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손녀, 할아버지 이름으로 평화학교 교실건축 기부>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저에게 남겨주신 유품들을 정리해서 돈을 조금 마련했습니다. 이 돈을 독립운동가였던 조상들-증조할아버지, 증조고모할머니, 할아버지-를 기리며 국경선평화학교 교실기금으로 드리고자 합니다. 이분들의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이 국경선평화학교 교실에서 뿌리 내리고 꽃피워 평화의 열매로 맺힌다면 어머니도 매우 기뻐하고 감격하실 것입니다.
20대에 이민을 떠나 20여 년을 미국에서 살면서 막연히 조상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 의미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살면서 우연한 기회에 국경선평화학교를 만났고 ‘분단은 아직 완전한 독립이 아니기에 피스메이커 육성을 제2의 독립운동이라 믿고 3월 1일 개교했습니다. 국경선평화학교는 제2의 독립운동학교입니다.’ 라는 소개를 들으면서 문득 독립운동가였던 조상들이 떠올랐습니다.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죽임을 당하신 증조할아버지 김이직과 증조고모할머니 김윤신, 평남 용강에서 명신학원을 세워 아버지의 뜻을 이어 나갔던 할아버지 김린성. 그분들의 희생과 헌신을 되살리면서 나의 정체성, 삶의 방향과 사명들에 대해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고 이분들의 피가 저에게 흐른다는 것이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국경선평화학교 피스메이커 교육을 받고 학교건축에 동참하게 되면서 마치 조상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국경선평화학교로 와 저를 만나는 듯한 전율과 감동을 느낍니다. 이 길로 인도해 준 국경선평화학교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미력하나마 남은 생을 피스메이커로 뛰면서 독립운동가문을 평화운동가문으로 이어 나가자고 다짐해 봅니다.
김지나 (국경선평화학교 피스메이커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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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나 피스메이커 덕분에 국경선평화학교-코리아피스컴 안에 독립운동가 김이직선생의 독립애국정신이 들어오게 됨은 무한한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일제 망국기에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에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듯이 남북한 분단시대에 나라를 하나로 만들 평화통일운동가들이 있어야 할진데 국경선평화학교는 이 소명을 품고 후세들에게 독립애국정신을 평화통일정신으로 계승하는 배움의 터전이 될 것입니다. 독립운동 가문에서 평화통일 가문으로 이어가는 새 전통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정지석 (국경선평화학교 대표)의 답신
* 독립운동가 김이직(金利稷, 1875~1920)은 평안남도 용강군 출신으로 1904년 대한제국 장교로 근무했고, 러시아 연해주 니콜스크로 망명해 애국지사 김치보가 운영하는 건재약국 덕창국 주임으로 일하면서 1912년 한인학교인 동흥학교 설립 참가를 계기로 교육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3.1운동 직전에 우스리스크 한인회 초대회장이 되어 전로한족중앙총회가 확대 개편된 대한국민의회 상설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김이직이 주임으로 있던 덕창국은 중요한 항일운동 거점이자 이동휘, 김립, 이인섭과 홍범도 등 독립운동가들의 비밀모임 장소였다. 러시아와 중국에서 활동하던 정치망명자들이 서신 연락을 하거나 유숙하고 경제적 원조를 받는 장소였다. 김이직은 안중근 의사 전기 간행을 위한 기념사진 판매 책임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김이직이 러시아에 이민한 지 10여 년 동안 한푼도 저축하지 못했던 것은 어려움을 겪는 동포들을 위한 구제와 교육사업에 모든 소득을 다 사용했기 때문이다. 김이직은 홍범도가 이끄는 솥밭관 군대에 식료, 의복, 신발 뿐만 아니라 무기까지 공급하며 항일 무장투쟁 세력을 지원하던 중 일제의 첩보에 걸려들어 1920년 일본군에 의해 한인지도자 최재형, 엄주필, 황경섭과 같이 체포되어 사살되었다. (1920년 5월 6일자 일본신문에 육군성 발표 보도, 5월16일 상하이 독립신문도 김이직, 최재형, 엄주필, 황경섭이 사살되었다고 보도) 1977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평남 용강에서 명신학원을 설립해 아버지 김이직의 뜻을 이어 나간 아들 김린성도 훈장을 수여받았다. 김이직의 여동생 김윤신도 밀정 함동훈을 살해하고 민족해방운동에 투신하다가 1943년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