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2월 초순에 중학교 선배님으로부터 카톡을 받았다. 국경선평화학교 건축 소개와 함께 1만 평화시민캠페인에 참여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사실 선배님과는 SNS 댓글에서 인사만 했을 뿐 일면식도 없다. 불현듯 날아온 기부 요청에 내 마음이 선뜻 화답한 것은 국경선평화학교를 시작한 정지석 목사님(선배님의 남편)이 추구하는 퀘이커 영성에 대한 글을 읽고서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도 침묵 속에서 진리의 빛을 발견하기를 기도할 때 국경선평화학교 건축이 하나님의 선한 일이라는 확신과 동참해야 한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나 쉽게 결정을 할 수 있었다.

명기건 중 도서실 기금을 하기로 했다. 내 평생을 교육자로 살았고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우리 마을 도서관이었고 하버드 졸업장보다 소중한 것이 책을 읽는 습관이다” 라는 빌 게이츠의 고백이 더욱 나를 도서관 예찬론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선배님께 기금 소식을 전했을 때만 해도 내년에 예정된 나의 명예퇴직을 기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선배님께서 '누구의 이름을 기념하고 싶어? 본인? 부모님?' 하고 물었을 때, 문득 곧 엄마의 기일이라는 것이 생각이 났다. 내년이면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가슴 깊숙이 묻어놓은 엄마가 돌아가신 지 40주기가 된다. 나는 2남 3녀 중 넷째다. 우리 오남매는 엄마를 이야기할 때마다 모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바탕 눈물바람을 한다.

어머니는 서울 명륜동에서 명문가의 맏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영민하여 사랑과 기대를 한몸에 받았으나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귓병을 앓은 후, 들을 수가 없어 더 이상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대신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줄줄이 태어나는 동생들을 보살폈다. 기독교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엄마는 자신의 상처를 믿음으로 보듬으며 청춘 시절을 희생하셨다. 아버지와 결혼한 후에도 오남매를 낳아 키우면서 과수원집 큰 살림을 꾸려나가느라 쉴 틈 없이 일하셨다. 새벽마다 엄마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아이들이 자는 머리맡에 꿇어 엎드려 기도를 하셨다. 나는 나이 든 후에야 미동도 없이 속으로 부르짖는 기도가 어머니의 힘겨운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다른 상처와 고통을 혼자 감내하며 신앙과 자식들만을 희망으로 아셨던, 맑고 기품있는 얼굴에 한복을 입고 양산을 받쳐 든 모습이 여리고도 강인한 찔레꽃 같았던 우리 엄마, 일만 하다 일찍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2023년 어머니의 40주기 기일에 코리아 피스컴 도서실에 엄마의 이름 이혜영 을 새긴 현판을 걸고 그 앞에 찔레꽃 한 다발을 놓아드리고 싶다. 어머니는 찔레꽃 옆에 앉아 우아하게 책을 읽고 깊은 신심으로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실 것이다. 

최인순 (경북 경산시 남성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