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OUND Vol.84 <유리 벽 건너기> 정지돈—작가

온전한 관찰자의 걸음

비가 내리고 그치고, 해가 다시 뜨길 반복하는 요즘입니다. 우리는 어느새 여름의 한가운데에 있어요. 해가 내리쬐는 낮 시간을 피해 한적한 새벽, 차분한 밤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무덥고 습하지만 이 계절의 자유롭고 시원한 틈새를 찾아 산책을 나서고 싶어지네요. 7월을 시작하며 발행된 《AROUND》 84호의 주제는 '산책자(A Walker)'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산책 본연의 의미에 관해 생각했어요. 여유를 가지고 걷는 마음, 그사이에 피어나는 휴식과 쉼의 시간, 걸으며 새롭게 발견하고 깨달아가는 가치에 관해 담았습니다. 오늘 뉴스레터에서는 '도시 산책'을 주제로 함께 이야기를 나눈 정지돈 작가님의 추천 영화를 소개해요. 온전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도시는 걷는 그의 영화 이야기, 지면에 실리지 않은 정지돈 작가의 비하인드와 인터뷰의 한 장면을 여기에 공개합니다.

07.07. Another Story Here―책 너머 이야기

AROUND Vol.84 산책자(A Walker)

<유리 벽 건너기> 정지돈—작가


07.21. What We Like―취향을 나누는 마음

어라운드 사람들의 취향을 소개해요.


08.04. A Piece Of AROUND―그때, 우리 주변 이야기

오늘 다시 보아도 좋을, 그때의 이야기를 소개해요.

<유리 벽 건너기>

정지돈—작가

그에게 감히 ‘도시 산책자’라는 이름을 붙여봅니다.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

이번 호 주제어가 ‘산책’이어서 자연스럽게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이 떠올랐어요. 부제가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죠. 이 글은 현대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에세이로 써보자는 제안에서 시작되었다고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하루에 일어난 이야기예요. 근데 서울에서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한 권으로 엮는 건 너무 억지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서울에만 국한해도 얘기가 단조로울 것 같아서 비교 대상이 될 만한 도시를 함께 써보자 싶었죠. 구보씨에게는 도시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데, 서울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게 왜 파리였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보단… 때마침 파리에 가게 돼서요(웃음). 3개월간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거든요. 워낙 가보고 싶던 도시이기도 했고, 예술적으로 프랑스란 나라를 좋아했기 때문에 괜찮겠다 싶었어요. 만약 파리가 아니라 다른 도시에 갔다면 이 책엔 다른 도시 이야기가 실렸겠죠? 


이 책의 주요 키워드는 ‘도시’와 ‘산책’일 거예요. 두 단어가 지돈 씨에겐 어떤 의미예요? 

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시골보단 도시가 좀더 편해요. 음… 근데 저 자연도 좋아하거든요. 자연을 걷는 것도 꽤 즐기는데, 자연은 너무 크고, 지루해요. 자연과 인공이 적절하게 조화된 곳이 언제나 산책하기에 가장 재미있는 것 같아요. 도시와 산책은 정의 내리려고 해본 적도 없고, 정의할 수도 없어서 이야기하기가 어려운데요. 이 책을 쓰기 위해 산책에 관해 생각하면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해 보면 산책이란 개념이 옛날부터 있던 건 아닐 거예요. 이동 수단이 없던 때는 모두가 걸어 다녔으니 굳이 산책이란 단어가 필요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산책이란 말이 처음에 어디서 탄생했는지 아세요? 

 

어, 아니요. 

그리스 시대 철학자들 사이에서 나온 말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학파를 소요학파라고도 하는데요. 그 당시 철학자들은 두세 명씩 짝을 지어서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며 학당을 걸었대요. 그게 바로 산책이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엔 산책에 ‘함께할 사람’과 ‘대화’가 있던 거죠. 근데 지금은 산책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한적한 곳을 거니는 이미지’를 가장 먼저 떠올려요. 도시가 발달하면서 시끄러워지고, 만나는 사람도 많아지고, 스트레스도 생기니까 이젠 한적한 곳에서 나한테 집중하면서 보내는 시간을 산책이라 부르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누군가와의 대화가 아니라 나에게 집중하는 일이니까요. 

