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b 6.0 프로젝트 X 조예은
『핑거팁 메모리』, 2022

3. 썩지 않는 죽은 것

기계팔에 이어진 진짜 혈관과 가짜 혈관들. 가짜 근육과 진짜 근육들.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신경통. 헤진 누더기마냥 얇은 피부 아래로 비치는 전선들. 미지근하지만 규칙적으로 뛰는 인공심장. 그 심장을 갑옷처럼 보호하는 갈비뼈들. 3번 뼈보다 가벼운 4번 뼈. 까끌한 질감을 가졌지만 정확하게 대상을 비추는 인공 각막. 그 옆의 여리고 여린 젤리 같은 본래의 안구. 포크로 푹, 찍으면 딸려 나오는. 하지만 형태 너머의 무언가를 읽어낼 수 있는 존재. 아무리 뛰어도 덜그럭거리지 않는 단단한 다리. 닳지 않는 연골, 진짜 근육으로 된 다리와 가짜 근육으로 된 다리.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인간의 소리와 사물의 소리와 동식물의 소리와 사물과 죽음과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소라 안에 존재하는 어떤 존재. 어쩌면 소라 그 자체. 어쩌면 신.

***

인터뷰를 진행한 유 작가는 그 날 보았던 소라의 모습을 빗대어, 실패한 요리 같다고 말했다. 누군가 화들짝 놀라 "아니, 사람한테 실패한 요리라뇨?" 되물으면 유 작가는 자신의 머릿속에 각인된 그 모습을 하나하나 아주 자세히 묘사했는데, 이야기가 끝난 후에는 다들 숙연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침묵을 뚫고 간혹, 누군가 작게 답할 뿐이었다. "끔찍하네요." 유 작가는 모든 이야기를 끝낸 후에 중얼거렸다. 그건 어디에도 없는, 아주 창의적으로 괴랄한 육체였어요. 실패한 요리처럼, 먹기 위해 만들었으나 먹을 수 없는, 너무 타거나 익어버린 탓에 낯선 맛을 내는 재료들처럼요. 전부 제 자리에 있었으나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는 걸 보는 듯한 이질감. 몸은 분명 몸이었지만…… 그런 걸 더 이상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어디까지가 사람이고 어디까지가 기계이며 어디부터가 괴물인걸까요?
아무도 그 답을 알지 못했다. 유 작가는 계속해서 소라에 대해 생각했고 그런 상태가 계속되자 소라에 대한 생각을 멈추는 게 불가능해졌다. 유 작가는 잠을 자면서도 이를 닦으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소라에 대해 생각했다. 소라는 사람인가? 어쩌다 그렇게 되었나?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나?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불현듯, 깨달은 것이다. 소라는 그동안 자신이 보아온 어떤 존재보다도 특별하다는 것을. 자신은 죽을 때까지 이 고민을 해결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소라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기를 포기했다. 대신, 소라를 쫓기 시작했다.

[의뢰 결과서 : 의뢰대상자는 인터뷰 당일, 방송국을 나와 검은색 유광 승합차를 타고 이동. 차량번호 9870-1. 조회 결과 대포 차량으로 확인. 긴 백발을 하나로 묶은 누군가 운전석에서 대기 중이었음. 차량은 대로를 빠져나가 외곽으로 빠짐. 이후 행방 확인 불가.]

여러 방면으로 파고들었지만 소라는 찾을 수 없었다. 업체를 고용해 인터뷰 당일의 행적을 쫓는 게 고작이었다. 방송국에 제출한 신상과 주소는 가짜였다. 유 작가는 소라와의 인터뷰 내용을 되짚어보았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모를 그 모호한 이야기의 흔적을 쫓아 불타 없어진 병원과 먼지 쌓인 판석공장을 뒤졌다. 그 장소는 분명히 존재했으나, 모든 건 과거의 흔적일 뿐. 유 작가는 소라가 아니었으므로 무너진 벽과 피를 머금은 절단 기계에 손을 가져가도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이미 모든 일이 과거형이 되어버린 장소는 그저 그런 폐허에 불과했다. 유 작가는 눈을 감고, 자신이 절대 될 수 없는 소라의 마음을 상상했다. 너무 많아서 텅 비어버린 어떤 존재에 관하여. 손끝으로 만물의 감정과 기억이 흘러드는 기분을. 단 한 번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할 외로움을.


