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F 다이어리에서 나눈 지난 이야기 
📄 2020.06.24│공연장이 멈추고 난 뒤 [Ep.7]  

지난 2월 중국의 코로나19 상황이 절정으로 치달았을 당시, 현지에서 상황을 취재했던 특파원이 귀국했습니다. 사드 배치 문제로 한중관계가 꽁꽁 얼어붙었던 2017년 봄부터 지난달 말까지 중국 베이징에서 근무한 SBS 보도본부 정성엽 기자입니다. SDF 열 번째 다이어리에서는 녹록지 않았던 현지 취재 상황부터 현지에서 느낀 감염에 대한 불안감, 팬데믹 상황에서 생각해본 새로운 생존의 조건까지 정성엽 기자(SDF팀 선임 차장)가 코로나19의 한복판에서 기자로서 또 한 개인으로서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Q. 중국 베이징 특파원으로 보낸 기간은 정확히 얼마나 되나요?
2017년 4월 1일부터 올해 7월 첫 주까지 약 3년 3개월간 근무를 했고요. 사드 배치 때부터 시작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네 번 중국을 방문했었고, 미·중무역전쟁 또 홍콩의 민주화 시위 그리고 마지막에는 코로나19까지 생각해보면 참 일들이 꽤 많았습니. 그때그때 사건이 터질 때마다 참 새로운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이다라고 보도해 왔는데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이렇게까지 긴 시간 동안 정치·사회·국제 관계까지 많은 영향을 준 사건은 단연, 마지막 6개월 동안의 코로나19 상황이 아니었나 싶습니 .
Q. 특파원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자가격리가 시작됐는데, 직접 해보니 어떠신가요?
지금 한국(서울)에 도착한 지 5일 정도 됐는데요. 집 밖으로는 못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서울 복귀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채팅방·화상 연결 등 으로 재택근무를 하고 있고요. 이것도 예년의 특파원들이 귀임하는 모습과 비교해 보 면 정말 겪어보지 못한 또 다른 귀임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가 격리 중이라 친척들이 음식 같은 것을 주시려고 저희 집 앞에 오시면 인사를 해야 하잖아요. 저희 가족들도 인사를 해야하는데, 현관문을 앞에 두고 얼굴은 보지 못한 채 이모 오셨어요?”, “너희들 잘 왔니?” 그러면서 서로 목소리 인사만 나누고 헤어지는 그런 진풍경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희 아이들은 자가 격리가 끝나면 주변 맛집 탐방을 하고 싶다고 하고요. 저는 주변을 좀 걸어보고 싶어요. 밖에 나가면 애국자 된다고 하잖아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애국자 되는 상황인데, 코로나 상황까지 겪고 나니까 그런 마음이 조금 더 절실해지는 게 있어요. 격리가 끝나면 동네 한 바퀴 걸어보고 싶고, 한강변도 걸어보고 싶고, 공기 한번 크게 마셔보고 싶고, 그런 생각이 강합니다
Q. 코로나19가 절정으로 치달았을 당시에는 어떻게 취재를 이어나갔는지 궁금한데요.
일단 기본적으로 중국의 취재 환경을 설명 드려야 하는데요. 중국의 취재 환경은 우리 나라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사실 코로나19 상황이 아니더라도 누구를 만나거나 또 예컨대 책임 있는 당국자들을 만나 책임 있는 얘기를 듣는 게 쉽지 않아요. 어렵게 당국자들을 만났다고 해도 그 사람들 입에서 그럴만한 속사정을 듣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왜냐면 중국은 거의 모든 이슈를 당 선전부, 공산당 선전부에서 일단 가이드라인을 정해서 그 가이드라인이 내려오는 대로 외교부라든지 아니면 뭐 중국의 관영매체들이 그 가이드라인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만 발표를 하거나 보도를 하고 있기 때문에 특파원들이 중국에서 본인이 원하는 만큼 취재를 한다는 것은 사실 코로나19 이전에도 쉽지 않았어요. 사실 우리는 중국 외교부에서 공식적으로 취재 허가를 받은 특파원들이잖아요. 그래도 현장에서 인터뷰를 하거나 촬영을 하다가 공안들에게 붙잡히면 그건 못하게 되어있어요. 근데 이게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는 더 심각해졌어요. 특히나 현장 취재는 거의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돼 버렸습니다. 특파원들이 사실 말이 좋아 특파원들이었지 베이징 밖을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계속 베이징 안에서 중국 전역의 상황을 확인해야 하는 애로 사항이 있었고, 그렇다면 베이징 안에서는 마음대로 움직였느냐? 또 그것도 아니예요. 코로나19가 심했던 일정 기간에는 움직일 수 없었는데요. 취재진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전부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만 어디 움직이기 쉽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방송기자들은 현장 취재가 필요한 경우가 굉장히 많잖아요. 그런데 현장을 가야 하는 우리의 상황과 또 가면 결과적으로 비판을 받는 그런 상황이 계속 충돌하기도 했어요
