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레터 52호  
2024/1/23
노동자 참여없는 자기규율은 어불성설

류현철

노동조합의 안전보건활동에 대한 의심과 왜곡


얼마 전 건설노동조합와 정당에서 주최한 국회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했습니다. '노조탄압이 건설현장 노동안전보건에 끼치는 영향'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국회토론회에서 건설현장 노동자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폭염기에 휴게소 설치를 요구했던 노동자는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언론사에 제보를 했는데 기사가 나간 사흘 후에 해고됩니다. 콘크리트 타설 과정에서 불안정하게 호퍼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반복되었습니다. 노동조합에서는 안전사고를 예방하고 공사기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새로운 공법(CPB, concrete placing boom)을 도입하도록 현장 관리자들과 논의하였습니다. 그리고 시공사를 설득해 협약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러자 이것이 공갈·협박으로 받아낸 게 아니냐며 경찰로부터 소환조사를 당합니다. 안전신문고를 통해 건설현장에 유독성 자재가 방치되었다고 안전신문고에 민원을 제기했다가 건설노조 불법행위 혐의로 경찰로부터 출석 통보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사] 타워크레인 노동자에 ‘위험한 작업 거부하면 면허정지 시킨다’는 국토부

[기사] 건설현장 휴게실 요구했더니 해고, 안전신고 하니 경찰수사



로벤스 보고서, 자기규율의 주체는 기업과 노동자


현 정부는 2022년 11월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이하 로드맵)을 발표한 이후에 지속적으로 ‘위험성 평가에 중심의 자기규율 예방체계 확립’을 안전보건 정책의 핵심으로 강조해 오고 있습니다.  ‘자기규율’이라는 개념은 1972년 영국의 ‘로벤스 보고서’에서 등장하는 ‘self-regulation’을 말합니다. 로벤스 보고서는 영국이 산업안전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게 만든 안전보건 정책철학의 지침서라고 할 만합니다. 보고서는 세 가지 원칙을 강조합니다.

첫째, 처벌이나 규범적 접근보다는 위험의 예방에 기반을 둘 것 

둘째, 그 위험을 만드는 사람이 위험 예방의 책임을 질 것

셋째, 위험 예방에 노동자도 참여해야 하고 이를 위해 노사가 협력할 것

이는 자기규율의 주체인 '자기(self)'란 위험을 만들거나 그 위험 속에서 일해야 하는 사람들을 모두 포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기업의 책임과 노동자의 참여가 만들어 내는 실무규범을 법률만큼이나 효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오이레터 2호] 로벤스 보고서 한국에서 뿌리내릴 수 있을까?

「보고서」 로벤스 보고서_누가, 왜, 어떻게 만들고 실현할 수 있었나



고용노동부도 노사가 함께 참여하는 자기규율예방체계를 강조


고용노동부도 ‘위험성 평가’를 강조하면서 노동자의 참여를 강조해왔습니다. 2023년 1월 발표한 「산업안전보건감독 종합계획」에서 “노·사가 함께 스스로 위험요인을 진단·개선하는 안전관리시스템을 구축하고, 예방 노력에 따라 결과에 책임을 지는 「자기규율 예방체계」를 갖출 수 있게 뒷받침”하겠다고 했습니다. 2023년 5월 ‘사업장 위험성 평가에 대한 지침’을 개편 고시하면서 노동자의 참여를 더 강조합니다.

“위험성평가는 사업장의 유해·위험요인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근로자의 참여가 필수적이나, 그간 유해·위험요인 파악 등 일부 절차에만 참여하도록 규정되어 있어 위험성평가를 효과적으로 실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를 위험성평가 전체 과정에 근로자가 참여하도록 개정하여, 사업장의 유해·위험요인을 빠짐없이 찾아내고 그 위험성을 근로자의 경험에 비추어 판단하는 등 산업재해 예방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한다.”

