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슬러 올라간 최초의 기억 속 장소에 대하여
2024.2.21. 열세번째 이야기
70대 아버지, 30대 두 딸이 함께 같은 주제로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
땡비에서 나눠볼 오늘의 이야기는 🐝내 기억 속 최초의 장소입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막다른 골목을 마주한 것처럼 더 갈 곳 없는 기억이 있죠. 여러분에게 가장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진짜 내 기억인지 헷갈리는 잔상 같은 기억도 있고 너무나도 선명한 기억이 있죠. 오늘 땡비와 함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좋겠습니다. 💌
볕에서 그늘을 바라본다는 것(@흔희)

거실이라는 공간이 있는 걸 보면 그곳은 동네에서 꽤나 넓은 축에 드는 집일 것이다. 거실에는 대여섯 살 즈음의 아이들이 모여 있다. 무엇을 하고 노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안개처럼 볕이 희뿌옇게 창가에 스며 들어오고 사람들의 실루엣만 흐릿하게 일렁인다. 앉아 있는 그네들이 누구인지 한 명 한 명 집어가며 말할 순 없지만 그냥 느낌으로 안다. 그곳은 정우의 집이고 앉아 있는 아이들은 정우고 은영이고 혜진이일 것이다. 연산동에서 어울려 놀았다던 내 유년시절의 친구. 그런 친구가 있었다는 것만 기억에 남아 있다. 길을 가다 마주치면 아마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릴 것이다. 그것이 내 최초의 기억.


무엇하나 분명하게 남아 있진 않지만 그들의 존재만은 내 기억 속에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다. 장면만으로 흐릿하게 남아 있지만 그 무렵의 감정은 명확하다. 따뜻하고 편안하다. 볕이 잘 드는 공간이 주는 감정이기도 하고 사람이 주는 감정이기도 할 것이다. 거슬러 거슬러 올라간 내 최초의 기억에는 훈기가 돈다. 나는 훈기를 가진 사람일까, 아니면 훈기를 찾아 헤매는 사람일까.


어렸을 때부터 나는 눈물이 많았다. 8살 때, 학교에서 만들기를 하다가 풀 뚜껑을 잃어버렸다. 아무리 찾아도 뚜껑이 보이지 않았다. 풀 뚜껑이 없다고 누가 나를 크게 혼내는 것도 아니었고 별 큰일이 아닌 걸 아는데 무언가 서러웠다. 짜증이 날 법한 상황이었지만 짜증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냥 서러웠다. 그래서 울었고 선생님은 내가 우는 이유를 듣고는 꾸지람의 몇 마디를 건넸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까지는 드문드문 몇 장면만 기억이 나는데 유달리 그때의 상황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각인되어 있다. 울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았다. 그래서 울고 싶지 않았다. 훌쩍이는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친구들의 눈도 부끄러웠고 울음을 그쳐보려는데 때마침 떨어지는 선생님의 다그침도 서러웠다. 그중에서도 울음을 그치고 싶은데 그 사소한 것 하나 어쩌지 못해 훌쩍이는 내가 제일 싫었다.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남들에게 어쩔 수 없이 드러냈던, 내 기억 속의 최초의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내 곁에서 나를 토닥여줄 다정함을 찾아 헤매며 울었을지도 모른다.


복직을 앞두고 인사이동으로 마음이 심란할 때였다. 동네 주변을 걷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3년 전, 같은 부서에서 일했던 동료였다. 인사이동으로 다 같이 심란한 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는 내가 생각이 났다고 했다. 주고받은 연락이 오래되어 이렇게 스쳐 지나가나 보다고 생각할 무렵에 받은 연락이라 더 반가웠다. 그도 심란했을 텐데 나를 떠올려주고 먼저 나를 물어봐준 그 마음이 고마웠다. 전화를 끊고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그의 이런 면을 내가 참 닮고 싶어 했었지…’ 


회식자리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분위기에 반발자국 정도 떨어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런 사람에게 늘 먼저 말을 붙여주고 자연스럽게 손을 건네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무심하게 건네는 몇 마디로 반발자국 떨어진 사람에게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레 끌어다 주었고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자신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모임을 주도하는 것도 아닌데 몇 마디 슬쩍 얹었다가 물러나면서 누군가를 챙겨주는 그가 유독 커 보였다. 그는 바다 같은 사람이었다.


