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평생 읽은 것 중 최고의 글이었어요. 라는 말을 듣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듣고 싶은 말이기는 하지만, 애초에 듣기 어려운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큰 칭찬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대충 쓴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세상에 이미 너무나 좋은 글들과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내 글이 감히 그 글들을 제치고 최고의 글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 회의적인 것뿐입니다. 특히 평소에 글을 많이 읽는 사람일수록 그런 기준이 높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반대로 예를 들어 어린 친구한테 제 글을 보여준다면 ‘네 글이 평생 읽은 것 중 최고’라는 말을 운 좋게 들을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데이터 자체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을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자신의 글을 들고 어린 친구들을 찾아가는 것이, 저런 최상급의 칭찬을 듣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NO.21]

개망신 당하고 극복하는 법

2022년 7월 23일


원데이 원무비 11-20호의 머리 그림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한 장면입니다. 이제 조금씩 잊혀가는 무비 스타인 릭 달튼과, 그의 스턴트 배우이자 매니저인 클리프 부스가 주인공인 영화입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릭 달튼을 연기했고, 브래드 피트가 클리프 부스를 연기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잘나가는 두 할리우드 배우가 한물간 배우 그리고 주목받지 못하는 스턴트 배우를 연기했다는 것부터 참 코믹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 코믹한 영화에서 제가 꼽는 가장 웃픈 장면이 바로 사진으로 첨부한 이 장면입니다.

릭 달튼은 더 이상 예전처럼 자신이 원하는 배역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아닙니다. 제작자들이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때 잘나가던 릭 달튼은 이젠 마지막 전투에서 늘 져야만 하는 악역을 맡을 뿐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연기할 수 있다/없다’는 꼭 다른 사람만의 결정은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릭에게 좋은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릭 스스로가 이제는 자신이 그런 깜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연기를 못 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평가로 인해 릭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믿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릭 자신은 이러한 현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고, 자존심도 내려놓은 상태이기는 합니다. 말하자면 ‘큰 칭찬을 바라지도 않는 상태’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현재 모습에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경력에 관한 돌직구를 듣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촬영장에서 대사를 까먹은 다음 홀로 방 안에서 거울을 보며 자책을 하기도 합니다. 그냥 단순한 자책은 아니구요. 온갖 험한 말과 욕설이 동반된 분노에 가까운 무언가입니다. 젠장할. 대사를 까먹어? 넌 쓰레기야, 등신이야. 연습해 놓고도 안 한 것 같잖아. 이게 무슨 개망신이야. 똑바로 들어. 너 대사 한 번만 더 까먹으면 오늘 밤에 총으로 대가리 날려버린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자유롭게 분노 연기 애드립을 하라고 시켜놓고 카메라 뒤에서 낄낄 거리며 이 모습을 지켜봤을 쿠엔틴 타란티노가 떠올랐습니다. 실제로 여러 테이크를 찍은 다음 재밌는 대사를 골라서 짜깁기한 것처럼 보이는 장면인데요. 그때 이 대사만큼은 애드립이 아닌 대본에 적혀있던 것 같은 대사 하나가 귀에 들어왔습니다. 그 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 여자애에게 보여줘. 릭 달튼이 누구인지.”

아직 이 영화를 못 보신 분들은 이 ‘여자애’가 누구인지 의문을 가지실 것 같은데요. 이 여자애는 실은 그냥 애가 아니라 배우입니다. 릭이 악역으로 출연하는 작품에서 릭에게 납치를 당하는 아이를 연기하는 8세 아역입니다. 그렇다면 릭은 왜 대체 이 여자아이에게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앞서 제가 적은 것처럼 조금 수월하게 최고의 칭찬을 받으려는 속셈인 것일까요.
  

릭의 속마음까지 정확히 알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영화에서 릭은 마침내 자신의 불안감을 이겨내고 뛰어난 연기를 선보여 아이뿐만 아니라 영화의 감독에게까지 인정을 받게 됩니다. 감독의 쏟아지는 극찬 세례가 지나간 뒤, 아이가 릭에게 다가와 속삭입니다. 제 평생 본 것 중 최고의 연기였어요. (That was the best acting I’ve ever seen in my whole life.) 이에 릭은 고맙다고 대답한 뒤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사실 릭의 각성 과정은 조금 판타지스러운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일단 영화를 보다 보면 이게 정말 ‘최고의 연기’였는지 의심이 가기도 하구요. 특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력을 생각하면, 영화에서의 연기는 의도적인 과장이 느껴지는 퍼포먼스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건 영화 외적인 요인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라 조금 부정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그걸 떠나서 영화 자체로만 보아도 판타지라고 느껴지는 이유는, 릭이 각성을 하게 되는 계기가 영화에 딱히 존재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한 릭이 혼자서 자책하는 장면과 릭이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는 장면 사이에는 이렇다 할 사건이, 아니 애초에 릭이 등장하는 씬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흔한 영화라면 릭이 뭐 예전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며 영감을 받는다거나, 아니면 이혼해서 같이 살 수 없는 자식들과의 어떤 사건이 있거나..

