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기 전에 볼 수 있을까. 그 꽃!
Feb 21, 2023
아피스토의 풀-레터 vol.11
장장 5킬로미터의 잣나무숲길을 걷는 '동학의길'

🌼 식물을 사랑하는 당신께

지난 주말에는 여주 여강길 코스 중 하나인 ‘동학의길’을 걸었습니다. 키 큰 잣나무 군락 사이로 5킬로미터가 넘는 숲길이 펼쳐진 보물 같은 곳입니다. 잣나무 잎이 쌓여 발밑이 폭신할 정도로 사람의 발길도 뜸했죠. 


길을 걷다가 우연히 한 분을 만나게 되어 동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분은 오래전부터 숲해설가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실내에서만 식물을 키운 저로서는 숲 곳곳에서 자라는 식물과 나무 이름에는 까막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눈에는 어느 것 하나 이름 없는 식물이 없었죠. 


숲길을 벗어나 산 아래로 내려오니 조릿대가 한 무더기씩 자라고 있었습니다. 대나무의 품종 중 하나인 조릿대는 1~2미터 정도 키에 가느다란 줄기를 가진 소형 대나무입니다. 숲해설가는 조릿대를 보더니 물 만난 고기처럼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습니다. 


“조릿대가 있다는 건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다는 뜻이에요. 주로 사람들이 많이 심거든요. 곧 마을이 나올 겁니다. 예전에는 조릿대의 잎을 떼어낸 줄기로는 쌀에 섞인 돌을 걸러내는 조리를 만들어 썼어요. 조리로 쌀을 뜨듯이 복도 뜨라는 의미로 ‘복조리’를 만들어서 벽에 걸기도 했고요.”


그의 말대로 조금 더 길을 내려가니 인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조릿대는 그늘에서도 잘 자라고 그 쓰임도 많은 식물이기 때문에 사람이 사는 마을에 무리 지어 심겨 있던 겁니다. 


“조릿대는 번식도 잘돼서 한 뿌리만 심어도 금방 퍼집니다. 여기에 한 무더기 있고, 저 건너편에 한 무더기가 있죠? 따로따로 심은 것 같지만 뿌리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니 각각 다른 개체가 아니라 사실은 다 한 개체라고도 볼 수 있지요.”

“뿌리로 연결되어 있다고요?”

저는 의아한 듯 물었습니다. 

“대나무는 뿌리로 번식을 하는 식물이에요. 땅 밑으로 기어서 새 줄기를 올리죠. 그러니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땅 밑으로 뿌리가 기어서 길 건너편에 한 무더기 자라게 되는 겁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식물이 대나무라더니, 과연 뿌리로 번식하는 것도 생존하는 데 한몫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나무의 어린 줄기는 유일하게 잎으로 광합성을 하지 않고 성장해요. 죽순이 나오는 걸 가만히 들여다보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는 걸 볼 수 있지요.”


전직 숲해설가답게 사람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화술이 뛰어납니다. 대나무 중 가장 굵은 죽순대라는 종은 하루에 무려 1미터씩 자란다고 듣긴 했지만, 잎 없이도 그렇게 큰다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잎 없이 성장하는데 영양분은 어디서 흡수를 하지요?”

“좋은 질문입니다. 바로 땅 밑으로 연결되어 있는 어미 대나무가 뿌리를 통해 어린 죽순에게 공급을 해요. 어미 대나무는 이미 잎을 내고 광합성을 하고 있으니 잎으로 받은 영양분을 뿌리로 이동시켜 얼마든지 영양분을 나눠줄 수 있는 겁니다.”


뱃속 아기와 엄마가 탯줄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어미 대나무 하나가 여러 자식들을 키우고 있다니 대단한 생존 전략이 아닐 수 없는 거죠. 


“그래서 대나무는 꽃을 피울 일이 없는 겁니다. 식물은 꽃을 피워 그 씨앗으로 세대를 잇지만, 대나무는 뿌리로 뻗어서 얼마든지 세대를 이을 수 있으니까요.”

“아, 대나무가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우면 죽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어요. 아예 꽃을 피우지 않는 건 아니지요?”

“맞습니다. 대나무와 같이 꽃으로 번식을 하지 않는 식물이 꽃을 피운다는 것은 생명을 다해서 더 이상 뿌리로 번식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와 같아요. 그러니 대나무로서는 뿌리 번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으로 꽃을 피우고 죽는 겁니다. 대나무는 죽을 때도 대나무숲이 한꺼번에 고사합니다. 뿌리 하나로 모두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아니 이분, 숲해설가 시절에 사람 좀 몰고 다녔을 것 같습니다. 식물번식에 이런 화려한 내러티브로 사람을 홀리다니. 휘적휘적 앞서 걸어가는 그를 따라잡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꽃이 피는 주기가 100년일까? 보통 나무들은 1년에 한번씩 꽃을 피워도 죽지 않잖아요?


“대나무는 이름에 ‘나무’가 붙어 있어서 나무인줄 알지만 사실 벼과 식물이에요. 벼의 줄기 속이 비어 있죠? 대나무 줄기 속도 비어 있어요. 벼과 식물의 특징이죠. 그리고 벼가 싹이 나서 열매, 즉 쌀을 맺으면 죽죠? 같은 벼과 식물인 대나무도 꽃 피고 열매를 맺으면 죽습니다.”

빨려든다 빨려들어. 아니, 그런데 왜 1년이 아니고 100년을 사는 거죠? 

“대나무가 꼭 100년을 사는 건 아니에요. 60년 사는 종도 있고, 30년 사는 종도 있어요. 심지어 1년 살고 죽는 종도 있습니다. 단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진화를 거듭하면서 돌연변이 개체들이 나온 거예요. 그래서 최대 120년까지 사는 대나무가 생긴 겁니다.”


저는 대나무의 식생에 대해 알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서정춘 시인의 <죽편>이라는 시에서였는데요. 대나무의 삶을 기가 막히게 표현한 짧은 시입니다. 


죽편(竹篇) 1-여행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서정춘 시인은 대나무를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라고 말합니다. 이 기차는 100년을 내달려 ‘대꽃이 피는 마을’에 도착하죠. 100년 동안 살아온 대나무가 꽃을 피우고 죽는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멋지게 표현해낸 겁니다. 짧은 시 한 편으로 환상여행이라도 떠나고 온 기분이 듭니다. 


그나저나 오늘의 숲해설가는 정년퇴직한 지 10년도 더 지났다고 하는데, 하루에 매일 24킬로미터를 걷는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걷는 내내 그의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더라고요. 모르긴 해도 숲해설가님의 ‘푸른 기차’는 ‘대꽃 마을’에 도착하려면 앞으로 100년은 족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아피스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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