사실 나는 주변에 관심이 별로 없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 표정에서 그 사람의 감정이나 분위기를 읽어내는 힘이 좀 부족한 사람이다. 심리학적으로는 이 힘을 사회적 민감성이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나는 타고난 사회적 민감성이 약한듯하다. 별 의도 없이 건넨 말이 누군가에게 비수로 꽂히는 경험을 몇 번 해보고 나서는 민감성을 키워보고자 나름대로 노력을 하며 지내온 세월이 어느덧 40년이 다 되어간다. 그래서 다정한 사람을 동경한다. 성숙하지도 않고 늙지도 않은 30대, 그 애매모호한 시절의 끝자락에 서보니 이제는 안다. 다정함이 삶에 주는 의미를. 다정함은 또 다른 다정함으로 이어진다. 유년시절 친구들과 주고받았을 무구하고 따뜻했던 감정이 있었기에 8살 무렵의 나는 다정함의 부재 속에서 다정함을 찾아 울 수 있었고, 삶의 이런저런 길목에서 만났던 바다 같던 사람이 있었기에 나에게는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채워야 하는 지를 알 수 있었다.


다정함은 가려진 곳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부터 시작된다. 볕이 드는 곳에서 그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런 삶을 살아낼 것이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이 마음가짐을 지니며 살아본다. 생각하고 의식하고 바라다보면 어느덧 그것이 내 일부가 되어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보면서.

첫 기억(@못골)


프로이드는 “살아가며 형성되는 자아는 자아가 성립되는 시기 유아시절 부모의 원망(願望)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즉, 부모의 소망이 성격이 되고 자아정체성이 되며 자라서 생의 전부가 된다. 그리하여 살아가는 자아 속에는 늘 부모의 바람처럼 되려는 본능이 자신을 제어하고 발전하는 에너지가 되어 생의 과정에 반복적으로 영향을 준다. 본인이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부모의 자아가 투영되어 그를 바탕으로 성장하려는 본성이 자신의 삶 속에 녹아, 끊임없는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자기 자신이다. 내 삶의 어디엔가 어머니가, 아버지가 녹아 있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내게 처음 생각나는 그 최초의 기억은 무엇일까?     

단편화되고, 퇴색된 기억으로 드문 드문 기억나는 그 조각들은 무엇 때문에 나에게 때도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질까? 왜 그 순간이 기억났을까? 그때의 상황은 어떤 것이었을까?                      


내 기억 처음의 그 순간으로 한번 돌아가서 어떤 상황이었는지 보려고 한다.      

일생 최초의 기억은 평범한 일상의 하루가 아니고 몹시 슬프거나, 기쁘거나, 아니면 충격적인 사고가 있거나 하는 별스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최초의 기억, 그 기억은 순간이고 그런 순간이 사진의 한 장면처럼 각인되어 기억된다. 그 기억 속에 나의 생각과 무의식을 불러와서 의미를 유추해 본다.      

대개 우리가 기억하는 최초의 시기는 6살 전후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더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그때의 기억을 단단히 잡고 상황을 추측해 본다.               

추석 전날인데 마당에 있는 대추나무가 바람에 크게 흔들려 대추가 후루룩 떨어진다. 그것을 주우려고 비바람 속에 이리저리 형과 나는 분주히 뛰어다닌다. 그날이 사라호 태풍이 분 날이다. 내가 여섯 살 때 일이다. 1959년 9월 11일이다. 그날의 기억이 분명한 것을 보면 최초의 기억은 그보다 더 이전의 날이라 본다.                    


다리를 보고 둑을 따라 좌회전을 하면 율곡사(밤절)로 가는 길이고 직진하면 단계에서 거창으로 가는 단계교 밑이다. 진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엄마가 형에게 “동영아! 엄마하고 진주 가자”라고 달래니 형은 "안 가고 큰 집에 있을 거야!"라며 동행을 거부한다. 어린 마음에도 엄마 따라 가려하지 않는 형을 알 수가 없었다.      

