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영화제에 다녀왔습니다. 올해는 총 9편의 영화를 보았어요. 그리고 올라오자마자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보았구요. 어제는 배우 브루스 윌리스의 은퇴를 생각하며 <12 몽키즈>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한 주로 따지면 대충 하루에 1.5편의 영화를 본 셈인데요. 오랜만에 ‘원데이 원무비’, 하루에 영화 한 편이라는 이름값을 한 것 같아 뿌듯한 한 주를 보냈습니다.


그런 김에 이쯤에서 원데이 원무비 이름의 유래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어느덧 벌써 열 번째 메일을 쓸 차례라, 밝힐 때가 된 것 같기는 하네요. 솔직히 많이 늦은 것 같아서 이제서야 그 이유를 밝힌다는 것이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실은 별게 아니라서 말하는 것을 계속 늦추고 있었던 것이기도 해요. 그런데 문제는 한 번 뜸을 들이고 나니까, 한 번 늦추고 나니까, 늦춘 김에 조금 더 늦추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NO.010]


끝까지 읽어주세요.


2022년 5월 7일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죄송하지만 다른 이야기를 먼저 해봐도 될까요. 아무래도 이번 주는 <닥터 스트레인지> 신작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한 주인 것 같습니다. 영화를 잘 보지 않는 제 주변 친구들도 이 영화만큼은 꼭 ‘관람’하러 영화관에 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정도로, 핫한 영화인 것은 사실이니까요. 실제로 이 영화는 개봉한지 3일 만에 관객 수 236만 명을 넘기는 수치를 기록했는데, 이는 2021년부터 지금까지 개봉한 영화들을 모두 합쳐서 봤을 때 ‘이미’ 다섯 번째로 많은 관객을 기록한 것입니다. 참고로 1위는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750만), 2위는 <모가디슈>(361만), 3위는 <이터널스>(305만), 4위는 <블랙 위도우>(296만)인데, 대부분이 마블 영화라는 것이 이제는 전혀 놀라운 현상인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것은 사실입니다.


<모가디슈>에 관한 약간의 소식 하나 알려드리자면, <모가디슈>는 어제(5월 6일) 열린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 부문 대상을 받았습니다. 대상뿐만 아니라 작품상, 타 영화 시상식의 ‘촬영상’ 격인 예술상을 수상했는데요. 이 영화는 앞서 제가 임의로 뽑은 통계에서, ‘그 마블’ 영화들 사이에서 순위권 다툼을 할 정도로 경쟁력이 있었던 괜찮은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관객 수가 작품의 퀄리티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영화와 관련해서 제가 씨네21에 쓴 글이 있으니 한 번 참고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류승완 감독이 선택한 '모가디슈' 엔딩에 대하여-


백상 얘기가 나온 김에 백상 얘기를 조금 더 하자면, 전체적으로 수상 결과가 저의 개인적인 선호와 꽤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감독상을 받은 <킹메이커>(변성현 감독)와 시나리오상을 받은 <연애 빠진 로맨스>(정가영 감독), 이 두 작품은 최근 극장에서 본 한국 영화 중 가장 재밌었던 영화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감독 모두 제가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인데요. 특히 정가영 감독의 <조인성을 좋아하세요.>는 제가 보자마자 별점 5개를 던지며 정가영 감독의 팬이 되겠다고 선언을 한 20분짜리 단편 영화입니다. 유튜브에 있으니 심심할 때 한 번 보시는 것을 추천드리구요. 관련해서 당시에 썼던 글이 있어요. 뉴스레터 맨 마지막에 첨부해 놓겠습니다.

정가영 <조인성을 좋아하세요.>



이제 원데이 원무비에 대해 얘기해 볼까요. 아 맞다 아직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 대한 얘기를 마치지 못했네요. 영화 어떻게 보셨나요? 생각보다 꽤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은데요. 저는 제 선호/평가와는 별개로,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거라는 예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제 예측이 틀렸다는 걸 바로 느끼게 된 것은, 이 영화를 본 제 지인 중 한 명이 개봉 당일 영화를 보자마자 저에게 영화 재미없고 개노잼스트레인지라며 분노의 카톡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대체 왜 저에게 화를 내시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잘 알았구요.. 근데 또 다른 지인 중 한 명이 이 영화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보내는 것을 보고,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참고로 이분은 본인 인스타에 이 영화와 관련한 포스팅을 수 십 개 넘게 올리면서 이 영화를 찬양했고, 심지어 추후 닥터 스트레인지 관련 타투를 새길 것이라며 그 시안을 공개하기까지도 했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그냥 마블 영화 그 자체였다고, 마블이 마블 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긴 합니다. 대형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내놓는, 더 이상 빼고 더할 것 없는 한상차림 느낌? 마블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시리즈의 새 영화/드라마가 나올 때마다 그 재미의 퀄리티가 떨어지지 않고 오랜 기간 동안 늘 평균 이상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만큼 영화 본편의 비중이 덜 중요해진다는 것입니다. A라는 영화가 A 영화 그 자체로 재밌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 있었던 수많은 마블 영화들 덕분에 재밌다는 것이 ‘영화’로서는 큰 단점이라는 생각이 가시질 않습니다. 새로 나온 영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봐야 하는 ‘다른’ 시리즈들도 너무 많아지고 있구요. 그래서 그 모든 시리즈를 다 챙겨 보고 난 다음 신작을 첫 관람하게 될 때의 재미는 정말 그 어떤 영화보다 크지만, 영화로서는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을 것 같아요.