온종일 소라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숨어버린 그는, 어째서 인터뷰에 응하고 방송에 나온 걸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아닐까? 어렴풋이 그 답을 알 것도 같았다. 손끝으로 세상 만물을 이해할 수 있는 그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의 삶은 아래로 흐르는 폭포처럼 일방적이며 무조건적인 이해의 연속이었다. 위로 흐르는 폭포는 없다. 떨어진 물은 고여 썩거나 더 멀리 흘러갈 뿐이다. 그는 어쩌면 모습을 나타내고, 삶을 이야기하고, 단 한 명의 이해자를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유 작가는 벽에서 손을 떼고 차로 돌아갔다. 소라의 바람은 성공한 것이다. 적어도 한 사람, 자신을 이곳까지 불러들였으므로. 닿지 못할 소라를 끊임없이 떠올리는 것. 이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모든 게… 자신의 섣부른 오지랖 혹은 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소라는 찾을 수 없었다. 유 작가는 현실로 돌아갔다.

시간은 흘렀다. 논란의 신체 개조술은 결국 합법화되었다. 이제 원하는 사람들은 질병이나 절단의 이유가 아니더라도 돈과 시간만 있다면 언제든지 신체를 기계로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거부감을 더 크게 느꼈으나, 변화란 안개비처럼 오는 것. 비가 쏟아지지 않는다고 우산 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흠뻑 젖어버리고야 마는 것. 부러지지 않는 뼈를 위해, 떨어지지 않는 시력을 위해, 멋대로 암 덩어리가 자라나지 않는 장기를 위해 사람들은 하나둘, 신체를 바꾸었다. 인공장기와 신체에 들어가는 부품을 취급하는 회사는 순식간에 크기를 불렸다. 그들에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고객은 내전국이었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지역에서는 불법 여부에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신체에 무기를 붙였다.


유 작가가 소라를 다시 만난 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흐른 뒤. 대부분 사람이 기계로 된 신체나 장기 하나쯤은 갖추고 있고, 모두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을 때였다. 그때 유 작가는 기계 신체의 재활용-의료 폐기물 혹은 죽은 자의 신체 혹은 그저 유품-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었고, 필연적으로 여러 죽음의 현장과 죽은 몸들을 찾았다. [소라게 고물상 : 유품 및 신체 폐기물 수거 000-9999] 라고 적힌 명함을 발견한 건 그런 날 중 하루였다.


명함은 침대의 머리 부분에 정갈하게 붙어있었다. 꼭 이것을 봐달라는 듯이. 스스로 입 안에 총을 밀어 넣고 자살한 사람의 방이었다. 명함은 홀로 죽음을 맞이한 그가 남긴 마지막 배려였을 것이다. 당연히도, 현장은 정리된 후였다. 방은 거의 비워진 상태였는데, 피가 굳은 매트리스와 부러진 침대 헤드만은 아직 남아있었다. 유 작가는 헤드의 명함을 챙겼고, 저도 모르게 '소라게', 라는 세 글자에서 앞의 두 글자에 시선을 빼앗겼다. 형사는 그 명함을 가리켜 말했다.

"요즘 종종 보이는 곳이에요. 다큐 준비하신다니까 잘 아시겠지만, 현재 법률로는 사망자의 개조 신체는 1차로 그 가족이 수거해서 보존하거나, 병원에 반납해서 재활용하잖아요. 그것도 아니면 뭐, 불법이긴 하지만 고물상이나 브로커들에게 팔거나요. 고독사한 사람들에게 기계 신체를 담보로 돈을 빌려준다나 봐요."


"담보면 가져가서 뭘 하는데요?"


"모르죠. 신체 개조술이 활성화되지 않은 제3국이나, 내전 지역에 비싸게 파는 게 그나마 남는 장사 아니겠어요? 아이러니하게도 불법은 아니에요. 개조한 기계 신체라는게, 몸이지만 떨어져 나가는 순간 그건 몸이 아닌 그저 물건에 불과하게 되니까요. 고물상에서 쇳덩이 수거하는 건데 문제 될 건 없죠. 저도 가봤는데, 그냥 평범한 고물상이에요. 백발의 할머니가 운영하는."


유 작가는 언젠가, 소라를 태워 갔다는 검은색 유광 승합차와 그 안에 타고 있었다는 백발의 사람을 떠올렸다. 그는 명함의 번호를 작게 읊조렸다.

이후로도 여러 번 같은 명함을 발견했다. 인터넷에 검색하자 후기 몇 개가 떴다. 젊었을 적 교체한 인공 안구를 담보로 돈을 빌렸다는 후기가 하나, 동네 한켠에 백발의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할머니가 하는 기이한 고물상이 있는데, 물건이 쌓이기만 하고 빠지지 않는 이상한 곳이라는 괴담 같은 이야기가 하나. 유 작가는 두 번째 후기 글을 눌러 댓글을 확인했다. 불길한 외관에 땅값이 떨어질까 걱정이라는 글과 쌓여있는 기계 신체를 훔쳐 팔면 돈이 될 것 같다는 내용이 뒤섞여있었다. 유 작가는 용기 내 명함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낯선 목소리가 받아 주소를 안내했다.

