 온 식물들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그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베고니아만이 아니었습니다. 호말로메나, 라비시아, 아르디시아라는 식물 이름 뒤에도 어김없이 ‘사라왁’이 적혀 있었지요. 사라왁은 틀림없이 보르네오섬에서 유명한 플랜트헌터이거나 식물계의 큰손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식물을 수집하면 할수록 더 많은 큰손들의 이름을 만났습니다. 그중에는 링가, 자바, 수마트라, 칼리만탄 씨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들의 이름에 강한 의구심이 들게 된 일이 있었는데, 보내온 사람의 이름이 타일랜드, 베트남, 페루 씨였기 때문입니다. 그때서야 저의 무지함을 깨닫게 되었죠.
‘아차!’
사라왁은 식물계의 큰손이 아니라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섬에 위치한 주 이름이었습니다. 링가 씨도 자바 씨도 모두 말레이시아의 지명이었습니다. 심지어 사라왁의 면적은 우리나라의 1.2배였고, 연중 강수량은 우리나라의 3배가 넘었습니다. 2천 종의 나무와 1천 종의 난초, 757종의 양치식물이 살고 있는 천혜의 보고였습니다. 사라왁은 멸종위기종인 오랑우탄의 서식지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사라왁 씨든 사라왁 주든 저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라왁이라는 이름은 저에게 온 순간 ‘나의 열대’로 각인되었으니까요. 저는 1년 내내 우기인 열대의 밀림 사라왁을 상상하며 그동안 모아온 식물들을 하나하나 테라리움장에 옮겨 심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식물들은 헌 잎을 떨구고 새 잎을 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되었다는 신호였습니다. 식물들은 마치 원래부터 여기에 있었던 것처럼 자리를 잡았습니다. 낯선 열대 사라왁으로부터 온 식물들이 어느덧 ‘나의 열대’의 일부가 되어갔습니다. 그 해 여름, 저는 테라리움을 감상하면서 '자뻑' 일기를 남겼습니다.
나의 정글-
보르네오섬을 깍뚝썰어놓은 듯한
'작은 열대'에 도취되어
나는 보르네오가구 붙방이장처럼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네 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