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이 하나 있습니다. 영화 생각을 하다가 잠에 들었는데 그 영화에 관한 꿈을 꾸었다, 근데 그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라는 이야기로 시작한 글이었습니다. 그 글은 여기서. 영화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 전에도 영화 생각을 하다가 잠에 든다, 뭐 이런 이미지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때 써야 했던 영화 비평이 하나 있었는데 글이 잘 풀리지 않았고, 그래서 평소에 그 영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보니 그런 꿈이 꿔져버린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저는 이런 걸 자꾸 변명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NO.14]

 

비겁한 변명 : 날 쏘지 마라

 

2022 6 4



‘변명’하니까 떠오르는 영화가 있습니다.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아주 긴 변명>이라는 영화입니다. 영화 소개 문구엔 ‘아내가 떠나고 난 후, 뒤늦게 시작된 아주 긴 사랑 이야기’라고 적혀 있고, 씨네21의 기자/평론가 별점 평균 7점 대의 영화입니다. 나쁘지 않네요. 오, 일본 영화전문지 키네마준보의 2016년 베스트 영화 5위에 뽑히기도 했다네요. 근데 왜 이렇게 마치 영화를 안 본 것처럼 어디서 퍼 온 정보만 적는 거냐구요? 정답은 안 본 게 맞기 때문입니다. 보지는 못했지만, 제목이 떠올랐을 뿐입니다. 그럴 수 있는 거잖아요? 안 봤지만 제목만 떠오르는 게.


또 떠오른 다른 영화 한 편은 <실미도>입니다. <실미도>는 진짜로 본 영화입니다. 어렸을 때, 아직 영화 잘 모를 때(지금은 잘 아는 척), <실미도> 보고 와 이게 진짜 영화지, 특히 마지막 즈음에 그렇게 엄격하던 조 중사(허준호)가 뛰어나갈 때 툭 떨어지는 사탕 꾸러미 보면서 정말 감동했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나온 설경구 배우의 명대사 다들 기억하시죠? “비겁한 변명입니다!” 두두두두두. 그러자 안성기 배우가 마지막으로 “날 쏘고 가라.” 하는 것까지. 바로 이 대사 때문에 이 영화가 떠오른 것이었는데요. 지금뿐만이 아니라 저는 가끔, 이 장면을 떠올리며 설경구가 쏜 총에 맞은 듯한 기분을 느끼곤 하는데요. 영화 글을 쓸 때, 특히 다른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나만 좋아하는 영화에 관해서 쓸 때, 자주 ‘총 맞은 것처럼', 하게 됩니다. 다 쓴 글을 다시 읽고나서, 이건 내 글이 아니라 감독을 대신해 관객들에게 하고 있는 변명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평론가는 프로 변명가이기도 합니다. 특히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얘기할 때 더욱 그렇게 됩니다. 그렇게 쓴 글의 제목에는 그럴듯한 말을 지어내보지만, 사실 그 모든 글의 부제를 ‘감독 OO를 위한 변명’으로 통일시켜도 될 것 같기도 합니다. 홍상수를 위한 변명, 사프디 형제를 위한 변명, 정진영을 위한 변명, 데이빗 로워리를 위한 변명. 네 이건 모두 제가 실제로 좋아하는 감독들의 이름입니다. 그들은 제가 자신을 대신해 변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요..? 알아주지도 않는데 혼자 이런 노력을 하고 있는 제 자신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연애도 이렇게까지 안 하는 것 같은데요. 이 감독의 의도는 사실 그런 게 아니에요 여러분. 이런 측면을 봐주셔야 합니다. 오해입니다. 그러니까 쏘지 마세요. 차라리 날 쏘고 가세요. 아니 진짜 쏘고 가지는 마세요..

  


이번 주엔 씨네21에 오랜만에 비평 글을 하나 썼습니다. 말 그대로 ‘아주 긴 변명’인 것 같기도 합니다. 영화는 6월 1일 개봉한 <애프터 양>입니다. 최근 핫했던 <파친코>를 연출한 코고나다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입니다. 코고나다는 한국에서 태어난 미국 국적의 감독이라, ‘국뽕적’으로 왠지 조금 마음이 가는 감독인데요. 그래서 그를 위한 변명을 쓴 것은 아니고, 진짜 영화가 좋아서 쓴 글입니다. 올해 전주영화제의 개막작이었고, <더 랍스터>, <킬링 디어> 등의 주연이었던 콜린 파렐이 주인공 제이크를 연기합니다. 최근 <더 배트맨>에서 펭귄 역할을 맡았었는데, <더 배트맨> 또한 제가 열심히 변명했던 영화라 한 번 언급해 보았습니다.


휴일도 하루 껴 있는 이번 주인데, 색다른 영화를 찾는 분들께 이 영화를 추천드립니다. <애프터 양>은 SF 성격을 갖고 있는 영화인데요. 영화 속 시대 배경이 정확히 몇 년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간은 미래이고, 인간의 외양을 한 안드로이드가 보편화된 시대입니다. 그들을 ‘테크노’라고 부르는데, 제이크의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테크노의 이름이 ‘양’입니다. 제이크가 양을 구입한 이유는 중국에서 입양한 딸 때문입니다. 양은 중국계 ‘문화 테크노’로서(..로써?) 딸에게 중국 문화를 알려줌과 동시에, 미국에서의 원활한 적응을 돕습니다. 저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갑자기 로서와 로써가 헷갈리는데요. 로써는 도구로써, 로서는 친구로서, 이런 식으로 쓰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친구이자 도구이도 한 안드로이드에게는 과연 어떤 표현이 맞는 것일까요?