Q. 취재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거나 인상적이었던 일도 있으실 것 같아요.
우한시가 봉쇄에서 풀렸을 때였어요. 봉쇄 해제 첫날은 아니었는데 베이징 언론사에서 이미 사진을 찍었더라고요. 그러니까 저는 그것을 보고 ‘취재가 가능하겠구나’ 해서 베이징 서역으로 갔어요. 열차에서 시민들이 올라오는 모습도 찍고 인터뷰도 해보겠다고 갔는데 대기하고 있는 동안 역내 공안에게 붙잡혀서 왜 여기 있느냐고 하는 거예요. 촬영 좀 하려고 왔다니까 ‘촬영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제 중국 매체들이 이미 촬영한 것을 다 알고 왔다고 해도 너희는 안 된다는 거예요. 막무가내로. 그래서 "말이 안 된다"고 항의를 했더니 제 여권과 외교부에서 발행하는 출입 기자증을 뺏겼어요. 두 개를 빼앗기니까 별다른 방법이 없더라고요. 외교부에서 허락을 받은 정식 특파원이고 몰래 간 것도 아니고 전날 베이징 신문사에서 사진 찍은 것을 보고, 사진을 찍겠다고 한 건데도 불허가 되더라고요. 그쪽 사무실로 따라가서 한 3시간 동안 일장 훈계를 듣고 끝났던 경험이 있습니다. 사실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특파원 부임하기 전에 많이 듣고 또 생각하고, 미국과 함께 G2로 성장하는 나라고 경제적으로 총량으로 따지면 세계 1위를 향해 가는 그런 나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나라가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었거든요. 그랬는데 막상 가보고 경험을 해보니까 특히 이런 국가적 재앙 사태를 맞고 나니까 중국이 진짜 사회주의 국가였구나! 라는 걸 아주 실감하는 그런 계기가 됐습니다.

우한을 봉쇄했을 때를 생각해보면 우한시는 인구가 1100만인 도시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감염자가 매일 몇 천, 몇 만 명씩 늘어나는 상황에서 우한시를 봉쇄해버렸다는 얘기는, 사실 우한 내부에 감염병을 대처할 수 있는 병원이 그렇게 많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많이 보도가 됐듯 길거리에서 숨지는 그런 사람들도 생길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는데, 1100만 명이나 사는 대도시를 봉쇄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중국 입장에서는 14억을 살리기 위해서는 1100 만 명 정도는 희생해도 된다. ‘대’를 위해 ‘소’는 희생해도 된다. 그게 정의다라는 사회주의적 생각을 느낄 수 있었어요. 우한시 봉쇄 결정에서 ‘아, 이 나라가 사회주의 국가구나, 우리나라와는 다르구나’라는 것을 굉장히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Q. 한 도시가 봉쇄되는 상황까지 직접 목격한 건데요실제로 취재하는 과정에서 감염에 대한 불안도 많이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사실 감염에 대한 불안도 좀 없지는 않았습니다. 저희 SBS 베이징지국만 해도 특파원들이 두 명 있었고, 현지 직원들이 세 명이 있었거든요. 이 사람들이 전부 다 각자 집에서 출퇴근해요. 하루 종일 거의 사무실에서 같이 생활을 하기 때문에 서로 감염에 대한 불안을 갖고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마스크 착용은 사무실 안에서도 계속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6개월 동안, 저를 제외한 저희 가족 세 명은 거의 집에 있었어요. 어딜 나가지 못했죠. 그런데 저는 매일매일 출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물론 온라인 수업은 했지만, 아이들은 베이징까지 와서 학교도 못 다니고 밖에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더 미안했던 것은 저만 외부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감염의 가능성이라고 하면 제가 가장 높은 거예요. 밖에서 사람들을 접촉하고 다닌 사람이 저녁에 돌아와서 가족들과 섞여 있으니까 위험인자로만 보면 저만 위험인자인 거예요. 그래서 가끔 저희 막내는 아빠 만나고 다니는 사람 최소화하고, 누구 누구 만났는지 리스트를 체크해라이런 얘기도 하더라고요. 어쨌든 ‘내가 우리 가족에게 위험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좀 있었고, 또 하나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의심 증세가 나왔거나 심지어 코로나19 확진 상황이 생겼을 때 내가 이 사회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어떤 테두리가 전혀 없었어요. 외국 생활을 하면 그게 상당히 두렵거든요. 사회적인 보호막이 없고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거잖아요.