***

[소라게 고물상] 


그곳은 무덤이었다, 라고 이후 유 작가는 유서에 적었다. 아주 편안하고 따뜻한 무덤이었다고. 고물상은 고대 왕의 무덤처럼 가파른 언덕의 위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철조망과 목재를 엮어 만든 울타리 너머에 전선과 티타늄 뼈, 인조 근육이 마구 튀어나온 사지들이 쌓여있었다. 신체뿐만이 아니었다. 고물상답게 온갖 구세대의 물건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CD 플레이어와 같은 전자기기와 썩지 않는 플라스틱 그릇, 칫솔, 텀블러와 헌 옷들도 가득했다. 반세기도 더 전의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었다. 백발의 노인은 유 작가를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그가 방 입구의 구슬발을 걷어 올리며 물었다.


"당신은 담보로 걸 게 없어 보이는군. 요즘 세상에 눈알조차 교체하지 않았다니 말이야. 걸게 없다면 돈을 내 줄 수 없어. 왜 온 거지?"


유 작가는 답했다.

"저는 돈을 빌리러 온 게 아니에요. 소라 씨를 만나고 싶습니다. 대화를 하고 싶어요."


"물어도 원하는 대답은 얻을 수 없어. 그 아이에게는 아무도 답을 얻지 못해."


"괜찮습니다. 저는 아주 오래도록 당신들을 찾았어요. 무엇을 하고 싶다는 욕망 보다는, 그저 다시 한번 보고 싶을 뿐이에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노인은 유 작가를 빤히 바라보다, 어디론가 향했다. 잠시 뒤에 돌아온 그는 열쇠를 쥔 채로 말했다.


"따라와."


노인은 유 작가를 지하실로 이끌었다. 이곳에 소라가 있다고 확신하지 않았다면 분명 도망쳤을 것이다. 그만큼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은 수상하고 어두웠다. 나선형의 계단을 한참을 타고 내려가자, 어느 순간부터 공기가 습해지고 발소리의 울림이 커졌다. 지하실보다는 동굴에 가까운, 깊숙한 광장이 나타났다. 지상과 마찬가지로 사방에 온갖 물건들이 벽처럼 빼곡히 쌓여있었고 오래된 물건에게서 풍기는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드문드문 어스름한 조명이 광장을 비추고 있었는데. 꼭 신을 모시는 제단 같기도 했다.


"그 아이는 이곳에 있어. 더 이상 아이가 아니지만, 언제까지나 아이이기도 하지."


노인이 말하며 손가락 끝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고물이 된 팔과 다리와 심장으로 쌓은 언덕. 그 맨 꼭대기에 오래된 철제 침대가 놓여 있었다. 옅은 레몬색 침대는 포근해 보였으며, 그 태연함 때문에 이 공간의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 위에 누군가 누워있었다. 배 위에 양손을 올리고, 가만히. 깊은 잠을 자듯이. 소라였다. 유 작가는 단번에 소라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단 한 번 본 얼굴임에도, 그는 아주 오랫동안 그리워한 대상을 마주한 듯 한 떨림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소라에게로 다가갔다. 한때 사람의 몸에 붙어있었을 쇳덩이들을 밟고 올랐다. 지금은 죽고 없는 누군가의 뼈와 근육과 심장을. 죽었으나 썩지 않는 신체들을. 그 한가운데의 소라는 죽은 것처럼, 죽음 그 자체인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굴러떨어질 뻔하다 가까스로 침대 앞에 도달한 유 작가는 소라의 가슴으로 귀를 가져갔다.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심장. 이 심장은 소라의 원래 심장일까, 아니면 타인의 기계심장일까. 아래에서 노인이 말했다.


"그 아이는 꿈을 꾸고 있어.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타인의 삶을 유영하는 중이지. 타인의 몸에 붙어있던 기계들에 둘러싸여 그들의 기억과 감정을 읽는 거야. 잠에서 깨어나는 건 하루에 한 번, 식사할 때뿐이야."


그때였다. 소라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눈꺼풀이 올라가고 맑은 인공각막이 나타났다. 오래전과 다름없이 모호하고 푸른 눈빛. 유 작가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마지막… 인터뷰를 하러 왔습니다."