 

산책의 정체성도 유동적으로 변하는 거네요. 지돈 씨가 좋아하는 산책은 어떤 유형이에요? 

사람들 사이에서 벽을 느끼는 거요. 벽이 있다는 말은 보통 부정적으로 쓰이는데요. 저는 사람들 사이에 있되,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할 때가 제일 좋아요.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카페와 영화관에 가도 아무도 저한테 말을 걸지 않고 관계하지 않는 산책이죠. 그런 가운데 저는 사람들이 걷고, 뛰고, 뭔가 하는 모습을 자유롭게 지켜볼 수 있을 때, 그게 가장 이상적인 산책 같아요. 철저한 관찰자가 되는 거. 

 

사람들 보는 게 왜 재미있어요? 

사람이란 존재는 참 이상하잖아요. 다들 뭘 하는지 궁금해요. 

 

그럼 사람이 없는 곳은 굳이 산책하지 않아요?

하죠. 사람들이 꼴 보기 싫을 때(웃음). 사람이 없는 곳을 걸으면 좋아요. 근데 금세 지루해져요. 지루해지면 사람 있는 데로 가고 싶고, 사람 있는 데서 산책하면 또 피곤해지니까 다시 사람 없는 곳을 찾게 돼요. 근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그게 뭐야. 이도 저도 아니네.” 한단 말이죠. 그런 게 아니라, 전 정말로 사람이 많은 곳도, 없는 곳도 산책하는 걸 좋아하는데… 이걸 이해시키기가 참 어려워요.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진짜 좋은 지점은 사람이 없는 곳과 있는 곳을 번갈아 움직일 때, 그사이의 ‘변화하는 감각’인 것 같아요. 

 

구체적이고 재미있네요. 좀더 들어보고 싶어요. 

프라하에 갔을 때 얘기를 해볼게요. 카를교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다리일 거예요. 그만큼 유명하니까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가는 골목이 엄청 좁거든요. 그 틈에서 떠밀리듯 걸어가야만 하는 거예요. 저 멀리 카를교가 보이긴 하는데,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이 관광객의 인파와 인구 밀도를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고요. 정말 미칠 것 같았어요.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을 때 시선을 돌렸는데, 텅 빈 골목에 중정이 하나 보이는 거예요. 일단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서 방향을 틀어 무작정 중정으로 피했어요. 사람들로 가득 찬 저쪽과는 달리 쥐 죽은 듯 조용한 공간이었죠. 예전에 프라하의 귀족이 살았던 곳을 시립미술관으로 운영하는 것 같았어요. 마침 전시를 하고 있길래 표를 끊으려고 하는데 부스도 없이 하얀 테이블만 덩그러니 놓여 있더라고요. 할머니 두 분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고요. 표를 끊고 전시장으로 들어가니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어요. 작품도 좋고 공간도 멋졌죠. 근데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굉장히 묘하게 느껴졌어요. 이 공간만 벗어나도 카를교로 가려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 있는데, 전 바로 옆 공간에서 아무도 없는 전시를 즐기고 있는 거잖아요. 그 기분이 왠지 흐뭇하고 좋더라고요.