디즈니+의 <완다비전>을 보지 않고는,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의 완다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 지도 모릅니다.


저는 별 세 개, 그리고 한 줄 평으로 ‘참 쉽게 이해되는 멀티버스와 대혼돈의 밸런스’라고 썼습니다. 멀티버스라는 복잡한 개념을 정말 쉽고 재미있게 잘 풀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지만, 결과적으로 영화 내의 많은 밸런스가 붕괴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밸런스란 히어로 간의 파워 밸런스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영화’라는 예술 내의 밸런스를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역경도 이겨내는 마블 히어로들이지만, 이 ‘혼돈’만큼은 정리하기 정말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로 이제는 원데이 원무비의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원데이 원무비’는 말 그대로 하루에 영화 한 편을 볼 목적으로, 대학생 시절에 혼자서 시작했던 캠페인 같은 것입니다. 하루에 한 편 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단순합니다. 영화를 취미 이상으로 보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일단 많이 봐야 될 것 같았거든요.


그 무모한 캠페인을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방학 때만 하다가, 학기가 시작하고 바로 멈췄던 것 같기도 하구요. 그리고 그 뒤로는 딱히 하루에 영화 한 편을 꼭 봐야겠다 같은 목표를 세운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원데이 원무비’를 이 뉴스레터의 이름으로 정한 것일까요? 아무도 물어본 적은 없지만, 혼자 묻고 혼자 답해봅니다.


사실 ‘원데이’와 ‘원무비’ 사이에 숨겨져 있는 기호가 하나 있습니다. 그건 ‘ = ‘ 입니다. 하루에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매일을 영화 한 편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지은 제목인 것입니다. 조금 부끄럽지만 저는 자주 제 삶이 영화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매일 같이 다이나믹한 액션이 펼쳐지거나, 사실 제가 출생의 비밀이 있었다는 반전이 있거나, 귀신이 나오거나, 찐한 러브 스토리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저는 제 하루하루가 재밌고, 영화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이런 생각 하는 거… 저뿐인가요..?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늦추는 것도, 제 자신의 영화적 연출이 무의식적으로 발현됐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원래 가장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미루는 스타일이라서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스트레인지가 자신이 사랑했던 크리스틴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온 유니버스에 있는 모든 당신을 사랑해, 라는 대사를 듣고, 어쩌면 이 대사가 마블 영화 역사상 가장 로맨틱한 대사라는 평가(?)를 받는 아이언맨의“I love you, 3000”을 대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저는 그 무엇보다 이 대사가 나온 타이밍이 너무 좋았습니다. 영화가 거의 끝날 때쯤 나오는 대사이거든요. 스트레인지 입장에서 얼마나 그 말을 하고 싶었을까요. 정말 그 말을 하고 싶은 순간이 3000번쯤은 있었을 텐데, 끝까지 참고 미루고 늦추다 여정이 다 끝맺음 되려고 할 때 그 고백을 했다는 것이 저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벌써 열 번째 메일입니다. 어쩌면 이제야 열 번째 일수도, 아니면 아직도 열 번째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늦추는 건, 그래야만 듣는 사람이 제 이야기를 끝까지 오랫동안 들어 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마지막 메일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나중에 할 거니까요. 궁금하시면 끝까지 귀 기울여주시길! 그리고 이번 글도 끝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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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성을 좋아하세요.>

사랑에 대한 궤변을 늘어놓던 가영은, 영화에 집중하라는 친구의 말에 갑자기 조인성을 캐스팅하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가영의 주변 사람들은 가영에게 격려를 보내는 것 같으면서도 반신반의해한다. 그들이 가영에게 부정적인 의견을 완곡하게 표현하기 위해 이용하는 것은 시나리오다. 그 유명한 조인성을 캐스팅하기 위해선 시나리오가 먼저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영은 자신의 시나리오가 조인성이 아니면 쓸모없는 시나리오, 조인성에 입각한 시나리오이기 때문에 캐스팅이 확실치 않으면 쓰지 않겠다고 말한다.

장난스럽게 들리던 대화들은 결국 조인성이 실제로 영화에 등장하게 되면서 진지한 대화로 탈바꿈되고, 중간 중간 삽입되었던 가영이 이불 속에 누워있던 모습들도 처음엔 잉여로워 보였지만 마지막엔 대단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 것들이 스스로 편견에 빠져있지 않았었나 되돌아보게 한다. 영화 제목을 당연히 의문문이라고 생각했다가 사실 명령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영화에선 창작자들의 고충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차피 캐스팅 안 될 것 같으니까 접자‘는 현실적 제약이 얼마나 많은 창작자들의 상상을 제한했을까. 가영이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들은 정가영 감독이 실제로 제작과정에서 나눴던 대화들을 그대로 쓴 것 같이 리얼하게 느껴지는데,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이야기는 가영의 의심처럼 꿈일 수도 있다. 하지만 꿈인지 꿈이 아닌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가영 감독이 실제로 조인성 배우를 캐스팅한 것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원데이 원무비 지난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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