소라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질문 1. 타인의 삶을 사는 건 어떤 기분이죠?
-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채 또 다른 삶을 시작하는 기분. 끝없이 환생하는 듯한.


질문 2. 왜 그런 여행을 하는 건가요? 온종일 잠을 자면서? 
- 함께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그들과.

***

소라는 지상으로 올라와 고물상 창 너머로 비치는 햇살을 정면으로 맞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아주 오래 잠을 잤어요. 잠을 자면 제 몸의 일부가 된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거든요. 아, 엿본다는 말로는 부족해요. 저는 그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한 생에 한 명분의 삶을 살죠. 저는 이 저주받아 잘라버린, 그럼에도 끈질기게 남아있는 손을 통해 다른 이들의 삶을 살 수 있었다는 말이에요. 한 꿈에 한 명. 두 꿈에 두 명. 저는 매일 밤 모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외롭지 않았어요. 그들의 가족과 친구가 모두 제 가족과 친구가 되었죠. 그래서 계속 잠들었습니다. 자고, 자고, 또 잤어요. 그러다 아주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어느 날 저는 제가 꿀 수 있는 모든 꿈을 꿨다는 걸 깨닫고 또 다른 삶을 찾아 밖으로 나갔습니다.

제가 잠든 사이, 세상에는 기계 신체가 안경알만큼이나 흔해졌더군요. 아, 그때의 기쁨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저는 신이 났습니다. 인간에게 기생해 생을 함께하는 기계의 기억을 저는 탐냈답니다. 시간은 많았고, 저는 언제든 잠들 수 있었죠. 타인의 몸, 썩지 않는 절단된 신체만 있다면, 그 잘린 기계팔에 손을 가져다 대면 모든 걸 볼 수 있었어요. 또 다른 낯선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 물론, 기계팔과 인공장기 뿐은 아니에요. 사람의 삶에는 무수한 물건들이 스쳐 가죠. 어떤 물건은 주인보다 오래 존재하고요. 아랫니의 안쪽에 존재하는 교정 유지 철사, 손톱깎이, 신다 버린 운동화, 아끼는 코트에 달려있던 단추... 세상에는 유품이 넘쳐나요. 사람들은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하죠? 전부 가져다 버리거나, 태우거나, 애꿎은 바다에 쏟아버리잖아요.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저에게 그 버려진 물건들은 하나하나가 울지 않는 아이, 죽지 않는 노인과 같아요. 살아있지 않지만 무수한 삶의 기억이 축적된 존재를,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에게 물건은 그저 물건이 아니랍니다. 누군가의 일생과 기억과 사랑과 죽음의 흔적 그 자체입니다. 저만은 그것들을 외면할 수 없었어요. 그래봤자 물건일 뿐이라고 생각하시겠죠. 흔하디흔한, 전혀 소중하지도, 의미가 있지도 않은 공산품이라고요. 저를 미쳤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런 소리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어왔어요.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입니다. 저는 누군가의 유품이자 마지막 기록인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모으기 시작했어요. 가장 좋은 건 타인의 몸에 달려있던 인공신체라 그것들을 합법적으로 수거했답니다. 그리고 방과 언덕을 만들었죠. 지하실은 저만의 우주나 마찬가지예요. 저는 그 안에서 누구든지 될 수 있고, 언제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어요."

 

이야기를 끝냈을 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소라는 가만히 유 작가를 바라보더니 훌쩍 왼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부드럽지만 일반적인 피부와는 다른 검지와 엄지가 유 작가의 늙어가는 피부를 더듬었고, 오른쪽 귀에 달린 조그만 링에 닿았다. 소라가 말했다.

 

"저는 당신도 될 수 있답니다. 당신이 거쳐온 모든 기억, 그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요. 죽은 이들은 제 안에서 여전히 살아있죠. 궁금하지 않나요? 당신이 오롯이 혼자만 쌓아온 시간을, 어쩌면 당신 그 자체일지도 모르는 시간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기분을?"

 

소라는 싱긋, 웃으며 손을 뗐다. 유 작가는 저도 모르게 귓불로 손을 가져가 링을 만지작거렸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24k 귀걸이였다. 외증조부가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남긴 물건이었다. 귓불에 박힌 노란 금속은 몇 세대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을 터였다. 유 작가가 링을 만지며 머뭇거리는 사이, 소라는 느긋이 하품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지막 인터뷰가 만족스러웠을지 모르겠네요. 저는 이제 다시 잘 시간이랍니다."