평상시에는 그런 게 크게 느껴지지 않는데 나와 내 가족에게 그런 상황이 닥치게 되면 어떻게, 누구에게 조치를 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있었어요. 그런데 다행히 별 문제는 없었고, 귀국해서 받은 코로나 검사에서는 가족이 전부 음성 판정을 받았습니다

Q.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한중관계는 어떻게 새롭게 정립해야할까요? 
처음 대구에 확진자가 많이 나왔을 때 중국 내에서는 한국에서 누가 왔다고 하면 예전에 사드 때와 비슷한 양상이 발생했어요. 제가 보도하기도 했지만 한국 사람 출입 금지라는 것도 붙어 있었고 예전처럼 길거리에서 한국말 많이 하지마, 주변 사람들이 좋게 볼 리 없어라는 얘기도 우리끼리 공공연하게 했을 정도가 됐었는데요. 반대로 미국이나 유럽 쪽에 코로나 상황이 확산되고 한국과 중국이 진정세를 보이니까 또 양국이 굉장히 친하게 지내더라고요. 방역과 관련된 이슈도 상황에 따라 출렁이는 관계를 만들기보다는, 출렁거리는 상황을 좀 서로 간에 다독이고 안정 시키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그런 양국 간의 교류 관계가 필요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을 좀 많이 했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감정적으로 가슴을 좀 가라앉히고 서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좀 들었습니다.  
Q. 베이징에서 겪어본 적 없는 세상을 경험하면서 느낀 생존의 조건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중국에서 코로나19 를 겪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은 거버넌스의 신뢰라는 것이 무엇인가? 였습니다. 국가의 통치권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많은 구성원들의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가, 그것이 그 나라의 경쟁력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특히 중국 같은 경우 지금 8-9만 명 정도의 확진자가 통계로 잡히고 있고,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방역 면에서) 정말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야기를 하면서도 느끼고 있지만 그 숫자 자체를 믿지 않잖아요. 결국 중국정부에 대한 신뢰가 그 만큼 낮다는 거예요
또 하나는, 코로나 팬데믹 국면에서 각 나라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코로나19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거든요. 각자 자기 나라 상황에 맞는 대응법으로 하다 보니 인접국이나 다른 국가와 충돌하는 문제가 굉장히 많이 발생한 것이죠. 글로벌 충돌 양상이 굉장히 심화되는데 지금의 구조로는 해결하기 쉽지 않은 것 같은데요. 국제적 충돌을 치유하고 공조할 수 있는 새로운 메커니즘이 생겨야 되지 않겠는가? 지금 미국과 중국 G2로 대변되는 양극화된 사회의 한계에 도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의 일과 생활부터 기업·사회·국가·국제사회 등 모두가 수많은 변화를 마주한 코로나 팬데믹 6개월. 여러분이 각자의 자리에서 느낀 생존의 조건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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