         

안 가려고 하니 형은 할머니에게 떼어 놓고 진주로 간다. 작은 아들과 단 둘이 간다. 엄마는 차멀미를 매우 심하게 하기 때문에 버스 타는 것을 몹시 괴로워했다. 바람이 잘 통해서일까? 엄마는 화물차 조수석에 앉으면 멀미가 없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멀미가 심하여 적당한 시간에 차를 여러 번 세우고 한참이나 쉬었다. 쉬어 가며 진주로 갔다. 5월쯤이었다. 양철로 사방이 거의 막힌 창고 같은 건물에 큰 글씨로 쓰인 “농협은 농민의 것, 농민의 힘으로” 이 글자가 보이면 산청 외갓집과 큰집이 있는 단계에 거의 다 온 것이다.             

       

그 건물을 뒤로하고 이제 진주로 간다. 문대를 한참 지나 원지 못 미쳐 논두렁 옆에서 아이들이 버들피리를 불며 놀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차를 세우고 잠시 쉬면서 엄마는 근처에 있는 미루나무 가지를 꺾어 비틀었다. 아이들이 여럿 몰려와 구경하는 가운데 엄마는 한쪽을 벗겨내고 떨판을 만들어 불어보시고는 내게 버들피리를 건네주었다. ‘삐~ 이이’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본다. 이 순간이 아련한 내 유년의 첫 장면이다. 그려보면 참 슬픈 장면으로 연상된다. 혼자서, 큰 아이는 남겨두고 작은 아이만 달랑 데리고 어머니 혼자서 멀미로 혼미해지는 심신을 바로잡으며 진주로 가고 있는 그 분위기를 생각하면 엄마의 외로움과 분노, 슬픔과 막연함이 느껴진다. 삶은 참 괴로운 것이다. 그 이후로의 삶을 돌아보면 힘들게 오랜 시간을 지금까지 견뎌왔다. 지나온 시간 속에 마음 놓고 편안히 웃어본 날이 몇이나 될까? 그 몇 번 되지 않는 순간에 의미를 두고 힘든 삶을 견뎌왔다.    

             

시간이 가면 낡은 건물도 보수를 해야 하는 시기가 온다. 마찬가지로 기억이 약해지고, 희미해져 지금은 연결된 사회망이 여기저기 구멍이 생긴다. 인간관계에 관한 여러 가지 의미를 새로 규정지어야 하는 시간이다. 사귀던 친구와의 관계도 약화되어 서서히 혼자가 되어가는 순간이다. 최초의 기억 그때 이후로 내 인생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과 사연들 그리고 고통과 환희, 즐거움과 무료함 이런 날들이 쉼 없이 스쳐 바람처럼 지나갔다.                


우리들이 매일 걷는 ‘길’은 종종 인생에 비유된다.     

‘길’ 위에 얹혀진 인생, 우리는 길 위의 인생이다. 걸어가는 매 순간 시간은 걷는 방향과 무관하게 흘러간다.      

길을 걷듯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살아온 날들과 살고 있는 현실이 때로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지금’이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해거름에 와 있는 길 위의 나그네 시점은 다르다. 고개 언덕에 서서 뒤돌아 보면 멀리 끊어지고 이어지는 외길 속에 새겨진 기억들이 여러 가지로 윤색되어 떠오른다. 그러나 그 기억들은 모두 무채색으로 희뿌연 안갯속에 몽롱한 살아온 자국이고 흉터들이다. 지금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형체를 알아볼 수없을 정도로 흐려진 뿌옇게 변해 윤곽만 보이는 사건들도 있다. 잊고 싶어서, 잊어야 하니까! 잊는 순간도 있지만 잊으려 하는데도 잊지 못하는 순간도 있다. 잊으려 하면 오히려 뚜렷해지는 아픈 기억도 있다. 어쩜 기억마저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나 보다. 무엇에든 모두 연결되어 끊어내면 많은 것들이 딸려 나오는 복잡함으로 작은 것 하나마저도 내 의도대로 하지 못한다. 나이 듦은 그 관계를 이제 하나씩 풀어놓으며 가볍고 단순하게 살아가려 하는 시간들이다. 