산책과 지돈, 지돈과 영화

정지돈 작가님은 《영화와 시》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나는 중학교 때 영화 잡지를 정기구독하기 시작했고(《스크린》이었다) 고등학교 때 《키노》를 봤다.”고요.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해 영화와 곁 하며 살아와서일까요,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에도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해요.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리프라이즈>(2006)라 밝히며 “오슬로의 문청 필립과 에릭의 흥망송쇠를 다룬 청춘…… 영화다.”라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죠. <리프라이즈>를 보지 않은 저로서는 청춘이란 단어 뒤에 줄임표가 이다지도 가지런히 붙은 이유가 무얼까 궁금해지네요. 이번 주말엔 <리프라이즈>를 챙겨 보자고 마음먹으며, 지돈 씨에게 ‘산책’ 하면 떠오르는 영화를 몇 편 추천해 줄 수 있겠느냐 물었어요. 몇 편의 영화 제목이 도착합니다. 어… 한 편 빼고는 모두 낯선 제목이네요. 이번 여름에는 나머지 세 편을 찾아 볼 계획입니다. 뒹굴면서 보고 나면 반드시 산책이 하고 싶어질 테죠!

에릭 로메르 <파리의 랑데부>(1995)


파리, 그리고 청춘들의 사랑과 우연이 이어진다. 섬세한 아이러니가 뒤섞인 세 편의 에피소드. 혼란스러운 감정을 겪는 이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아름다운 파리의 풍경이 함께 일렁인다.

요아킴 트리에 <오슬로 8월 31일>(2011)


약물 중독자 ‘앤더슨’은 치료센터의 인터뷰 프로그램 덕에 하루 동안의 자유를 얻게 된다. 영화는 노르웨이의 한적하고 쓸쓸한 거리와 잔잔한 그의 일상을 조용한 시선으로 비춘다. 지루한 누군가의 하루가 깊은 흔적을 새길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사랑을 카피하다>(2010)


영국인 작가 ‘제임스’와 그의 책을 좋아하는 프랑스인 골동품 가게 주인장 ‘엘르’. 투스카니에서 만난 두 사람은 뜻밖의 하루를 함께 보내게 된다. 서로에게 점점 가까워질 때쯤 장난스럽게 시작한 부부 역할극. 진실과 거짓 사이의 사랑이 서서히 시작된다.

톰 앤더슨 <로스엔젤레스 자화상>(2003)


톰 앤더슨의 시선으로 비춘 로스앤젤레스. 수많은 매체에서 다룬 이 도시가 배경, 캐릭터, 어떤 대상으로 소비된 이야기가 이어진다. 영화 속에 풀어진 그만의 에세이. 익숙한 이 도시의 또 다른 이면과 마주한다.

당신의 산책 플레이리스트를 들려주세요

선선한 날씨, 적당한 바람, 기분 좋은 햇살.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밖으로 나설 채비를 합니다. 귓가에 이어폰, 헤드셋을 장착하고 오래된 아이팟을 꺼내 오늘의 오프닝 곡을 찾아보아요. 님은 산책할 때 어떤 음악을 듣나요? 풍경에 집중하기 위해 연주곡을 듣는지, 매일 걷는 길을 특별하게 보이게 하는 님만의 마법 같은 곡이 있는지 궁금해요. 걸으며 듣는 음악은 훗날 우리가 걸었던 그 거리를 떠올리게 할 거예요. 지금 바로 님의 플레이리스트를 열어 공유해 주세요. 우리 함께 걷고 듣고 느끼며 나아가 볼까요?

세차게 내리던 비가 그친 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시간에 한강을 걸었어요. 습하고 더운 바람이 불던 것도 잠시, 어두워지는 풍경과 함께 몸과 마음의 온도가 내려갔습니다. 걷고 걷다, 잠시 벤치에 앉아 여유로이 산책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왠지 모르게 나오는 한숨과 함께 오늘 걷길 잘했다며 혼잣말을 뱉었어요. 산책이란 이런 게 아닐까요? 안도 섞인 한숨을 주는 것, 아주 쉽게 자유를 찾아 주는 것. 다양한 산책 이야기를 담은 《AROUND》 84호와 함께 산책의 영감을 얻어보세요. 다음 뉴스레터에서는 ‘산책’을 주제로 어라운드 직원들의 취향 이야기를 소개할 예정이에요. 함께 공감하고 나아갈 다음 소식도 기대해 주시길 바라요. 다다음 주 목요일 아침 8시에 만나요. 아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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