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이사는 단숨에 맥주 한 잔을 비우더니

박 이사는 단숨에 맥주 한 잔을 비우더니 입을 열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잖아? 내 인생이 딱 그랬다고. 뭔가 좋은 일이 생기면 기가 막힐 정도로 나쁜 일이 생기는거야. 초등학교 5학년 때, 생일 파티를 했어. 짝사랑하던 수정이도 오고, 불알친구 재성이, 훈민이, 정운이 등등등 해서 정말 즐거웠지. 그 나이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눈 앞에 어른거릴 정도로. 근데 그 파티가 끝나갈 무렵에 집으로 전화가 왔어. 아버지가 교통사고 나셨다고"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기억나는 가장 어린 기억이 그거야.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였어. 재수를 하고 본 수능에서 대박이 터졌어. 그 정도면 서울대 쓰고도 남았단 말이야. 그리고 그날 함께 재수 준비를 하던 여자친구가 음독자살 시도를 했다고. 미친 년이. 답을 밀려썼대나? 다행히 죽진 않았는데 한동안 고생했지. 여튼 그런 식이야, 좋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나쁜 일이 생기는거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 행복하다' 생각한 순간 곧바로 불행이 닥쳐오는거야. 호사다마라는 말을 나처럼 많이 떠올린 사람도 없을거야 정말로. 나 이사 승진 하고 그 다음 날 마누라한테 이혼 통보 받았잖아."

무어라 대답을 하면 좋을지 몰라 나 역시 그저 잔을 홀짝일 뿐이었다. 박 이사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세상에 남들은 막 흐름이 좋을 때 더 잘 풀리고 그런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왜 이럴까. 그런데 언젠가 딱 그 생각이 들더라고. 아, 이게 팔자구나. 이게 내 행복의 그릇이구나. 나는 그 행복의 그릇이 작아서, 그 그릇이 차는 순간 엎어지고 딱 불행이 들이 닥치는거지."

그때 나는 위로라고 할까, 그의 말에 토를 달았다.

"에이 그래도 이사 님은 이사 타이틀까지 달았고, 남들 못 가본 곳까지 가봤잖습니다. 객관적으로는 운이 좋은 편 아닙니까"

그러자 박 이사는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바보가 아니거든. 내 행복의 그릇이 작구나, 나는 완전 머리 끝까지 행복으로 가득 채워 버리면 안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 나름의 대책이 보이더라고."
"대책이요?"
"그래"

박 이사는 술잔의 4/5쯤 찬 잔을 흔들며 말했다.

"행복이 딱 이만치 차오르면, 스스로 적당히 따라버리는거야. 행복을. 이를테면 꽁돈 10만원이 들어오면 그 반은 뚝 잘라서 어딘가에 기부해버리거나 허무하게 바보 같은 곳에 써버리는거지. 또 뭔가 좋은 일의 기미가 보이면 스스로 불행을 만들고. 우리 첫 애 태어날 때, 그 전날에 하늘에 맹세했지. 그 좋아하던 조기축구, 다시는 안 하겠다고. 우리 아들 무사히 태어나게 해달라고. 그리고 무사히 태어났잖아."

웃으며 이야기를 털어놓는 그였지만, 솔직히 나는 이쯤해서 그에 대해 다소 미심쩍고 부정적인 인상을 받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의외로 이런 류의 징크스나 미신적인 것에 민감한 케이스가 많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미신에 휘둘려서야 좋을게 없어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과연 닳고 닳은 인생의 베테랑답게 내 표정을 읽어냈다.

"나도 뭐 내가 이러는게 과하다고는 생각해. 하지만 내 나름의 결론은 이게 꽤 확실한 이론 같단 말이야."
"확실한 이론이요?"