[보도자료] “위험성평가”를 쉽고 간편하게 그리고 참여 강조로 개편. 2023.3



노동자가 안전보건 자기규율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


노동조합은 노동자가 안전보건에 참여할 수 있는 조직적 수단입니다. 노동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노동자의 입장에서 안전한 노동환경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자기규율예방체계에서는 권장되어야 합니다. 노동자 참여는 가장 낮은 수준에서는 위험에 대해 ‘알 권리’를 획득하고, 다음으로는 위험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작업중지권’이 주어지고,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는 사전에 현장의 위험을 파악하고 개선의 대책을 수립하는 ‘위험성 평가’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위험성평가를 위해서 현장의 위험이 경영책임자에게 잘 전달되도록 심리적, 절차적, 제도적 걸림돌을 없애야 합니다. 또한 위험에 대한 대책이 현장으로 내려와 하청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까지 모두  포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건설현장은 공사기간이 돈으로 환산됩니다. 수십 또는 수백억원에 이르는 공사에서 일을 멈추는 것은 큰 손해를 감수하는 일입니다. 게다가 노사간의 힘의 불균형으로 인해 제도적으로 보장된 권리더라도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맥락까지 고려하여 참여 활성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건설현장에서 노동조합의 활동이 재해예방에 기여


건설업에 있어서는 조직된 노동조합의 안전 보건에 대한 요구가 실제로 현장의 재해예방에 기여해 온 바는 적지 않습니다. 캐나다 노동보건연구소는 2012년부터 2018년까지 건설 부문 170만 명의 근로자를 대표하는 58,000개 이상의 기업에서 수집한 직장안전보험 데이터를 분석하였습니다. 연구결과 노동조합 가입자들의 손상청구건수가 미가입자들에 비해 31% 더 낮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유사한 연구를 시행하였습니다. 2012년 데이터로 건설업에서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과 없는 사업장 근로자의 산재율을 비교한 결과에 따르면,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 근로자의 재해율은 0.64%인 반면,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 근로자의 재해율은 0.41%로 낮았습니다. 게다가 노사관계가 협조적인가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비협조적인 경우는 재해율이 1.72%, 보통인 경우는 0.94%, 협조적인 경우는 0.53%였습니다.

[보고서] 31% 더 안전: 노동조합 안전효과 업데이트 보고서

[논문] 노동조합 유무와 노사관계가 산업 재해율에 미치는 영향: 제조업과 건설업 중심으로. 2014



위험한 건설현장에서는 노동조합이 더 필요


안전보건에 대한 권리를 행사라는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재해예방을 위한 기술적 측면에서도 노동조합의 존재는 중요합니다. 건설업에서는 특히 그러합니다. 늘상 현장을 옮겨 다니며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건설 노동자는 현장의 위험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지만, 노동자 개인이 사전에 현장에서 예견되는 문제들을 제시하고 대책을 요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건설노동조합의 각 전문분과별 조직들은 여러 현장에서 다양한 위험요인들에 대해서 파악하고 아차사고의 경험을 공유하며, 개선의 대안까지 함께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교섭이라는 공식적인 절차를 거친다면 건설현장의 안전보건은 더 체계화될 것입니다.

[칼럼] 위험한 건설현장, 노조가 더욱 필요하다



노동조합과의 협력에 열려있는 자세가 필요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사간의 현저한 힘의 불균형을 초래하거나 노동조합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상황 속에서는 현장의 위험을 드러내는 일은 입바른 소리로 치부되고 말 것입니다. 위험성 평가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아차사고는 묻혀질 것이며, 결국 중대재해가 발생한 다음에야 현장의 위험을 인지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를 드러냈다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례가 생긴다면,  다수가 문제를 보고도 침묵할 것입니다. 해결의 방법을 알아도 자신이 감당할 부담과 책임이 커진다면 개선 대책을 내놓는 고단함을 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결과 노동현장의 안전은 위협받을 것입니다.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실질적 참여를 도모하는 것은 노동자들을 관리의 대상이 아닌 자율적인 주체(self)로서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기업과 정부가 노동조합과의 협력을 위해 열린 자세를 가질 것을 촉구합니다.


글쓴이: 류현철 (일환경건강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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