해직둥이(@아난)

 

“이야. 해직둥이가 벌써 이렇게 컸나.”

 

아버지 친구들은 나를 ‘해직둥이’라 부르시곤 한다. 아버지가 해직교사가 되어 학교를 떠난 1989년에 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군사정권의 서슬퍼런 시대에 ‘교사도 노동자다!’를 외치다 야인이 된 상태에서 갓난쟁이인 나를 만났다. 기억나지도 않는 내 무의식의 영역 속에는 시위나 정치적 집회의 현장도 한 칸 자리 잡고 있다. 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한 해직둥이는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누군지 알지도 못하면서 노동운동가의 이름 “박! 뚠! 보! “를 엄마 등에 업혀 함께 외쳤다고 한다. 아기의 성격이 형성된다는 시기에 나는 “투쟁!”을 외치던 현장에서 무의식을 쌓았다.

 

해직과 해직둥이의 동시다발적인 만남은 집에 생활고를 가져왔다. 늘어난 입까지 두 자식을 책임지기 위해 부모님은 매일매일을 고민하며 양말장수부터 사진관, 학원 강사까지 온갖 장사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돈이 없어 팍팍할지언정, 의식의 세계가 채 완성되기도 전부터 해직둥이는 좋은 사람들로부터 응원의 에너지를 받았다. 이 때는 나를 해직둥이라 불러주는 어른들이 우리 집의 안전망이었다. 부모님의 친구분들은 언니와 나의 이름으로 돈을 모아 건네거나, 받지 않겠다는 부모님께 무심하게 생활비를 투척하고 가셨다. 그들은 경제적 편안함, 사회적 지위를 다 내던져서라도 지키고 싶은 사회와 바라는 미래가 분명한 사람들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는 마음 덕분에 우리 집은 버텼다.

 

이후 다양한 시간들이 덮어쓰기 되어 해직둥이였던 시절의 잔상이 사라졌을 때쯤, 무의식 속의 기억이 처음으로 깨어난 시기가 있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가 가신 뒤 온 국민이 촛불로 들끓던 때다. 미군 장갑차에 처참하게 깔려 죽은 효순이, 미선이를 추모하기 위해 처음으로 참여한 집회에서 해직둥이 자아가 깨어났다. 한낮에 우리나라에서 여중생들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게 황당하기 그지없는데, 한국 법정에 세워보지도 못하고 미군이 무죄로 마무리 짓자 국민들이 분노했다. 당시 14살이었던 나는 나보다 겨우 한 살 많았던 희생자들의 죽음에 ‘나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한 현실에 충격을 받으며 첫 시위에 참여하였다.


평소에는 정신없이 차들로 가득한 서면이었는데 한쪽 도로가 시위로 통제되어 차도를 걸을 수 있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중간쯤 걷고 있는데 어른들이 길을 터주며 어린 나와 언니를 앞으로 보내주었다. 나는 어느새 맨 앞 줄에서 긴 현수막을 손에 쥐고서 낯선 사람들과 걸었다. 처음에는 입에서 우물쭈물 구호를 삼키다가 어느 순간 박자가 맞아 함께 외치면 왠지 모를 시원함이 느껴졌다. 저녁이 되자 서로 알건 모르건 상관없이 종이컵 가운데를 뚫어 촛불을 넣고서 옆 사람에게 불을 옮겨 붙여주었다. 무대 앞 단상에서 울부짖는 어른부터 내 또래의 아이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나왔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추모의 메시지를 던지고 더 나은 나라를 만들자고 외쳤다.

 

이전까지 한 가정과 이웃 안에서 천진난만한 어린이로 존재했지만,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나로 알을 깨고 나온 듯했다. 무의식 저 너머에 있던 해직둥이의 마음속 불이 탁! 하고 켜졌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사람을 위해 나서서 함께 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를 느낀 첫 경험이었다. 시위는 평화롭고 따뜻하고 재미있었다.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봤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으며 몰랐던 현실을 알았다. 그날 밤 TV 뉴스에는 대낮에 행진하던 언니와 내 모습이 나왔다. 같이 모이니 사회가 귀 기울여주고 저 무리에서 발맞춰 걷는 내 모습이 신기하고 꽤나 마음에 들었다. 서면 촛불집회에서 사회적 자아로서 깨어난 내 최초의 기억은 따뜻하면서도 서릿한 사회에 대한 씁쓸함으로 가득했다.