예시를 들기 위해 가상의 시나리오를 쓰면 쓸수록 구린 영화가 되는 것 같은데요. 역시 영화는 아무나 만드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쿠엔틴 타란티노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든 이유는 그가 그 중간의 과정을 처리하는 방식 때문입니다. 얼마 동안 릭이 아닌 다른 캐릭터들의 상황을 보여주던 영화는 다시 릭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릭은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것처럼 보입니다. 밖에서는 이제 다시 촬영을 시작하기 위해 릭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때 들리는 또 하나의 소리는 릭이 대사 연습을 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휴대하고 다니는 녹음기 소리입니다. 그렇게 자책하고 소리 지르고 이제 망했다고 외치던 그였지만 그새 마음을 추스르고 대사 연습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에는 특별한 각성의 순간이 없습니다. '거울과 나의 대화'와 '뛰어난 연기' 장면 사이에, '녹음기와 나의 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짧은 장면뿐입니다. 나 진짜 쓰레기 같다. 그렇게 연습해놓고도 바보같이 다 망쳐버렸다. 사람들이 다 나 개무시할 텐데 이제 어떡하냐. 너 진짜 어떡할래. 어떡하긴 어떡해, 다시 연습하자. 연습해서 다른 모든 사람들한테 보여주자. 그렇게 릭은 아무 특별한 사건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로부터 특별한 칭찬을 듣게 됩니다. 이때 이 장면이 감동적인 것은 이 칭찬의 표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아까도 말했듯 8살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이 표현은 어른의 입장에서 그렇게 유효한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감동을 느낀 부분은 여기에 ‘아무 특별한 사건이 없음’이었습니다. 영화는 보통 특별한 사건들의 배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무엇이 ‘영화적’이냐, 에 대해 수많은 다른 답이 있겠지만, 우리가 대체적으로 특별한 일이 우연하게 일어났을 때 ‘영화 같다’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특별한 사건만큼은 영화에 꼭 포함되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 같은데요. 특별한 일들로 범벅이 되어 있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에 이런 영화 같지 않은 사건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재밌었고, 저는 그것이 오히려 더 특별하게 느껴져서 이 장면을 좋아합니다.

원데이원무비의 또 다른 '1'호를 기념하여, 좋아하는 장면을 여러분에게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더 공유하고 싶은 것은 이 장면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당신은 해낼 수 있다. 개망신 당한 것도 극복할 수 있다. 대신 그것을 이뤄내기 위한 연습은 필수다. 그러면 어쩌면 누군가에게 평생 본 것 중 최고, 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알겠지 김철홍 이 쓰레기야.. 제발 잘 하자..^^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현재 넷플릭스에서 관람이 가능합니다.
금주 추천작
<로스트 도터>
뭔가 사연이 있는 듯 한 포스터에 있는 여자 레다(올리비아 콜먼)가 그리스 휴가 여행을 떠납니다. 해변가에서 한가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날 한 젊은 엄마가 도터를 로스트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도와줍니다. 도와주긴 도와주는데 레다의 표정이 뭔가 이상합니다. 진짜 도움이 필요한 것은 젊은 엄마가 아닌 레다인 것처럼 보이고, 이내 레다 역시 도터를 로스트한 적이 있다는 사연이 밝혀집니다. 예전엔 부모님과의 트러블은 저만 갖고 있는 건 줄 알았습니다. 제가 본 사람들은 모두 다 멀쩡한 것처럼,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나중에 커서 알게된 건 많은 사람들이 '척'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터에서 마더가 된 레다는, 도터를 로스트하고 나서야 비로소 뭔가를 깨닫습니다. 괜찮은 척하며 삶을 사는 당신께, 정말로 뭔가 로스트하기 전에 이 영화를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sti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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