이 헷갈림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와도 연결됩니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면, 방금까지 작동하고 있던 양이 마치 버그가 걸린 듯 움직이지 않습니다. 안드로이드에겐 분명 작동 오류가 생길 수 있는 것이고, 그러면 고치면 되는 것이고, 안 고쳐지면 리퍼를 받거나 새로 사면 되는 것일 텐데, 영화는 제이크가 양을 수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이크가 이렇게 노력을 하는 이유는 딸 때문입니다. 어린 딸은 아직 양과의 이별을 원치 않습니다. 양이 고쳐지기 전까진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딸의 어리광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대체 언제까지 양과 함께 할 작정인 것일까요. 언제 양을 떠날까요. 아니 언제 양이 강제로 자신을 떠나게 할까요. 이 모습에서 저는 <토이 스토리> 시리즈를 떠올렸습니다. 물론 조금 다르긴 합니다. <토이 스토리>의 토이들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어떤 것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신체적 차이가 애초에 그 생각을 막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반면 인간과 똑같은 외양을 하고 있는 양은 인간을 궁금해합니다. 아무리 흉내 내어도 가질 수 없는 인간의 감정, 혹은 인간성이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양은 아마 그러다가 고장이 나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제이크는 양의 수리 과정에서 양에게 특별한 기억 저장 장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곳엔 양이 제이크 가족을 만나기 전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양의 기억을 스크린에 그대로 재생해 보여주는데, 이걸 보고 있으면 ‘문화 테크노’인 양이 카메라, 혹은 영화 그 자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제가 쓴 글의 제목도  ’양'이라는 영화가 박물관에 전시된 이유에 대하여 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번 주 발행된 씨네21을 통하여.. + 다음 주에 이 변명 같은 글에 관한 변명을 여기에 더 적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아쉬우니까 최근 개봉작 얘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5월 25일 개봉한 <플레이그라운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벨기에 신인 감독 로라 완델이 연출했고, 작년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어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학교에 이제 막 입학한 소녀 노라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영화인데, ‘놀이터’라는 제목과 달리 그렇게 귀여운 영화는 아닙니다. 사실 원래 프랑스어 제목은 UN MONDE로, a WORLD 라는 뜻인데 왜 이렇게 됐는지. 아무튼 저는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이 떠올랐습니다. 영화의 주요 줄거리가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따돌림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또 떠오르는 영화는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였는데, <플레이그라운드>가 다르덴의 영화처럼 1인칭 인물을 흔들리는 카메라로 따라다니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막 주제적으로나 연출적으로 신선한 영화라기보다는 확실한 감정의 울림을 주는 영화였다고, 또 변명을 해봅니다.


보면서 머릿속에 가장 많이 떠오른 질문은 ‘나라면 어떻게 도울까’ 였습니다. 영화에는 ‘도움을 주는 순간’이 자주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라는 시기는 그 누구보다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는 시기, 그래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자주 받는 시기입니다. 노라는 학교에서 신발 끈을 묶는 법, 균형을 잡는 법, 수영을 하는 법, 수학 문제를 푸는 법을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 해결합니다. 그런데 정말 도움을 받는 것만이 능사일까요.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장면은 벨기에서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아니 저 역시 많이 목격/경험해 본 상황입니다. 수학 시간입니다. 선생님이 노라에게 이 문제를 풀어보라고, 답이 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노라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노라 뒤에 있던 한 친구가 난처한 노라를 돕기 위해 귓속말로 답을 알려 줍니다. 이 도움은 정말로 노라를 도우는 길일까요. ‘올바른 도움의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중요한 장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쓰다보니 조금 후회가 되네요. 그냥 <플레이그라운드>로 길게 한 편 적을걸. 그냥 계속 적습니다. 도움의 방법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분야가 저는 아이들의 따돌림 문제(또는 학교 폭력)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플레이그라운드>가 던지는 주요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만약 당신의 자녀가 학교에서 그런 일을 겪는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냥 직접 개입하실 건가요? 따로 따돌림의 주동자 아이를 찾아가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라”하고 다그치실 건가요? 그래도 따돌림이 계속 된다면 볼이라도 꼬집으실 건가요? 딱밤이라도 한 대 하실 건가요? 이게 좀 그렇다면 그 애의 부모를 찾아가실 건가요? 아니면 학교의 선생님을? 2020년대에도 여전히 사건을 최대한 크게 벌리지 않으려 하는 학교에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시나요. 이게 학교가 아니라 군대라면 더 어려웠겠죠. 혹시 그 아이가 학교에서 건들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아이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냥 내 아이를 데리고 그 동네를 떠나실 건가요? 라고까지 생각이 미치셨다면 이미 늦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무 것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아이의 자존감은 절대 회복되지 않을 것이니까요. 앞서 말했듯 아이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플레이그라운드> 이것이 그 누구의 문제도 아닌 아이의 문제라는 것을 명확히 하는 영화입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 생각해야 된다고 말하는 듯한 카메라의 위치, 그것이 감동적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쓰고 보니 <플레이그라운드>와 <애프터 양>을 '도움'의 측면에서도 비교해서 봐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양 역시 아이를 돕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니까요. 글로 풀면 좋은 주제가 될 수도..? 얼마 전 개봉한 <쥬라기 월드 : 도미니언>을 보면서도, 인간 참 이기적이다, 자꾸 인간의 관점으로 공룡을 도우려고 하니까 저 사단이 나는 거지, 저러니까 랩터한테 잡아 먹히는 거지..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요. 이렇게 너무나도 다른 장르의 세 영화가 서로 묶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지 않으신가요? 이 맛에 영화 글 씁니다. 그런데 맨날 이런 생각 하면서 사는 건 아닙니다. 변명 그만할게요. 오늘의 변명은 여기까집니다. 쏘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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