 

노인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소라는 두 번째 하품을 하며 계단 밑으로 사라졌고, 유 작가는 홀로 테이블 앞에 남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귀에 걸린 링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물건과 죽은 몸의 기억을 읽으며 모두가 될 수 있는 존재라니, 모두를 이해하고 한 생에 여러 삶을 유영하는 존재라니. 그게 신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유 작가는 자신이 맞닥뜨린 얼굴을 다시 한번 곱씹었고, 이내 조용히 고물상을 빠져나왔다. 기분 탓인지, 쌓이거나 널브러진 물건들이 그저 물건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것들이 꼭 썩지 않는 살점 같다고 생각하며 차에 올랐다.

***

이후로도 종종 유 작가는 소라게 고물상을 찾았다. 하는 일이라곤 하루에 한 번 깨어나는 소라와 함께 늦은 식사나 브런치, 혹은 티타임을 가지는 게 다였다. 소라의 고물상은 점점 커졌다. 줄어들지 않는 엄청나게 많은 물건, 물건, 물건들. 한때는 신체였던 물건들, 모두 누군가의 유품이었을 고물들이 쌓였다. 사람은 죽었으나 물건은 죽지 않는다. 썩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바깥에서는 고물상을 향해 동네의 흉물이라며 손가락질했다. 그들에게 소라가 쌓아 올린 기억의 요람은 그저 쓰레기장일 뿐이었다. 누군가의 추억이, 흔적이 그저 쓰레기가 될 수 있었다. 소라는 그것들을 거두는 유일한 손길이었다.


더 오랜 세월이 지나, 백발의 노인이 죽었고 노인의 역할을 유 작가가 대신하게 되었다. 소라의 식사를 준비하고, 소라가 편히 잠들 수 있도록 집안을 지켰다. 그리고 소라의 꿈을 위한 물건을 모았다. 소라는 자신이 거둬들인 물건들처럼, 여전히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었다. 삐걱대는 기계팔을 또 다른 기계팔로 바꿔 끼며, 박동이 주춤하는 심장을 또 다른 심장으로 교체하며 아주 오래, 오래 이 곳에 남아있을 것이다. 쓰레기장은 언덕이 되고, 산이 되고, 견고한 성이 되어 결국에는 유적이 되겠지. 유 작가는 자신은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대신 영원해질 수 있는 방법도 알았다. 그는 백발의 노인이 아주 오랫동안 소라의 곁에 머무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연결되고 싶은 마음,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계시와도 같았다.


소라와 두 번째 인터뷰를 한 어느 날과 같이 노을이 짙은 저녁이었다. 유 작가는 오랜 세월 귓불에 자리한 손톱만한 링을 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세상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소라와 엇비슷한 몸을 지닌 이들도 생겨났으나 소라와 같은 마음을 지닌 이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티슈 한 장을 꺼내 그 위에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짧은 편지를 적고, 귀걸이를 감쌌다. 소라는 아직 자고 있었다. 그가 배가 고파 깨어났을 땐, 아마 자신은 잠들어 있을 터였다. 내일 이것을 소라에게 전해줄 것이다. 소라는 이 귀걸이를 통해 자신을 기억하겠지. 어쩌면 꿈속에서 또 다른 내가 되겠지. 자신이 깨어나거나 깨어나지 않는 잠이 든 후에도. 모든 건 한낱 손끝에서 시작된 것이다. 손끝은 사물과 타인을 가장 확실히 인지하는 첫 번째 부이므로.

잠에 들기 직전, 그는 소라의 끝을 상상했다. 소라가 여행한 모든 삶의 끝을 상상했다. 함께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그들과, 귓가에 소라의 목소리가, 숨결이 닿는 듯했다. 그 기분이 뭔지 알 것 같아. 그는 작게 읊조리고서 티슈에 적은 편지를 곱씹으며 눈을 감았다.

[소라. 당신은 신이 되어가고 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해. 언젠가, 당신이 너무 꽉 차서 텅 빈 것 같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지. 물이 흘러넘치는 유리컵처럼 말이야.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 고작 유리컵이라니, 우습네. 당신은 끝이 없는 바다야. 바닥없는 심해. 어쩌면 우주와 마찬가지. 하지만 언젠가는 너의 꿈도 끝나는 날이 오겠지. 이건 내가 남기는 기억의 살점이야. 때까지, 내가 당신 꿈의 일부로 남을 수 있기를.]

끝.
조예은 작가의 『핑거팁 메모리』는 코리아나미술관 *c-lab 6.0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c-lab 6.0 리서치 딜리버리 3, 4, 5호를 통해 발행되었습니다. 

Copyright  코리아나미술관│해당 글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엄격하게 금지합니다. 
스페이스 씨
coreana.artmuseum@gmail.com
서울시 강남구 언주로 827 02-547-9177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