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 주제어가 ‘산책’이어서 자연스럽게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이 떠올랐어요. 부제가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죠. 이 글은 현대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에세이로 써보자는 제안에서 시작되었다고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하루에 일어난 이야기예요. 근데 서울에서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한 권으로 엮는 건 너무 억지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서울에만 국한해도 얘기가 단조로울 것 같아서 비교 대상이 될 만한 도시를 함께 써보자 싶었죠. 구보씨에게는 도시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데, 서울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게 왜 파리였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보단… 때마침 파리에 가게 돼서요(웃음). 3개월간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거든요. 워낙 가보고 싶던 도시이기도 했고, 예술적으로 프랑스란 나라를 좋아했기 때문에 괜찮겠다 싶었어요. 만약 파리가 아니라 다른 도시에 갔다면 이 책엔 다른 도시 이야기가 실렸겠죠?
이 책의 주요 키워드는 ‘도시’와 ‘산책’일 거예요. 두 단어가 지돈 씨에겐 어떤 의미예요?
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시골보단 도시가 좀더 편해요. 음… 근데 저 자연도 좋아하거든요. 자연을 걷는 것도 꽤 즐기는데, 자연은 너무 크고, 지루해요. 자연과 인공이 적절하게 조화된 곳이 언제나 산책하기에 가장 재미있는 것 같아요. 도시와 산책은 정의 내리려고 해본 적도 없고, 정의할 수도 없어서 이야기하기가 어려운데요. 이 책을 쓰기 위해 산책에 관해 생각하면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해 보면 산책이란 개념이 옛날부터 있던 건 아닐 거예요. 이동 수단이 없던 때는 모두가 걸어 다녔으니 굳이 산책이란 단어가 필요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산책이란 말이 처음에 어디서 탄생했는지 아세요?
어, 아니요.
그리스 시대 철학자들 사이에서 나온 말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학파를 소요학파라고도 하는데요. 그 당시 철학자들은 두세 명씩 짝을 지어서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며 학당을 걸었대요. 그게 바로 산책이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엔 산책에 ‘함께할 사람’과 ‘대화’가 있던 거죠. 근데 지금은 산책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한적한 곳을 거니는 이미지’를 가장 먼저 떠올려요. 도시가 발달하면서 시끄러워지고, 만나는 사람도 많아지고, 스트레스도 생기니까 이젠 한적한 곳에서 나한테 집중하면서 보내는 시간을 산책이라 부르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누군가와의 대화가 아니라 나에게 집중하는 일이니까요.
산책의 정체성도 유동적으로 변하는 거네요. 지돈 씨가 좋아하는 산책은 어떤 유형이에요?
사람들 사이에서 벽을 느끼는 거요. 벽이 있다는 말은 보통 부정적으로 쓰이는데요. 저는 사람들 사이에 있되,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할 때가 제일 좋아요.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카페와 영화관에 가도 아무도 저한테 말을 걸지 않고 관계하지 않는 산책이죠. 그런 가운데 저는 사람들이 걷고, 뛰고, 뭔가 하는 모습을 자유롭게 지켜볼 수 있을 때, 그게 가장 이상적인 산책 같아요. 철저한 관찰자가 되는 거.
사람들 보는 게 왜 재미있어요?
사람이란 존재는 참 이상하잖아요. 다들 뭘 하는지 궁금해요.
그럼 사람이 없는 곳은 굳이 산책하지 않아요?
하죠. 사람들이 꼴 보기 싫을 때(웃음). 사람이 없는 곳을 걸으면 좋아요. 근데 금세 지루해져요. 지루해지면 사람 있는 데로 가고 싶고, 사람 있는 데서 산책하면 또 피곤해지니까 다시 사람 없는 곳을 찾게 돼요. 근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그게 뭐야. 이도 저도 아니네.” 한단 말이죠. 그런 게 아니라, 전 정말로 사람이 많은 곳도, 없는 곳도 산책하는 걸 좋아하는데… 이걸 이해시키기가 참 어려워요.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진짜 좋은 지점은 사람이 없는 곳과 있는 곳을 번갈아 움직일 때, 그사이의 ‘변화하는 감각’인 것 같아요.
구체적이고 재미있네요. 좀더 들어보고 싶어요.
프라하에 갔을 때 얘기를 해볼게요. 카를교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다리일 거예요. 그만큼 유명하니까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가는 골목이 엄청 좁거든요. 그 틈에서 떠밀리듯 걸어가야만 하는 거예요. 저 멀리 카를교가 보이긴 하는데,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이 관광객의 인파와 인구 밀도를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고요. 정말 미칠 것 같았어요.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을 때 시선을 돌렸는데, 텅 빈 골목에 중정이 하나 보이는 거예요. 일단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서 방향을 틀어 무작정 중정으로 피했어요. 사람들로 가득 찬 저쪽과는 달리 쥐 죽은 듯 조용한 공간이었죠. 예전에 프라하의 귀족이 살았던 곳을 시립미술관으로 운영하는 것 같았어요. 마침 전시를 하고 있길래 표를 끊으려고 하는데 부스도 없이 하얀 테이블만 덩그러니 놓여 있더라고요. 할머니 두 분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고요. 표를 끊고 전시장으로 들어가니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어요. 작품도 좋고 공간도 멋졌죠. 근데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굉장히 묘하게 느껴졌어요. 이 공간만 벗어나도 카를교로 가려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 있는데, 전 바로 옆 공간에서 아무도 없는 전시를 즐기고 있는 거잖아요. 그 기분이 왠지 흐뭇하고 좋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