 

집회의 에너지를 좋아하는 해직둥이는 자라면서 혼란스러웠다.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시위를 무작정 비난했다. 막상 대화를 해보면 데모하는 사람들이 왜 울면서 삭발을 하는지, 온몸에 불을 지르는지, 탑 꼭대기까지 올라가 몇 날 며칠을 울부짖는지는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디 사회에 반기를 들어 불편함을 만드냐며 데모라는 ‘현상’에만 집중하여 비난했다. 원색적인 이념 논리부터 ‘으유! 노조는 맨날 데모만 해’ 하면서 사람들은 시위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티비에서 보이는 거칠고 자극적인 시위가 전부라 생각하는 사람들에 비해, 해직둥이는 달랐다. 남몰래 마음속으로는 데모하는 사람들을 응원했다. 그들이 왜 저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 세상이 다루어주지 않는 이야기를 찾아 읽었다. 시위는 우리 사회의 불편함을 회피하지 않고 수면 위로 끌어올려 ‘자! 사실 우리 사회가 이렇게나 문제가 많았답니다!’라고 약자들이 벼랑 끝에서 외치는 소리이다.

 

잊고있던 사회적 자아가 깨어난 그 날 이후 늘 불씨 하나를 지니고 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가 불씨가 타오를 때면 세상으로 뛰어나갔다. 한 번 본 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억울하게 떠난 이에 대한 추모식이 열리면 찾아가 광장에서 함께 목놓아 울었다. 아이들을 먼저 보내고 투사가 된 부모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시나브로 노란색 열쇠고리를 만들곤 했다. ‘이게 나라냐’라는 구호가 전국을 뒤덮을 때, 현실은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풍자가 넘쳐나는 촛불집회의 그 따뜻하고 유쾌한 에너지가 좋았다.

 

최초의 기억을 밑천 삼아 ‘훗날에 돌이켜 봤을 때 부끄럽지 않도록’이라는 마음을 새겼다. 행동하지 않으면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 심지어 행동을 하더라도 사회는 생각보다 훨씬 더디게 움직여서 작은 움직임이라도 필요하다. 그래서 여전히 누구든 효순이, 미선이가 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수학여행 중 배가 가라앉을 수도 있고, 친구들과 만나려다 인파에 내몰려 바스러지거나, 비가 퍼붓는 날 지하차도에서 알아서 살아 나와야 하든. 어디서든 희생자들의 비극이 내 일이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다가 연대의 움직임이 필요할 때면 마음에 불씨가 화르륵 타오른다. ‘와 아직도 안 바뀌네.’ 허무하면서도 이것밖에 못해서, 이거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나선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생명을 위해 당신의 무언가를 내려놓고 같이 움직여 본 적이 있는가? 마음 한 켠에 적어도 이 가치만큼은 잘 지켜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해직둥이는 최초의 기억을 밑천 삼아 오늘도 마음속 촛불을 켜둔다.

💌 지난 호 구독자 후기 (#12. 사라져서 그리운 장소)
깔롱님 : 내 인생에서 사라져서 그리운 장소는 어디일까 생각해보게 되는 땡비였어요. 매일 정신없이 치열하게 보내느라 사라졌는지도 몰랐던 공간들이 하나둘 떠올랐어요. 
🍯 땡비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 소개
 - 못골👨🏻‍🎨 : 한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진을 찍어왔다. 한계를 넘어 뭐든 끝까지 가는 남다른 의지력을 지녔다.
 - 흔희👩🏻‍🎤 : 눈치를 보지않아 '인간 사이다'로 불리나 K장녀로 은은히 돌아있다. 직업 때문에 생계형 낱말수집을 한다.
 - 아난👩🏻‍🍳 : 목구멍 보이게 웃는 큰 리액션과 미친 에너지 때문에 '어린 짐승'으로 불렸다. 빵을 굽는 방구석 빵수니. 
오늘의 땡비 어땠나요?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읽으면서 머리를 스친 어떤 의견이든 편하게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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