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리셋 버튼, 그 남자의 완두콩밥
완두콩의 제철은 5월에서 6월까지다. 시장에 완두콩이 보이기 시작하면 몇 킬로그램은 거뜬히 주문해둔다. 쓰임새가 다양해 신선할 때 얼려두면 겨울까지 요리교실의 든든한 재료가 된다. 다만 대량 주문한 완두콩 꼬투리를 까는 일이 만만치 않아, 주말에 맞춰 주문하고 가족에게 부탁한다. 남편도 그 많은 완두콩을 영화를 보거나 맥주를 마시면서 잠자코 까준다.
완두콩은 지중해 연안 지역이 원산지로, 스페인에 살던 무렵 초봄이면 완두콩을 데치거나 푹 삶아서 올리브오일을 듬뿍 뿌려 먹곤 했다. ‘완숙콩’이라고도 부르는 이 콩을 엄마는 늘 ‘완두콩’이라고 부르며 봄이면 매일같이 아침에 완두콩밥을 지어주었다. 초봄에 덜 자라 부드러운 상태로 수확한 것이 완두콩, 완전히 익은 뒤 수확한 것을 완숙콩이라고 하며 가장 이른 시기에 수확해 꼬투리째 먹을 수 있는 것은 ‘꼬투리용’이라고 전문서에 적혀 있었다. 즉 한국에서 5월 말부터 6월 초에 수확되는 것은 충분히 익은 완숙콩이다.
어릴 적부터 콩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나는 엄마의 완두콩밥만큼은 좋아해서 봄이 오면 완두콩밥을 먹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남편이 꼬투리를 까주면 처음 만드는 요리는 완두콩밥이다. 흰쌀에 청주와 소금을 약간 넣어 안친 후, 갓 지어 따끈따끈할 때 콩밥을 주걱으로 살살 섞어준다. 간이 밴 밥, 완두콩의 고소한 향과 풍미가 입안에서 제대로 어우러질 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진다. 후각과 미각을 자극하는 ‘엄마의 맛’이다.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지내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독을 느꼈다. 그곳에서 실현하지 못한 꿈을 이어나가기 위해 일말의 불안감을 안고 서울로 거점을 옮겼다. 여전히 이방인이었기에 늘 내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지만, 유럽에서처럼 큰 고독감에 사로잡히진 않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연수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며 연세대학교 대학원에 다니는 바쁜 생활이었다. 친구들과의 교류도, 수업도, 연애도 열심히 했다.
20대 후반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도쿄에 있는 대학원에서 수학하며 한국의 문화인류학 교수를 꿈꾸었다. 곧 일본에 돌아갈 거라는 전제하에 지금은 남편이 된 병진 씨와 끝이 보이는 연애 중이었다. 서울을 떠나던 날 새벽 무렵, 공항 갈 준비를 하던 나에게 그가 아침을 차려줬다. 완두콩밥과 인스턴트 미역국, 스팸, 달걀프라이, 김, 멸치볶음이 올라간 작은 소반. 처음으로 한국다운 평범한 아침밥을 먹는 느낌이었다. 병진 씨의 완두콩밥은 특별한 비법 같은 게 없었을 텐데도 엄마의 완두콩밥보다 몇 배는 맛있게 느껴졌다.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완두콩밥을 2인분만 지을 때는 꼬투리가 제거된 완두콩을 한 팩씩 사곤 한다. 그러고 보니 요리교실에 필요해서 며칠 전 주문한 꼬투리를 까지 않은 완두콩 1킬로그램이 든 종이봉투가 현관에 방치되어 있다. 오늘은 남편에게 꼬투리를 까달라고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