솔직히 술자리의 개똥철학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좀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살다보면, 잘 나갈 때 병신 짓 하는 인간들이 종종 보이잖아. 막 성공한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가 어느날 갑자기 음주운전이나 마약에 손을 대서 갑자기 몰락해버리는거. 혹은 멀쩡하던 인간이 갑자기 병신 짓 해서 손해 크게 보는 거 말이야. 이런게 나는, 그 '행복의 그릇'이 넘쳤을 때 일어나는 일 같다는거지. 그 나름대로의. 윤 대리는 그런 일 없었나? 뭐 잘 흘러가던게 갑자기 망하던가, 뭐 연인이랑 행복의 절정이라고 느낀 시기에 확 이별 통보를 받는다던지"

별로 그런 일은 없었는데요, 라고 말하려던 순간 재희한테 고백해서 사귀게 된 일주일 후에 입대영장 받은게 생각났다. 구태어 말을 하진 않았지만.

"여튼, 뭐 내 말은 항상 사람이 잘 나갈 때 경계해야 된다는거야. 윤 대리도 이제 곧 다음 달에 과장 달게 되면 또 뭐 반대 급부로 안 좋은 일 생길지 누가 아나?"

걱정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에 "아이고, 저는 그릇이 커서 걱정이 없습니다 이사님. 다만 당최 그릇이 너무 커서인지 어째 행복이 차오르지를 않네요?" 하고 웃어 넘길 뿐이었다. 이사는 그 말에 빵 터져서 "내가 이래서 윤 대리를 좋아한다니까? 아 재밌구만, 재밌어. 참 윤 대리 재밌어" 하고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회사에서 맨날 딱딱한 얼굴만 보던 그의 활짝 웃는 얼굴에 내가 다 시원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리고 박 이사는 그날 밤 음주사고로 사망했다.

나는 '그 날 그렇게 좀 웃었다고 그게 죽을 정도의 행복한 일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다음 날 빈소에서 그의 아들이 서울대 수석 입학 통지서를 들고 오열하는 모습을 보며 새삼 납득했다. 확실히, 그토록 아끼던 아들을 혼자 키우며 결국 서울대까지 보냈는데 그 기쁨이 세상 무엇에 비한들 작았으랴. 그의 행복의 그릇이 또 한번 엎질러지기에 충분한 소식이었겠지.

부디 다음 생애에서는 박 이사님의 '행복의 그릇'이 태평양만하게 크길 바란다. 또한 그만한 그릇을 들고 그 위치까지 올라갔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감탄과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 完 -  
제가 좋아했던 한 스포츠 선수는 선수 생활 내내 기복이 심한 편이었습니다. 

상당히 부진을 겪나 했더니 갑자기 호조의 모습을 보이고, 그래서 기대를 하면 여지없이 다음 경기에서 참패. 기대를 접고 있노라면 또 몇 경기 연승으로 기대를 부풀리지만, 모처럼 관전을 하면 역시나 패배. 그것도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쉬운 참패. 그리고 또 기나긴 슬럼프. 몇 번이고 그렇게 부진과 부활을 넘나드는 모습에 여러번 '혹시? 이번에야말로?' 하고 기대했지만 결국 그 어떤 '선'은 넘지 못하더군요.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저는 어떤 개똥철학을 떠올렸습니다.

'저 선수의 그릇(?)은 딱 저기까지구나!'

분명 실력도, 능력도 우수한 편이지만 운이나 혹은 다른 모종의 이유로 딱 어느 선은 끝내 넘지 못하는 그런 안타까움. 그런데 또 살다보니 그건 꼭 그 선수 뿐 아니라 수많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심지어는 국가나 기업마저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더군요. 저도 딱히 예외는 아니고.

아마 그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클래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A급, B급, C급 하는 그런 클래스. 정말 A급의 스타들은 반대로 정말 모두가 '안되겠지' 하고 포기한 순간에 멋지게 뻥뻥 말도 안되는 기적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듯이 말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낮은 클래스, 작은 그릇에 그저 좌절만 하고 있는 것도 답답한 일이 아닌가, 만약 그런 그릇을 갖고도 인생의 성공을 거둔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멋진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본문의 씁쓸한 결말이야 뭐, 박 이사님 본인도 사실 마음 속으로는 항상 각오했던 일 아닐까요. 
생각보다 짧은 시간 by 스타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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